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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 노숙자서 바리스타로 변신...치료사는 꿀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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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6일 오전 11시 경기도 수원의 마음샘정신재활센터에 있는 바리스타 실습실에서 A씨(31)가 커피머신 앞에 섰다. 평소 일터에서 하는 대로 아메리카노를 만들어 달라는 요청에 능숙한 솜씨로 원두를 다루며 커피를 뽑아냈다. 여러 명이 구경하는 탓인지 커피가 약간 옆으로 흐르자 “실수를 했다”며 멋쩍게 웃는다.

조현병 때문에 극한 생활을 해왔던 A씨가 양봉 훈련을 거쳐 바리스타로 변신했다. A씨가 커피 만드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강주안 기자

조현병 때문에 극한 생활을 해왔던 A씨가 양봉 훈련을 거쳐 바리스타로 변신했다. A씨가 커피 만드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강주안 기자

A씨가 건네준 커피를 마셔보니 스타벅스나 커피빈에서 먹는 아메리카노에 비해 맛이 떨어지지 않는다. 요즘 한 집 걸러 카페가 있고 바리스타도 그만큼 늘어 A씨의 실력이 대수롭지 않아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장명찬 마음샘정신재활센터장과 이호길ㆍ임수정 사회복지사 등 A씨를 돕고 응원해온 사람들에겐 무척 자랑스러운 모습이다.

A씨는 불과 몇 년 전까지 20대 청년이 겪을 수 있는 가장 극한 상황에서 고통받아 왔다. 재활센터 관계자와 A씨의 말을 종합하면, A씨는 중학 시절 어머니와 아버지를 차례로 잃었다. 이후 시련이 계속됐다. 학교에서 왕따를 당했고 고시원 등을 전전했다고 한다. 이런 와중에 조현병이 찾아왔다. 망상의 공격이 시작됐다.

 중학 때 부모 잃고 고통의 나날 

흔히 조현병을 얘기하면 끔찍한 우범자를 떠올리지만, 대다수 조현병 환자들은 다른 사람이 알아차리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는 게 정신과 의사들의 얘기다. 그렇기 때문에 일상에서 장애인으로 배려받지 못하고 이상한 사람 취급받는 경우가 흔하다.

A씨도 생업을 위해 공사장 인부를 비롯해 험한 일자리를 두루 거쳤다. 택배 승하차 작업장에서도 일했다. 그러나 몇달 못하고 해고되니 일쑤였다. 그의 남모를 고통을 이해 못 한 상사와 동료들은 그를 품지 않았다.

재활센터 관계자는 "정신병원에서도 지내고 노숙자 생활도 한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그런 그에게 지난해 변화의 계기가 찾아왔다.

정신장애를 가진 양봉 훈련생들이 경기도 화성에 있는 자연과함께하는농장에서 임준하 상임이사(가운데)와 호흡을 맞추면서 꿀벌의 겨울나기를 준비하고 있다. 강주안 기자

정신장애를 가진 양봉 훈련생들이 경기도 화성에 있는 자연과함께하는농장에서 임준하 상임이사(가운데)와 호흡을 맞추면서 꿀벌의 겨울나기를 준비하고 있다. 강주안 기자

양봉장에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벌을 키우고 꿀을 따면서 새로운 세상을 만났다. 마음샘정신재활센터는 한국장애인고용공단(이사장 조향현)과 협력해 정신장애인들이 양봉장에서 협업하는 프로그램을 2019년 시작했다. 김현종 공단 홍보협력실장은 "사람에게 받은 상처를 벌을 통해 치유해보려 했다”며 “다른 사람과 소통에 어려움을 겪는 정신장애인들의 자존감을 높이는 효과도 기대했다”고 설명했다.

