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서소문 포럼

콜로세움 속 대선 후보들

중앙일보

입력 2021.10.20 0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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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서승욱 기자 중앙일보 팀장
서승욱 정치팀장

서승욱 정치팀장

‘나쁜 놈, 이상한 놈, 추한 놈.’ 지난주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가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한 독설이 화제다. “여러 군데 다니면서 만나본 국민들께서 한마디로 ‘실망스럽다’ 말씀하신다. 그래서 요즘 세간에서 유행하고 있는 말이 ‘놈놈놈’이다. 영화 제목과 비슷하지만 조금은 다른 것이 놈놈놈이 ‘나쁜 놈, 이상한 놈, 추한 놈’이다. 그래서 ‘대선 후보들이 이런 사람들밖에 안 보인다. 찍을 사람이 없다’고 한다.” 영화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에 유력 대선 주자들을 빗대며 제3지대의 자신을 부각하려는 의도다. 그는 후보들의 비호감도가 이례적으로 높은 ‘비호감 대선’을 직격했다.

‘나쁜 놈, 이상한 놈, 추한 놈’ 까진 아니겠지만, 적어도 ‘센 놈 vs 센 놈 vs 센 놈’의 구도는 맞는 것 같다. 아수라, 감옥, 조폭, 정신머리, 버르장머리, 왕(王), 도둑, 충견, 사이다, 앵그리 버드, 코카콜라…. 이런 표현들이 대선판을 지배하는 건 ‘마초적’ 주자들의 강력한 캐릭터, 모질고 강한 언어, 남성미 풀풀 나는 삶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비호감도 높은 여야의 센 후보들
진영 대결에 검투사 역할만 수행
중도층 움직일 블루오션 찾아야

18일 경기도 국감에 참전한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통령 후보 진영은 “완승” 평가에 잔뜩 고무됐다고 한다. 대장동 때문에 코너로 몰리면서도 “돈을 받은 자=범인, 장물 나누는 자=도둑”이라고 외치는 그의 모습은 강력한 승부사 면모 그대로다. “아수라의 가면을 찢어버리겠다”고 벼르는 야당의 엄포도 어쩌면 ‘강한 이재명’에 대한 반작용에 가깝다.

서소문포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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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의힘 유력 주자인 윤석열 전 검찰총장의 이미지도 ‘강한 남자’다. 입당한 지 3개월이 채 안 된 병아리 정치인이 토론회에선 백전노장 선배들을 잡아먹을 듯 호령한다. 또 “이런 정신머리부터 바꾸지 않으면 우리 당은 없어지는 것이 맞다”고 호통을 치며 당내 평지풍파의 중심에 섰다. 그의 주변에선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이라면 열 번은 사퇴했을 정도의 아슬아슬한 고비가 많았다”고 말한다. 그럼에도 높은 지지율을 유지하는 건 그의 남다른 승부욕과 권력 본능 때문일 것이다. ‘손바닥 속 왕(王)’ 논란이 커지는 것도 이를 검찰총장 출신 윤석열의 권력지향적 본능과 연결지으려는 견제심리의 발동이다.

1996년 정계 입문 때부터 공격수 이미지가 강했던 ‘홍그리버드’ 홍준표 의원은 더는 설명할 필요가 없다. 부드러운 이미지로의 변신을 꾀했던 그였지만, 한계가 찾아왔다. ‘정신머리’ 발언에 발끈해 윤 전 총장을 ‘저것’이라고 칭하며 “보수 궤멸에 선봉장이 된 공로로 벼락출세를 두 번이나 했다. 아직도 저게 공중에 떠 있어서 정치를 모른다. 철딱서니 없다”고 쏘아붙였다.

마초들의 득세는 사생결단식 대선 풍토와 관련이 있다. 정권교체론자들은 문재인 정부와 여권을 때려 부술 강력한 지도자를 원한다. 정권 재창출론자들도 이런 야당에 맞설 카리스마를 선호한다. 이런 구조에선 합리적이고 온건한 후보들이 버티기 어렵다. 그리고 지금까지 여야 경선의 성적도 같은 흐름이다.

두 편으로 확 갈린 관중들이 “구속하라” “찢어라”고 외치는 살벌하고 피 튀기는 콜로세움, 그 안에서 뒹구는 근육질 글래디에이터들의 모습이랄까. 이들이 초창기에 입에 자주 올렸던 ‘국민통합’ 메시지가 점점 잦아드는 건 이런 목소리가 설 땅이 좁아 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서로를 찢어버리겠다는 강경파들이 국민의 전부는 아니다. 끝도 없는 진영 대결에 지친 중도층, 코로나19로 피폐해진 자영업자와 서민, 처참한 양극화와 무너진 계층 이동 사다리 앞에서 좌절하는 청년층을 보듬는 위로 역시 차기 리더십이 피할 수 없는 역할이다.

그리고 이런 역할 공간이야말로 ‘놈놈놈’들에겐 최고의 블루오션이다. 승부의 키를 쥐고 있는 2030과 50대, ‘대깨(대가리가 깨져도)족’을 제외한 중도층의 표심은 아직 미궁 속이다. 필자 주변의 중도층 스윙보터 중엔 “여야 유력후보들 모두가 너무 별로라 제3지대 후보를 찍어야 할지 고민하고 있다”는 이들이 꽤 있다.

역대 대선 승리자들은 대부분 국민에게 어떤 식으로든 감동을 안겨준 이들이 많았다.

국민을 위에서 내려다보는 듯한 태도, 당장의 위기만 벗어나면 된다는 위선, 나라가 어떻게 쪼개지든 권력만 잡으면 그만이란 출세만능의 기회주의적 근성, 비전은 없이 권력만 좇는 한탕주의, 이를 먼저 벗어 던지는 자에게 찬스가 올 수 있다. 내년 3월 9일까지는 참 긴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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