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석 "정권 위한 정치와 국민 위한 정치, 대장동이 시금석" [백성호의 현문우답]

중앙일보

입력 2021.10.21 00:30

업데이트 2021.10.21 1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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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일 인천 을왕리 낙조대에서 김형석(연세대 철학과) 명예교수를 만났다. 올해 101세인 그는 대한민국의 현대사를 몸소 지나왔다. 일제 강점기와 해방, 북한 공산 치하와 한국전쟁을 거쳐 군사정권과 민주화 운동 등 그야말로 ‘산 역사’이다. 그가 보는 대한민국은 지금 어디쯤 와 있을까.

김형석 교수는 "새로 뽑는 대통령에게는 진실과 정직이란 덕목이 있어야 한다. 정권을 위해서 정치를 하게 되면 그걸 잃어버리게 된다"고 지적했다. 김상선 기자

김형석 교수는 "새로 뽑는 대통령에게는 진실과 정직이란 덕목이 있어야 한다. 정권을 위해서 정치를 하게 되면 그걸 잃어버리게 된다"고 지적했다. 김상선 기자

김 교수는 1920년생이다. 3ㆍ1운동 이듬해 태어났다. 어린 시절 내내 3ㆍ1운동이 뿌린 씨앗이 어떻게 자라는지 보면서 컸다. 김 교수는 “우리 민족의 삶은 3ㆍ1운동을 기점으로 전과 후가 크게 달라졌다”고 말했다.

무엇이 달라졌나.  
“한국전쟁을 제외하면 우리 민족이 3ㆍ1운동만큼 큰 역사적 강을 건넌 적이 없다. 당시 사람들의 삶 속에 3ㆍ1운동의 여파는 안 들어간 곳이 없었다.”
예를 들면 어떤 식이었나.
“나는 평안북도 운산에서 태어났다. 어머니가 어린 나를 업고 교회에 갔더니, 3ㆍ1운동 때 남편이 희생당한 아낙네가 넷 있었다고 했다. 구역 예배를 드리는데 젊은 아낙들이 울지도 않았다. 내 남편이 나라 위해 목숨을 바쳤으니, 교육을 못 받은 아낙네지만 오히려 자랑스러워 했다고 했다.”

김 교수는 “3ㆍ1운동 이전에는 사람들이 내 가정, 내 집안만 잘 살면 된다고 생각했다. 3ㆍ1운동 겪고 나니까 ‘가정보다는 국가’ ‘가정보다 민족이 먼저’라는 생각을 가지기 시작했다. 그때 비로소 민족의식이 생겨났다”며 “정신적으로 보면 3ㆍ1운동 때부터 나무가 자라기 시작했다. 그게 해방될 때까지 자라다가 나중에 대한민국이 됐다”고 강조했다. 다만 북한은 여기서 떨어져 나갔다고 했다. 김 교수는 “1945년 김일성을 직접 만난 적이 있다”고 말했다.

김형석 교수는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 말하는 정의는 '어떡하면 더 많은 국민이 자유를 누릴 수 있을까'이다"고 말했다. 김상선 기자

김형석 교수는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 말하는 정의는 '어떡하면 더 많은 국민이 자유를 누릴 수 있을까'이다"고 말했다. 김상선 기자

1945년은 해방되던 해다. 어떻게 만났나.
“김일성의 본명은 김성주다. 나중에 알았지만 내가 다닌 창덕소학교 선배더라. 평양과 만경대의 중간인 칠골 마을이다. 김성주 어머니의 고향이다. 김성주는 해방 직후인 1945년 8월에 중국에서 돌아왔다. 나는 9월 초순에 평양 만경대에서 만났다. 조반을 함께 먹고 이야기도 나누었다. 김일성 할아버지가 주선해 고향 어른들과 마련한 자리였다. 당시 마을에서 대학 다닌 사람은 나뿐이라 초청됐다.”
만나서 무슨 이야기를 했나.
“처음 만났을 때는 약간 서먹했다. 당시 나는 25살, 김성주는 여덟 살 위인 33살이었다. 김성주의 할아버지가 소개하면서 ‘김형석 선생이 너보다 나이는 적지만, 일본 가서 대학도 다니고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이다’고 했다. 김성주는 어릴 때 힘도 세고, 축구도 잘하고, 골목 대장이었다고 들었다. 나는 해방 후에 독립되면 우리나라가 어떤 나라가 되면 좋겠냐고 물었다.”
김일성은 뭐라고 답했나.
“첫째가 친일파 숙청, 둘째가 국토 국유화, 셋째가 지주와 사장들 다 내쫓고 노동자와 농민에게 돌려주는 거라고 했다. 그걸 말하는데 설명은 따로 없고, 초등학생 암기하듯이 ‘첫째!’ ‘둘째!’ 하며 읊었다. 나는 속으로 저 사람이 공부는 제대로 못 했고, 공산주의에서 말하는 걸 외운 대로 하는구나 싶었다.”
인천 을왕리 낙조대의 김형석 교수 집필실 책상에 놓여 있던 원고지와 만년필. 김상선 기자

