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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의사소통 못하는 장애인이 퇴소 원했다? 수상한 동의서

중앙일보

입력

중증장애인 거주시설에서 생활했던 C씨의 퇴소 동의서. 그는 의사소통이 불가능한 중증이나 동의서상엔 퇴소를 본인이 신청한 것으로 돼 있다. 중앙포토

중증장애인 거주시설에서 생활했던 C씨의 퇴소 동의서. 그는 의사소통이 불가능한 중증이나 동의서상엔 퇴소를 본인이 신청한 것으로 돼 있다. 중앙포토

지난 4월 30일 중증장애인 거주시설인 경기도 김포의 A 시설이 폐쇄됐다. 3년 전 시작된 입소 장애인 76명에 대한 시설 밖 이주가 마무리되면서다. 정부가 추진하는 장애인 탈시설 정책에 따른 국내 첫 시설 폐쇄 사례다. 이곳에 지내던 이들은 서울시가 제공하는 ‘장애인 지원주택’으로 옮겨갔다. 지원주택 운영은 A 시설을 운영하던 B 사회복지법인이 맡고 있다. B 법인은 정부의 ‘탈시설 로드맵’ 시범사업 기관으로 선정될 가능성이 크다. 이미 서울시 사업을 따냈다. 순조로워 보이는 A 시설에 대한 탈시설을 둘러싸고 잡음이 나오고 있다. 장애인 퇴소 동의서 대리 작성, 퇴소판정위원회 참석자 대리 사인 의혹 등이 제기됐다.

시설 퇴소 동의서 입수 

19일 중앙일보가 입수한 중증 발달장애인 C씨(30대)의 ‘A 시설 퇴소 동의서’(지난해 9월 1일 작성)를 보면, 퇴소 신청자가 C씨 본인으로 표시돼 있다. 하지만 그는 의사소통이 불가한 상태다. 한국형 간이정신상태검사(K-MMSE) 결과 0점(30점 만점)으로 나타났다. 시계·볼펜과 같은 사물의 이름을 댈 수 있는지, ‘100-7=?’ 수준의 계산 등이 가능한지 알아보는 검사다. C씨를 진단한 의사의 소견서엔 “인지기능이 아예 체크가 안된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그런데도 퇴소 신청서엔 ‘상기인은 위의 시설 퇴소에 동의한다’는 문구 아래 C씨 명의의 도장이 찍혔다.

원장이 법적대리인? 

중증 발달장애인 D씨(40대)도 비슷하다. C씨처럼 K-MMSE 검사결과 0점이나 본인 신청에 따른 것으로 퇴소절차가 이뤄졌다. 둘의 퇴소 신청서엔 법적대리인으로 A 시설 원장이 등장한다. 직인도 찍혔다. 장애인복지법상 장애인의 주소지를 관할하는 지자체장이 법적대리인을 지명할 수 있다. C·D씨 모두 주소지가 김포다. 하지만 김포시는 법적대리인으로 A 시설의 원장을 지명했는지 현재 확실치 않다고 한다. 김포시 관계자는 “최근 2년 내 법적 대리인 지명 관련한 민원서류가 접수된 게 없는 거로 안다”고 말했다.

A 시설의 전 직원은 “보호자 없는 무연고 발달장애인의 경우 마치 본인 동의가 이뤄진 것처럼 서류가 작성돼 퇴소가 이뤄졌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B 법인 관계자는 “퇴소위원회를 열어 결정했고 (법인 주소지인) 서울 양천구가 A 시설을 관할하는 데 문제 없었다”며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이 제기됐으나 인권침해 소지가 없는 것으로 결론 났다”고 반박했다. 인권위 결정에 대해선 현재 행정소송이 진행 중이다. 원고는 A 시설의 전 직원이다.

