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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기시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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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박진석 기자 중앙일보 기획취재담당
박진석 사회에디터

박진석 사회에디터

“시급히 처리해야 할 사건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다른 이유는 없습니다.”

살아있는 권력을 겨냥한 초대형 사건 수사 와중에 수사팀의 핵심 검사가 다른 업무를 부여받았다. 한 손이 아쉬운 판에 사건의 흐름을 상세히 꿰면서 중추적 역할을 맡고 있던 검사를 내친다는 건 예삿일이 아니다. 마침 검찰 수뇌부는 정권의 심복이라는 의심을 받던 이들이고, 수사는 ‘고의적 지지부진’ 의혹을 받기에 이르렀다. 젊은 검사들이 분노하고 있다는 내부 전언도 들려왔다. 이런 상황에서 전격적으로 이뤄진 업무 재조정의 배경에 의구심을 갖지 않기란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수뇌부는 아무 의도가 없는 정상적 조처일 뿐이라고 해명했다.

대장동 개발 특혜 및 로비 의혹 사건을 수사 중인 검찰 수사팀 얘기다. 가만, 그게 아닌가. 분명 어디선가 봤던 장면인 듯한 기시감이 든다. 맞다. 9년 전의 민간인 불법 사찰, 보다 정확히는 불법사찰 증거인멸 의혹 수사 때도 이런 일이 있었다.

당시 검찰 수뇌부는 곤혹스러운 상황이었다. 권력 실세 집단이었던 ‘영포라인’ 인사들이 줄줄이 불려온 것도 진땀 나는 일이었지만 가장 민감했던 건 청와대 민정수석 재직 시절 불법사찰 증거인멸 지휘자로 의심받던 이가 법무부 장관으로 내리 꽂혀있었다는 사실이었다. 검찰 선배이자 권력 실세일 뿐 아니라 자칫 VIP(대통령)로 이어지는 계단이 될 수도 있었던 그는 건드릴 수 없는 존재였다.

수사팀이 물갈이된 건 수사의 마지노선을 명확하게 그은 수뇌부에 대해 내부의 불만 목소리가 들려올 무렵이었다. 3명이 나가고 5명이 들어온 그 인사에 대한 공식 설명은 “다른 사건의 공소 유지 등 업무상 필요성이 생겼다”는 것이었다. 거짓말이었다. 퇴출당한 3명 중에는 수뇌부의 ‘장관 봐주기’ 시도에 ‘사표 배수진’을 치고 저항한 검사들도 있었다. 그들은 “장관도 수사해야 한다”며 결기를 보였지만 공고한 정치 검사들의 벽을 넘을 수 없었다.

현 상황이 그때와 본질적으로 동일한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분명한 건 현재의 권력은 물론이고 미래 권력에까지 자발적으로 몸을 굽히는 정치 검사들이 존재하는 한 이런 일이 수시로 재연될 거라는 사실이다. 그때마다 지금처럼 불쾌한 기시감에 시달릴 걸 생각하니 벌써 짜증이 치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