장애인양봉

장애인양봉

한 해 5명 참여하는 이 프로그램에 지난해 A씨가 참여했다. 수없이 날아드는 벌에 공포감을 느끼고 실제로 쏘여 고통을 경험하지만, 규칙만 잘 지키면 벌과 평화롭게 지낼 수 있다는 진리를 깨닫게 된다는 것이 양봉 훈련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조현병 환자들의 공통된 증언이다.
2019년 이 프로그램에 참여했던 B씨는 “예전에 농사일을 많이 해 소도 키워봤는데 벌이 훨씬 쉽다”며 “소는 계속 꼴을 베어 먹여야 하고 똥도 치워야 하지만 벌은 자기들이 알아서 먹이를 찾고 벌집 청소를 한다”고 말했다. 또 다른 참가자 C씨는 “다른 분들과 함께 일하는 경험이 즐겁고 아빠와도 사이가 좋아졌다”며 “용돈이 늘어난 것도 뿌듯하다”는 소감을 밝혔다. 양봉 훈련생들에겐 월 50만원 안팎의 활동비가 지급된다.

정신장애인 양봉 훈련이 진행되는 경기도 화성 자연과함께하는농장에는 강아지와 함께 미니돼지를 키우는 등 친환경적인 요소가 많다. 화성=강주안 기자

정신장애인 양봉 훈련이 진행되는 경기도 화성 자연과함께하는농장에는 강아지와 함께 미니돼지를 키우는 등 친환경적인 요소가 많다. 화성=강주안 기자

벌과 함께 지내는 시간이 늘면서 A씨에게 변화가 찾아왔다. A씨는 "예전엔 친구가 없었고 편의점 아르바이트와 생산직으로 여러 번 일했지만, 많이 잘렸다"며 "여기서 친구를 만났고 생명의 소중함을 배우게 됐다"고 말했다. 그는 양봉 훈련 틈틈이 진행되는 바리스타 교육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결과 공공기관에 있는 카페에서 바리스타로 당당하게 일하게 됐다. 장명찬 센터장은 "양봉과 병행해 바리스타 훈련과 티 마스터 교육 등을 하는데 아주 적극적으로 배우려고들 노력한다"며 "양봉 교육을 마친 사람은 카페나 병원 등에 전원 취업해 잘 해나가고 있다"고 설명했다.

조현병 환자들이 꿀벌과 생활하는 경기도 화성 소재 양봉장에선 반려견이 이들을 맞아준다. 화성=강주안 기자

조현병 환자들이 꿀벌과 생활하는 경기도 화성 소재 양봉장에선 반려견이 이들을 맞아준다. 화성=강주안 기자

이남영 동국대 일산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우리 주변에 조현병 환자가 상당히 많지만, 증세가 심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이 모르는 경우가 많다”며 “이들 중 지적 능력이 뛰어난 사람도 많다”고 설명했다.

이 교수는 “이런 사람들에게 규칙적인 생활을 하고 다른 사람과 소통하게 하는 것이 치료에 큰 도움이 된다”며 “다만 상태가 좋아졌다고 약을 안 먹거나 치료를 소홀히 하면 다시 나빠질 위험이 있기 때문에 항상 치료를 병행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재활센터의 양봉 교육 프로그램을 전원이 완수하진 못했다. 한 명이 도중에 사망했다고 한다. “알코올 중독 때문에 건강이 나빠져 교육을 마칠 수 없었다”고 재활센터 측은 안타까워한다.

장애인 가운데 정신장애인이 일자리에서 가장 소외받고 있다. 자료=한국장애인고용공단 고용개발원

장애인 가운데 정신장애인이 일자리에서 가장 소외받고 있다. 자료=한국장애인고용공단 고용개발원

올해 훈련 막바지에 이른 조현병 환자 5명도 교육이 끝나면 카페, 병원 등에서 일하게 된다. 김정남 총괄팀장은 “이들은 직장에서 일하다가 꿀을 수확하는 시기 등 양봉장에 일손이 필요할 때는 양봉 업무에 투입되는 등 두 사람 몫을 해낸다”고 말했다.
A씨는 “저는 대학을 나오지 못해 우리 사회에서 희망이 없다고 생각해왔다”며 ”양봉 훈련이 직업에 연계돼 일을 하게 되면서 큰 희망이 생겼다”고 말했다.
강주안 기자 jooa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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