 전국 장애인거주시설 이용자 부모회 회원들이 지난 8월 10일 정부세종청사 보건복지부 앞에서 발달장애인 탈시설 정책 철회를 촉구하는 집회를 갖고 있다. 뉴스1

전국 장애인거주시설 이용자 부모회 회원들이 지난 8월 10일 정부세종청사 보건복지부 앞에서 발달장애인 탈시설 정책 철회를 촉구하는 집회를 갖고 있다. 뉴스1

절차적 정당성 우려하는 이유 

정부의 장애인 탈시설 정책에 반대하는 전국장애인거주시설 이용자부모회 측은 이런 ‘절차적 정당성’을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보건복지부는 지난 8월 장애인 탈시설 로드맵을 발표했다. 장애인의 주거결정권과 지역사회에서 생활할 권리를 보장한다는 취지다. 이 계획에 따르면 2025년부터 본격적인 탈시설 지원 사업이 시작되고 2041년이면 장애인 거주시설은 사라진다. 시설에서 나온 장애인에 공공임대주택 등 정부가 제공한 집에 살며 자립을 준비한다. 다만 24시간 돌봄 지원이 필요한 중증 장애인의 경우 기존 거주시설에서 살 수 있도록 했다. 퇴소 결정 권한은 본인에 있다. 하지만 의사 표현이 어려울 만큼 중증인 경우 지역사회 여건 등을 종합해 전문위원회가 결정하도록 했다.

거주시설 부모회 관계자는 “부모가 모두 사망한 뒤 시설에 남겨진 중증 장애 자녀가 이런 방법으로 시설 밖으로 내몰릴 수 있는 게 아닌지 우려된다”고 말했다.

대리 사인 의혹도 터져 

A 시설은 과거 퇴소 과정에서 대리 사인 의혹이 터지기도 했다. A 시설은 장애인의 퇴소를 결정하기 전 입퇴소판정위원회를 통해 최종 결정했다. 탈시설이 본격화되기 전인 2015년 8월 20일 중증 발달장애인 E씨(당시 30대) 등에 대한 퇴소위가 열렸는데, 당시 회의록에 회의 때 참석하지 않았던 한 생활재활교사의 사인이 담겼다. E씨를 아껴왔던 생활재활교사가 퇴소에 반대할 것을 우려, 일부러 위원회 회의에서 제외한 것이라는 의혹이 나온다. 나중에 이를 알게 된 해당 교사는 문서를 통해 “(회의 당시) 여자 숙소인 2동에서 근무하고 있었다”며 “누군가 대신 사인했다”고 주장했다. 문서 속 이 교사의 사인은 회의록 때 사인과 전혀 달랐다. E씨는 시설에서 나간 뒤 요양병원 몇 곳을 전전했다.

B 법인 관계자는 “과거 근무 직원을 통해 대리 사인이 실제 일어났는지 확인해보겠다”고 말했다.

A 시설을 나온 다른 중증 발달장애인은 지원주택에 거주 중이다. 지원주택 소속 주거코치와 활동지원사 파견으로 1대1 돌봄이 이뤄지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기존 거주시설에 비해 간호, 물리치료 같은 의료서비스는 부족한 편이다. 방문간호서비스는 한 달에 2회 정도 이뤄진다. 물리치료는 외부 기관을 이용해야 하는데 코로나19 감염 우려로 제한적이다.

법인, “삶의 질 훨씬 나아져” 

하지만 B 법인 측은 절차적 문제가 없을 뿐 아니라 탈시설 이후 장애인들의 삶의 질과 인권상황이 훨씬 나아졌다고 강조했다. B 법인 관계자는 “(거주시설에선) 1대1 서비스를 못 하다 보니 (중증 발달장애인이 본인 손으로) 콧줄을 제거하는 것을 막으려 손을 침대에 묶어놓거나 보조기구를 채운다. 장시간 그렇게 돼 있는 경우가 있다”고 말했다. 그는 “지원주택은 다르다. 퇴소 장애인들이 얼굴이 정말 좋아졌다”고 말했다. 또 다른 법인 관계자는 “(장애인들이) 최근 제주도로 2박 3일 여행을 다녀왔다”며 “(집단 생활하는) 거주시설에선 잠깐의 외출도 어려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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