인천 을왕리 낙조대의 김형석 교수 집필실 책상에 놓여 있던 원고지와 만년필. 김상선 기자

김 교수는 “그해 10월에 평양 공설운동장에서 김일성 장군 환영회가 있었다. 당시 남과 북은 38선으로 막혀 있었다”고 했다. “평양의 길거리에는 벽보가 나붙어 있었다. 해방이 됐으니 누가 우리 민족의 지도자가 될 것인가. 그런 내용이었다. 벽보에는 항상 첫 번째로 나오는 사람이 이승만 박사였다. 두 번째는 서재필 박사, 세 번째 나오는 사람이 김구 선생이었다. 네 번째가 김일성, 다섯 번째가 안재홍(독립운동가)이었다. 북한에서는 그중 김일성에 대한 관심이 높았다.”

왜 김일성에 대한 관심이 높았나.  
“이 다섯 사람이 우리나라를 이끌 거라 봤다. 이들 중 네 사람은 서울로 갈 사람이고, 김일성 장군만 평양으로 올 사람이었다. 당시 북한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했다.”
왜 김일성만 평양으로 올 거라 봤나.
“일제 식민지 시절에 독립운동가 김일성의 이야기는 북한 전역에 다 퍼져 있었다.”
어떤 이야기였나.
“독립운동 했으니까 김일성 이야기는 비밀이었다. 50대 후반이나 60대 초반쯤 되는 평안남도 용강 사람일 거다. 그렇게 소문이 나 있었다. 당시 북한 사람들은 다 존경하는 인물이었다. 그래서 평양 공설운동장에 인파가 엄청나게 모였다. 그때 우리 동네의 어르신들도 거기에 갔었다.”
김형석 교수는 "1945년 평양 공설운동장에서 열린 김일성 장군 환영회에 간 동네 어르신들이 '가서 보니 우리 동네 성주더라'고 했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김상선 기자

김형석 교수는 "1945년 평양 공설운동장에서 열린 김일성 장군 환영회에 간 동네 어르신들이 '가서 보니 우리 동네 성주더라'고 했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김상선 기자

갔다 와서 뭐라고 하던가.
“저녁에 우리 집에 와서 ‘김 선생도 갔으면 좋아했겠다’고 하더라. 왜 그러냐고 물었더니 ‘아, 글쎄 김일성이 우리 동네 성주야!’라고 했다. 김일성 장군 환영회라고 해서 갔는데, 가서 보니 성주였다. 그게 김일성이 한반도에 들어와 가진 첫 대중 집회였다. 그 환영회를 기점으로 북한 정권이 실질적으로 시작했다. 한마디로 북한 정권의 탄생이었다.” 

남쪽으로 내려온 김형석 교수는 1947년 서울 종로구에 있는 중앙고등학교 교사가 됐다. 당시에는 학교마다 남로당 조직원이 있었다. “그때 우리 학교에는 김홍기라는 선생이 남로당원 책임자였다. 나는 북에서 내려왔고, 공산주의에 비판적이었다. 그들은 내게 ‘전쟁이 나면 세상이 바뀌는데, 선생처럼 공산당 비판하면 어떻게 살려고 하느냐’고 말했다. 아침에 학교에 가서 사무실 책상을 열면 ‘공산당 반대하는 놈들 다 없애버린다’는 협박 편지가 들어 있기도 했다. 그때 살아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남한에서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됐다. 김 교수는 “이승만 박사가 정부 수립을 하고, 6ㆍ25전쟁을 거쳐 박정희 정권, 전두환 정권이 들어섰다. 이 기간은 강자가 약자를 지배하는 권력 국가였다. 권력 국가의 특징은 독재 국가와 군사 국가”라며 “북한의 김정일은 대한민국 대표를 만나 ‘나는 당과 군대를 함께 가지고 있기 때문에, 내가 살아있는 동안 북한 정권은 끄떡없다’고 자랑한 적이 있다. 그게 독재 국가이자 군사 국가란 말이다. 권력 국가임을 스스로 시인한 거다”고 지적했다.

김형석 교수는 "청와대가 모든 걸 할 수 있다고 하지 말고, 공직자에게 자율성을 줘야 한다. 경제는 경제전문가에게 맡기고, 청와대는 그걸 도와주면 된다"고 강조했다. 김상선 기자

김형석 교수는 "청와대가 모든 걸 할 수 있다고 하지 말고, 공직자에게 자율성을 줘야 한다. 경제는 경제전문가에게 맡기고, 청와대는 그걸 도와주면 된다"고 강조했다. 김상선 기자

