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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학회’ 다녀와 600만원 청구, 그래도 견책…요지경 출연연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18일 오전 대전 유성구 KAIST 대강당에서 열린 국회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의 정부출연연구기관(출연연)에 대한 국정감사에서 관계자들이 증인선서를 하고 있다. [뉴스1]

18일 오전 대전 유성구 KAIST 대강당에서 열린 국회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의 정부출연연구기관(출연연)에 대한 국정감사에서 관계자들이 증인선서를 하고 있다. [뉴스1]

세금으로 운영되는 과학기술분야 국책연구기관의 도덕적 해이가 도마 위에 올랐다. 성매수·횡령 등 범죄 행위부터 ‘부실 학회’ 참석, 낮술 파티 등 부조리한 행위가 드러났다.

국회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는 18일 대전 한국과학기술원(KAIST)에서 국책연구기관 국정감사(국감)를 진행했다. 25개 정부 출연연구소(출연연)를 비롯해 53개 과학기술분야 국책연구기관이 이번 국감 대상이다.

이날 국감에서는 국책연구기관의 도덕적 해이 문제는 집중적으로 다뤄졌다.

먼저 연구비 잔액을 교수 개인의 회의비·출장비 등으로 지출한 경우다. 조승래 더불어민주당 의원에 따르면, 광주과학기술원(GIST)·울산과학기술원(UNIST)·대구경북과학기술원(DGIST) 등 3개 기관은 잔고 계정 규모가 40억5000만원이었다. 잔고 계정은 민간 위탁 과제 종료 후 남은 연구비를 교수 개인별 통장에 적립했다가 기간 제한 없이 사용하는 제도다.

조 의원은 국감에서 “잔고 계정은 사용 기한이나 용처 제한이 거의 없어, 연구책임자가 마음만 먹으면 자유롭게 쓸 수 있는 ‘비상금 통장’”이라며 “연구비가 연구 활동에 활용될 수 있도록 제도 정비가 절실하다”고 지적했다.

연구비를 부정 사용하더라도 이를 돌려 받는 경우는 절반 수준에 그쳤다. 김상희 더불어민주당 의원에 따르면, 2016~2021년 6월 환수 처분된 국가연구개발사업비(1855억3000만원) 중 환수 완료액은 961억9000만원으로 51.8%에 그쳤다.

국회 과방위, 국책연구기관 국정감사

18일 오전 대전 유성구 KAIST 대강당에서 국회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의 정부출연 연구기관(출연연) 국정감사가 진행되고 있다. [사진 국회공동취재단]

18일 오전 대전 유성구 KAIST 대강당에서 국회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의 정부출연 연구기관(출연연) 국정감사가 진행되고 있다. [사진 국회공동취재단]

각종 비위 행위도 드러났다. 남모 기초과학연구원(IBS) 수석은 허위견적서를 징구하고, 지인의 연구에 필요한 재료비를 대신 결제했다가 해임됐다. 한국원자력연구원에서는 물품을 공급받지도 않고 구매요구서를 기안해 구매대금을 편취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김모 한국인터넷진흥원 직원은 점심을 먹다가 술을 산 뒤 이를 원내에 반입해 낮술을 즐겼다가 감봉 조치를 받았다. 한국에너지기술연구원의 한 책임연구원은 6차례에 걸쳐 770만원어치의 골프 향응을 받아 정직 처분됐다.

한국과학기술기획평가원(KISTEP)은 반복적으로 무단결근한 배모 전문관리원을 해임했고, DGIST는 출근 시간을 준수하지 않은 이모 전임연구원에게 경고 조처를 내렸다.

학교 허가를 받지 않고 영리 기업을 운영하거나, 학교 측이 학생에게 지급한 인건비를 회수했다가 발각된 KAIST 교수도 있었다.

출연연이 설립한 창업 기업에서도 문제가 불거졌다. 양정숙 무소속 의원에 따르면, 출연연 창업 기업의 대표이사가 회사 운영자금을 채무변제 등 개인적 용도로 사용하다 적발됐다. 한국표준연구원에서 책임연구원으로 근무하던 이 회사 대표는 2015년 출연연 창업공작소 설립자본금(7000만원)을 기반으로 창업했지만, 2018년 30여 차례에 걸쳐 3억9800여 만원을 인출했다가 2020년 업무상 횡령죄로 처벌받았다.

골프 향응 접대받고 사문서위조도

김복철 국가과학기술연구회 이사장을 비롯한 참석자들이 18일 오전 대전 유성구 KAIST 대강당에서 열린 국회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의 정부출연 연구기관 국정감사에서 선서하고 있다. [사진 국회공동취재단]

김복철 국가과학기술연구회 이사장을 비롯한 참석자들이 18일 오전 대전 유성구 KAIST 대강당에서 열린 국회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의 정부출연 연구기관 국정감사에서 선서하고 있다. [사진 국회공동취재단]

한편 이번 국감에선 부실 학회 출장 문제도 재차 제기됐다. 김영식 국민의힘 의원실에 따르면, KAIST 교수·연구원 77명은 부실 학회 참가를 위해 2억436만원의 출장비를 수령했다. 한국천문연구원·한국생명공학연구원·한국생산기술연구원·한국원자력연구원에서도 부실학회나 외유성 출장 문제가 불거졌다.

KAIST 화학과의 한 교수는 2019년 5월 정부가 가짜 학술단체 실태조사를 진행한 지 한 달 만에 이 단체(오믹스·OMICS)가 주최한 학회(유럽화학회의)에 참석했다. 이 과정에서 항공료(340만원) 등 643만원의 출장 관련 경비를 KAIST에 청구했다. KAIST 건설·환경공학과 교수는 미국·스위스·호주·영국 등에서 가짜 학술단체가 주최한 해외학회에 본인이나 지도 학생이 6차례 참석했다.

김영식 의원은 “KAIST가 이들에게 내린 징계는 주의·경고·견책 수준”이라며 “대학 차원에서 사전에 자체적으로 검증하는 절차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다만 해당 학회에 참석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 문제 삼는 것은 과도하다는 반발도 있다. 익명을 요청한 KAIST 관계자는 “시간이 지나면서 학회의 수준이 달라질 수 있는 상황에서 특정 시점에 특정 학회를 ‘부실하다’고 표현하는 것은 적절한 근거가 필요한 데다, 연구자 입장에선 부실학회에 대한 기준이 별도로 존재하지 않아 이를 가려내기 어렵다”며 “수준 높은 연구 결과를 학회에 제출했더라도, 단지 특정 학회 참가 자체를 문제 삼는 것은 또 다른 폐단을 낳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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