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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공 100년을 다시 나눈다, 시진핑 내달 毛·鄧 반열 선언

중앙일보

입력

베이징 중국공산당 역사 전람관 5층에 전시 중인 ‘경축 중국공산당 성립 100주년 미술 작품 전람’에 전시 중인 중국공산당 최고지도자 초상화. 왼쪽 위로부터 시계방향으로 마오쩌둥, 시진핑, 덩샤오핑, 후진타오, 장쩌민. 신경진 기자

베이징 중국공산당 역사 전람관 5층에 전시 중인 ‘경축 중국공산당 성립 100주년 미술 작품 전람’에 전시 중인 중국공산당 최고지도자 초상화. 왼쪽 위로부터 시계방향으로 마오쩌둥, 시진핑, 덩샤오핑, 후진타오, 장쩌민. 신경진 기자

중국공산당(중공)은 오는 11월 중요회의를 열고 창당 이후 100년의 역사를 마오쩌둥(毛澤東)·덩샤오핑(鄧小平)·시진핑(習近平) 시대로 나누는 ‘역사 문건’을 결의할 전망이다. 2012년 당 총서기 취임부터 ‘새로운 시대(新時代)’를 강조해 온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시대 구분론을 바탕으로 내년 가을 20차 당 대회에서 세 번째 연임을 노린 포석으로 풀이된다.

1945·81년 마오·덩의 ‘역사 결의’ 본따 #11월11일 ‘100년 경험결의’ 채택 전망 #내년 당대회 시 주석 3연임 노린 포석 #“과거 부정 아닌 자화자찬에 그칠 듯” #장쩌민·후진타오는 ‘주요대표’로 불러

11월 8일부터 11일까지 열릴 제19기 중앙위원회 제6차 전체회의(6중전회)에서 ‘당의 100년 분투의 중대 성취와 역사 경험에 관한 결의(이하 경험결의)’ 초안을 심의하고, 폐막하는 11일 가결할 전망이라고 중공 기관지 인민일보가 19일 보도했다. 인민일보는 전날 열린 정치국회의를 보도하면서 시진핑 주석과 전임 최고 지도자를 다른 호칭으로 부르며 100년 역사를 시 주석 집권 전후로 양분했다. “마오쩌둥·덩샤오핑·장쩌민(江澤民)·후진타오(胡錦濤) 동지를 ‘주요대표’로 하는 중국 공산당원이 혁명·건설·개혁의 중대 성취를 거뒀다”고 한 뒤 “18대(2012년) 이후 시진핑 동지를 ‘핵심’으로 하는 당 중앙이 새로운 중대 성취를 거뒀다”고 전하면서다.

시 주석의 이번 ‘경험결의’는 과거 마오쩌둥과 덩샤오핑이 통과시켰던 1945년의 ‘약간의 역사 문제에 관한 결의’, 1981년 ‘건국이래 당의 약간의 역사 문제에 관한 결의’와 맥락이 같다.

1981년 6월 27일 중국공산당 11기 6중 전회에서 ‘건국이래 당의 약간의 역사 문제에 관한 결의’를 거수로 통과시키고 있다. [아주주간]

1981년 6월 27일 중국공산당 11기 6중 전회에서 ‘건국이래 당의 약간의 역사 문제에 관한 결의’를 거수로 통과시키고 있다. [아주주간]

1945년 옌안(延安)에서 열린 6기 7중전회에서 마오쩌둥은 ‘약간의 역사 문제에 관한 결의’를 통해 소련의 지령만 받들던 앞선 당 지도부의 노선을 철저히 부정하고 자신의 주의·주장을 당의 지도 사상으로 확립했다. 1981년 11기 6중전회를 소집한 덩샤오핑 역시 경쟁자 화궈펑(華國鋒)을 물리친 뒤 문화대혁명과 마오쩌둥을 평가한 ‘건국이래 당의 약간의 역사 문제에 관한 결의’를 통과시켰다. 마오 사후 5년이 지난 뒤에서 역사 결의를 바탕으로 덩샤오핑 시대가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시 주석이 20차 당 대회 1년을 앞두고 ‘경험결의’를 추진하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앞선 두 차례 ‘역사결의’가 전임 지도자의 잘못을 부정했던 것과 달리 이번 ‘경험결의’는 공산당 100년 역사의 성과와 장점만 나열하는 자화자찬에 그칠 전망이다. 시 주석이 과거와 차별되는 지도자로 평가받을 수 있을지 회의론이 제기되는 이유다.

회의론은 홍콩 언론이 제기했다. 홍콩 명보는 19일 “중공이 마오와 덩 시기에 두 번의 ‘역사결의’를 통과시켰다고 이번에도 ‘제3의 역사결의’라고 부를 수 있나”라고 지적했다. 명보는 이어 “올해 결의는 ‘첫 번째 역사 경험 결의’로 불러야 한다”며 “중공이 처음으로 창당 이래 성취와 경험을 전면적으로 총결하는 문건이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베이징에서 활동하는 가오위(高瑜) 독립기자도 18일 트위터를 통해 “역사 결의가 중공 100년 역사를 마오·덩·시 세 시대로 나눌 것”이라고 했다. 그는 “건국 전 28년, 마오쩌둥에 앞선 중공 지도자는 모두 사라졌고,  마오 사후의 화궈펑·후야오방(胡耀邦)·자오쯔양(趙紫陽) 3명 역시 (공식 역사에서) 지워졌다”며 중공이 기록하는 역사의 한계를 지적했다.

이번 ‘경험결의’의 채택 절차도 주목된다. 지난 1981년 결의가 4000여명 이상의 고위급 간부가 참여한 치열하고 거침없는 끝장 토론을 거친 뒤 채택된 선례 때문이다. 81년 결의의 초안은 그 전해 10월 당내 이론가들이 먼저 완성했다. 이후 중앙과 지방 간부 및 군 고위 장교, 중앙 당교 교육생 등이 참여하는 ‘4000인 대토론’이 열렸다. 문혁 피해자가 대부분이던 회의 참가자들은 공산당의 폐부를 찌르는 비판을 쏟아냈다. 덩샤오핑은 1950년대 소련의 스탈린 부정이 불러온 혼란을 떠올리고 결론을 뒤집었다. 그 결과 81년 6월 27일 11기 6중전회에서 통과된 결의문이 “마오쩌둥은 공적이 제일이고, 잘못은 두 번째”라는 회의와 정반대의 결론을 내렸다.

‘경험결의’는 이미 토론과 여론 청취를 마친 것으로 알려진다. 인민일보는 19일 “정치국은 ‘경험결의’ 원고에 대해 당 안팎에서 수집한 의견을 청취했다”면서 “각 지역·각 부문·각 방면과 19대 대표가 원고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였고, 구조와 내용에 대해 하나같이 찬성을 결의했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언제 어떤 방식으로 의견을 청취했는지는 밝히지 않았다. 그러면서 “실사구시, 선명한 주제, 전체적인 결론 등 좋은 의견과 건의를 제출했다”고 강조한 건 81년 결의의 민주적 채택과정을 의식한 것으로 풀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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