나라가 발전하면 권력 국가 다음은 무엇인가.
“법치 국가다. 권력이 다스리는 나라가 아니라 법이 다스리는 나라다. 권력 국가가 끝나는 고비에 김영삼 정부가 출범했다. 이후 김대중 정부도 법치국가였다. 그때는 국민이 정부를 믿고 상식이 통했다. 그런데 노무현 정부부터 운동권 출신이 대거 약진했다. 이승만 정부부터 내려오던 자유민주주의의 길이 이때부터 갈라지기 시작했다.”
어떻게 갈라졌나.
“좌파를 진보라고 부른다. 나보고 명칭을 붙이라면 ‘평등사회주의’라고 부르고 싶다. 중국이나 북한을 보면 그렇다. 그들은 자유민주주의가 아니고 평등사회주의를 지향한다. 박근혜 대통령 때 정부가 약화되면서 국민은 ‘나라다운 나라를 만들어 달라’고 촛불을 들었다. 문재인 정부는 그걸 ‘촛불 혁명’이라 부른다. 그것은 혁명에 해당하지 않는다.”
혁명이 아니다. 그럼 뭔가.  
“혁명은 권력 구조의 상하가 바뀌는 것이다. 역사의 방향을 바꾸는 걸 혁명이라 부른다. 프랑스 혁명도 그랬다. 그런데 이건 국민이 나라다운 나라를 만들어달라고 촛불을 든 거지, 자유민주주의라는 정치 방향을 바꾸어달라고 촛불을 든 게 아니다.”
김형석 교수는 "우리는 권력 국가와 법치 국가를 지나 선진 국가로 가야 한다. 선진 국가의 국민은 법보다 도덕과 윤리에 기반한 질서로 살아간다"고 말했다. 김상선 기자

김형석 교수는 "우리는 권력 국가와 법치 국가를 지나 선진 국가로 가야 한다. 선진 국가의 국민은 법보다 도덕과 윤리에 기반한 질서로 살아간다"고 말했다. 김상선 기자

정치 방향을 바꾸는 게 뭔가.  
“좌파의 이념 국가를 따라가는 거다. 그게 평등사회주의다. 박정희 대통령이 5ㆍ16 쿠데타를 일으키고, ‘5ㆍ16 군사혁명’이라고 했다. 그래서 여의도 광장도 ‘5ㆍ16 광장’이라고 불렀다. 지금 이걸 인정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촛불 혁명도 마찬가지다. 정치 방향을 바꾸라는 걸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없을 거다.”
평등사회주의가 왜 문제인가.
“거기로 가면 민주주의가 없어진다. 민주주의의 뿌리는 휴머니즘이다. 휴머니즘은 한 마디로 자유와 인간애다. 그런데 북한 사회에는 자유와 인간애가 없지 않나. 인간다운 삶이라는 게 뭔가. 개인에게는 자유이고, 사회에서는 인간애다. 그럼 평등은 자연히 따라온다.”
한국 현대사에서 모든 선거를 지켜보셨다. ‘100년의 안목’으로 내년 대통령 선거를 어떻게 보나.  
“문재인 정부가 이끌어온 방향을 그대로 연장하느냐, 아니면 자유민주주의로 방향을 바꾸느냐. 이게 첫 번째 포인트다. 두 번째 포인트도 있다. 정권을 위한 정치를 하느냐, 국민을 위한 정치를 하느냐. 이걸 기준으로 판단하면 되지 않겠나.”
김형석 교수는 "세상의 모든 문제는 대화를 통해서 해결해야 한다. 적폐 청산은 대화가 아니라 힘과 투쟁으로 해결하는 거다. 그건 자유민주주의의 해법이 아니다"고 강조했다. 김상선 기자

김형석 교수는 "세상의 모든 문제는 대화를 통해서 해결해야 한다. 적폐 청산은 대화가 아니라 힘과 투쟁으로 해결하는 거다. 그건 자유민주주의의 해법이 아니다"고 강조했다. 김상선 기자

정권을 위한 정치와 국민을 위한 정치는 뭔가.
“박정희 대통령이 초창기에 국민을 위해서 한 일은 다 남아 있다. 공화당 정권을 만든 다음에 정권을 위해서 일할 때는 남는 것보다 버려야 할 게 더 많았다. 유신헌법을 만든 다음에는 버릴 것만 했다. 그럼 문재인 대통령은 어떤가. 국민을 위해 남겨준 게 보이지 않는다. 문재인 정부는 정권을 위해서 시작하고, 정권을 위해서 끝나고 있다. 정권을 위한 정치의 길을 택했다.”
‘대장동 의혹’으로 정국이 시끄럽다.
“대장동 수사는 누구를 위해서 하는 건가. 정권을 위해서 하는 게 아니다. 국민을 위해서 하는 거다.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국민 다수가 특검을 원한다. 왜 그렇겠나. 검찰 수사에 신뢰가 안 가기 때문이다. 국민이 원하는 건 보수나 진보가 아니라 진실이다. 그러니 대장동 수사를 보면 한눈에 알 수 있지 않나. 지금 정권을 위한 정치를 하고 있는지, 아니면 국민을 위한 정치를 하고 있는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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