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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강간 영상 1000개···러 교도소 고발자의 영화같은 탈출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수감자 학대 동영상을 고발한 세르게이 세이브리예프(오른쪽)가 러시아에서 도주해 파리 샤를드골 공항에 도착해 굴라구.넷의 설립자인 인권운동가 블라디미르 아세치킨과 유튜브 방송을 하고 있다. 유튜브 캡처

수감자 학대 동영상을 고발한 세르게이 세이브리예프(오른쪽)가 러시아에서 도주해 파리 샤를드골 공항에 도착해 굴라구.넷의 설립자인 인권운동가 블라디미르 아세치킨과 유튜브 방송을 하고 있다. 유튜브 캡처

러시아를 최근 발칵 뒤집은 익명의 내부고발자가 20일(현지시간) 정체를 드러냈다. 세르게이 세이브리예프(31)가 그 주인공. 그는 러시아의 사라토프 교도소내 의료 시설에서 수감자들이 학대 당하는 다수의 동영상을 최근 익명으로 제보해 공개했다. 그는 20일 BBC와의 인터뷰에서 동영상 공개 후 러시아 당국으로부터 신변 위협을 당했으며, 때문에 프랑스로 도주해 망명을 신청한 상태라고 밝혔다. 그는 러시아를 떠나기 전에는 발 뻗고 잘 수도 없었다며 BBC에 "몇 주 만에 처음으로 푹 잤다"고 말했다. 그가 공개한 동영상은 1000개가 넘는다.

얼굴만 가린 채 알몸 수감자 구타…고문, 강간도  

그의 제보로 공개된 영상에는 해당 교도소 내 의료 시설에서 남성 여러 명이 침대에 묶여 있는 한 남성을 몽둥이로 마구 때리는 모습 등이 담겨 있다. 수감자들이 고문 또는 강간 당하는 모습도 포함됐다고 한다. 이후 논란이 일자 해당 교도소 책임자가 사퇴했고, 러시아 연방교정국은 지난 6일 해당 교도소 직원 4명을 해고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얼굴을 드러낸 세이브리예프는 이날 인터뷰에서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지적했다.

세이브리예프가 학대 관련 내용을 알게 된 건 그 자신이 해당 교도소에 수감되면서였다. 그는 2013년 마약 관련 범죄로 징역 9년을 선고 받았다. 그는 BBC에 자신의 범죄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진 않았지만 “슬프고도 흔한 일”이라고 주장했다. 수감자 학대로 악명 높은 러시아 사라토프의 교도소에 수감된 그는 도착하자마자 심하게 맞았다고 밝혔다. “그들은 누가 대장인지 알려주려고 신입 수감자를 무조건 때렸다”고 했다.

최근 수감자 고문 영상으로 논란을 빚은 러시아 사라토프 교도소. 타스=연합뉴스

최근 수감자 고문 영상으로 논란을 빚은 러시아 사라토프 교도소. 타스=연합뉴스

그는 운이 좋은 편에 속했다. 교도소에서 행정 업무를 맡으면서 PC를 사용할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당시 그의 업무 중 하나는 교도대원들의 보디캠에 녹화된 순찰 영상을 모니터링하는 일이었다. 학대 영상을 보게 된 건 그때부터였다. 교도대원들은 ‘특별히 훈련된’ 수감자들에게 카메라를 건네 다른 수감자들을 고문하도록 했다고 한다. 그는 “(그렇게 촬영된) 일부 영상을 삭제하는 것도 내 업무였다”며 “(삭제된 영상은) 다른 곳으로 전송됐다. 아마도 높은 단계로 간 것 같다”고 주장했다.

영상을 처음 보고 큰 충격을 받은 그는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고 BBC에 말했다. 영상을 따로 복사해둬야겠다는 생각만 했다고 한다. 그가 2019년부터 따로 저장한 동영상만 1000개가 넘는다. 그는 “모두가 교도소에서 구타와 강간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눈으로 직접 보기 전에는 그 어떤 상상도 할 수 없었다”면서 “첫 번째, 두 번째, 그리고 다섯 번째 비디오까지 본 뒤 복사를 시작하기로 결심했다”고 말했다.

“6개월간 지켜보고 있었다” 협박에 도주  

수감자 학대 동영상을 고발한 세르게이 세이브리예프(31)가 러시아에서 도주해 파리 샤를드골 공항에 도착한 모습. 사진 굴라구.넷

수감자 학대 동영상을 고발한 세르게이 세이브리예프(31)가 러시아에서 도주해 파리 샤를드골 공항에 도착한 모습. 사진 굴라구.넷

그가 동영상을 넘긴 러시아 수감자 인권단체 ‘굴라구.넷’을 알게 된 건 올 초였다. 이 단체의 설립자인 블라디미르 아세치킨이 러시아 교도소 내 인권 문제를 다루는 유튜브 영상을 보게 됐다. 세이브리예프는 자신이 수감 중인 사라토프 감옥도 언급되는 것을 듣고, 그가 모아둔 영상들도 확실한 증거가 될 거란 생각을 했다. 지난 2월 석방된 후 그는 몇 개월에 걸쳐 이 단체에 파일을 넘기기 시작했다.

러시아 당국은 그러나 익명의 내부고발자가 누군지 이미 파악하고 있었다. 세이브리예프는 지난달 다른 지역을 방문하러 상트페테르부르크 공항에 들렀다가 체크인 데스크에서 민간인 복장을 한 남성들을 만났다. 그들은 “6개월 동안 당신을 지켜보고 있었다”면서 “반역죄로 20년간 감옥에 잡아넣겠다”고 협박했다. “조만간 모든 것을 자백한 뒤 감옥에서 숨진 채 발견될 것”이라는 말도 했다고 한다.

그들은 거짓 진술을 요구했다. “‘외국 자본’인 굴라구.넷의 사주를 받아 러시아 교정 당국을 불신하게 하는 증거를 수집했다”고 진술하면 징역 4년으로 낮춰주겠다는 조건이었다. 세이브리예프는 조사에 협조하겠다는 서류 몇장에 서명한 뒤에야 풀려날 수 있었다. 그는 “나는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서 살기를 선택했다”면서 “그들은 내가 감히 도망치지 못할 거라 생각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후 러시아에서 미니버스를 타고 벨라루스로 건너가 튀니지를 거쳐 프랑스까지 간 그는 파리 샤를 드골 공항 환승 구역에서 경찰에 도움을 청했다.

이제야 모습을 드러낼 수 있게 된 세이브리예프는 “(러시아 교정 당국은) 일부 책임자들을 해고하거나 다른 감옥으로 보내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지적했다. 그는 “그들은 왜 그런 짓을 했는지 설명하기를 바랐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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