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중앙시평

대장동 특검 수용, 제2의 6·29 선언 될 수 있다

중앙일보

입력 2021.10.21 00:41

업데이트 2021.10.21 16:51

지면보기

종합 31면

이정민 기자 중앙일보 논설실장
이정민 논설실장

이정민 논설실장

민주당 대선 후보가 된 이재명 경기지사는 “위기를 기회로 만드는 게 제 전문”이라고 강조한다. 2016년 정부가 부자 지자체(성남시)에 주는 보조금을 깎는 정책을 내놓자 바로 광화문에 천막을 치고 단식농성을 벌였다. 코로나 확산 초기, 경찰과 소방관을 대동하고 과천 신천지 본부를 급습한 일도 있다. 논란은 있었지만 “군사작전에 준하는 방역을 하지 않으면 골든타임을 놓칠 수 있다”는 이 지사에 동조하는 여론이 꽤 높았다. 민심의 흐름을 좇는 기민함, 정면 돌격의 승부사 기질이 그의 특기다. 위기 때 내 생명과 재산을 지켜줄 수 있는 지도자라는 이미지는 국회의원 한 번 한 적 없는 그를 집권당 대선 후보에 올려놓는 자산이 됐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대선 가도의 최대 스캔들이 된 대장동 특혜 개발 비리 의혹에선 이 ‘특기’가 보이지 않는다. 이재명표 ‘사이다’는 찾아볼 수 없고 가슴 답답한 ‘고구마’ 식체뿐이다.

국민 73%가 대장동 특검 요구
‘국민의힘 게이트’ 몰이론 못 넘어
6·29 선언으로 정권창출 성공했듯
이 지사, 특검 수용해 위기 헤쳐야

복잡해 보이지만 대장동 사건의 핵심은 간단하다. 공공개발을 앞세워 원주민에겐 시가보다 싸게 땅을 강제 수용하고, 실제 사업땐 민관 개발 형태로 바꿔 입주자들에게 인근 지역보다 높은 값을 받았다. 이것 만으로도 민간 개발업자들은 엄청난 개발 이득을 올릴 수 있었는데, 문재인 정부 부동산 정책 실패 덕분에 땅값이 폭등하는 바람에 상상을 넘어선 돈벼락을 맞았다. 그런데 하필 돈벼락 맞은 사람들이 죄다 이 지사의 측근 아니면 주변 인물들이다. 수백만~수천만 원의 종잣돈을 넣고 수백억~1000억여원을 챙기는 잭팟을 터뜨렸다. 이 모든게 ‘토건 부패세력 척결’ ‘청렴 천국 부패 지옥’을 주문처럼 외쳐온 이 지사의 ‘설계’와 지휘·감독 아래 벌어진 일이다.

그간 보여온 ‘승부사 이재명’이라면 진즉에 기자회견을 자청해 관련 문서와 금융 계좌를 몽땅 내놓고 ‘이래도 내가 범인이냐’ ‘털 것 있으면 털어봐라’고 나와야 마땅하다. 특검하라는 국민 원성(73%, 11~12일 케이스탯리서치)이 이렇게 높아지기 전에 먼저 특검 수사받겠다고 선수를 쳤어야 했다. 그게 이재명다움이다.

그런데 이 지사는 “국민의힘이 공공 개발을 막는 바람에 5503억원밖에 환수하지 못한 것” “도둑들 물건을 70% 찾아왔는데 왜 그것밖에 못 갖고 왔냐며 도둑이 몽둥이 든 꼴”이라며 ‘국민의힘 게이트’로 몰아가고 있다. “없는 사실을 지어내 음해하고 허위 주장을 하니 진실이 자꾸 가려진다”며 역공을 퍼부었다. 이재명스럽지 못하다. 설사 그의 말속에 부분의 진실이 있다 해도, 집값 폭등으로 외곽으로 밀려나고 전세에서 월세로 갈아타며 피눈물을 흘리는 서민들의 고통과 응어리가 풀릴 리 없다. 내년 대선을 “부패세력과의 최후 대첩”이라며 목이 터지라 외쳐대도 여론이 싸늘하게 식어가는 이유다. 후보 선출 이후 뚜렷해진 이 지사와 민주당·대통령 지지율의 동반 하락은 뭘 말하는가.

D-140일. 대선판은 막장 드라마로 흘러가고 있다. 교도소·구속·감옥·조폭 같은 섬뜩한 말들이 난무한다. 역대 이런 대선이 있었나, 자괴감과 한숨이 잦아들지 않는다. 국가의 장래와 국민의 안위가 걸린 정책 이슈는 실종된 채 대장동이란 블랙홀에 갇혀 대선이 치러지는 건 국가적 불행이다. 주인의 권한을 위임한 유권자에 대한 모독이다. 대선을 대선답게 치르려면 대장동이란 장막을 거둬내야 한다. 키는 이 지사가 쥐고 있다. 이 지사 스스로 대장동 특검을 카드로 들고나오면 어떤가. 대장동 논란에 따른 정치적 부담을 완화시킬 수 있을 뿐 아니라 실체적 진실을 규명하는 데도 이보다 효과적인 방법은 없다. 촉박한 대선 기간을 감안해 여야가 일정 단축 등을 논의한다면 못할 일도 아니지 않은가. 위기를 기회로 만드는 이재명다움이 발현되면 제2의 6·29 선언에 버금가는 결단이 될 수 있다.

1987년 집권 민정당은 야당과 국민의 직선제 요구가 분출하자 내각제 개헌, 호헌 구상을 접고 직선제를 전격 수용함으로써 자칫 헌정 중단으로 갈 뻔했던 역사의 불행을 막았다. 당시는 노태우 후보의 건의를 전두환 대통령이 수용하는 방식이었다. 의표를 찌른 전격성과 국민의 기대를 뛰어넘는 과감한 정치 제안은 단숨에 정국 판도를 바꿔놨다. “정치적 기적”(김영삼 민주당 총재),“인간에 대한 신뢰감이 떠올랐다”(김대중 민추협 공동의장)는 찬사가 쏟아졌지만, 최고의 수혜를 누린 건 노태우 후보였다. 전 정권 승계에 따른 부담이 정치적 부채에서 자산으로 치환돼 대선 승리를 거머쥘 수 있었다.

노태우 후보도 처음엔 직선제에 대한 두려움이 앞서 결단을 망설였다고 한다. 그러나 “만약 야당이 선거를 보이콧해 단일 후보가 돼 당선된들 불안한 집권이 된다. 현행 헌법으로 선거에 승리한다 해도 다시 개헌 요구가 불거질 것이고, 개헌 정국이 지속되거나 새로운 선거가 치러지게 되면 국가 경제에 결정적 타격을 줄 것”이란 충고에 마음을 돌렸다고 한다(『전두환 회고록』). 지금 상태로 대선이 치러진다면 승패가 판가름난 이후에도 대장동 사건에 대한 진실 규명 요구는 더 거세질 것이다. 대장동 늪에 빠진 이 지사와 집권당이 곱씹어볼 대목이다.

Innovation Lab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