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人들]산머루로 만드는 신의 물방을… 한국 와인 챔피언을 꿈꾸다

중앙일보

입력 2021.10.16 07:00

“자연이 주는 게 95%입니다. 사람은 5%의 노력만 더하는 거죠”

그는 한때 프로 복싱 선수였다. 선수를 그만둔 후에는 경호원으로도 활약했다. 외환위기(IMF)를 맞은 어느 날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후 20여년간 수도산 자락 해발 500m에 산머루를 심고 내추럴 와인을 만들고 있다. 2021년 대한민국 주류대상에서 한국 와인 부문 대상을 받은 수도산 와이너리 백승현 대표(50)의 이야기다.

백승현 대표는 자연을 링삼아 한국 와인의 챔피언이 되고 싶다고 말했다. 장진영 기자

백승현 대표는 자연을 링삼아 한국 와인의 챔피언이 되고 싶다고 말했다. 장진영 기자

지난 주말 경북 김천시 수도산 자락에 있는 그의 와이너리를 찾았다. 비탈진 산길 끝에 검게 그을린 백 대표가 마중 나와 있었다. 그를 따라 포도밭을 살펴봤다. 약 1만8000㎡ 규모의 밭을 혼자서 관리한다고 했다. 연간 생산량은 5000병 정도다. 주 재배 품종인 산머루 외에도 템프라니요, 가르나차, 모나스트렐 등 여러 품종의 포도를 함께 키워내고 있었다. 그때 ‘찌그러진’ 상태의 산머루 송이들이 그대로 나무에 걸려있는 걸 발견했다.

당도를 높이기 위해 건조시킨 후 수확한다. 10월 중순 이후부터 11월까지가 본격적인 수확철이다. 장진영 기자

당도를 높이기 위해 건조시킨 후 수확한다. 10월 중순 이후부터 11월까지가 본격적인 수확철이다. 장진영 기자

그의 밭에는 잡초가 무성하다. 흙은 와인찌꺼기와 부엽토를 섞어쓴다. 내추럴와인을 만들기 위한 유기농 재배 방식이다. 장진영 기자

그의 밭에는 잡초가 무성하다. 흙은 와인찌꺼기와 부엽토를 섞어쓴다. 내추럴와인을 만들기 위한 유기농 재배 방식이다. 장진영 기자

수확 시기를 놓친 것이 아닌가
'아마로네' 와인 방식입니다. 이탈리아 북부 지방에서 당도를 높이기 위해 수확한 포도를 건조해 와인을 만드는데 이렇게 하면 당도가 많이 올라갑니다. 원래 방식과 다르게 수확 전에 건조 시키고 있어요. 담백하면서 기분 좋은 쓴맛이 특징입니다. 보당(당도를 높이기 위해 설탕을 첨가하는 것)도 필요 없습니다.
와인을 만드는데 포도가 아닌 산머루를 선택한 이유는
귀농 초창기에는 외래 포도 품종을 들여오기가 쉽지 않았어요. 우리 것으로 정통 와인을 만들고 싶었죠. 산머루는 해발 300m 이상에서 잘 자랍니다. 와이너리가 자리한 이곳은 최적의 맛을 내는 재배 조건이에요.  
붉게 물든 백승현 대표의 손끝. 장진영 기자

붉게 물든 백승현 대표의 손끝. 장진영 기자

그의 밭에는 약 5000주의 산머루, 포도 나무가 심겨 있다. 그런데 바닥에는 거뭇한 흙과 잡초가 무성했고 나무들 위와 옆으로는 하얀 그물막이 설치되어 있었다. 마치 밭을 보호하는 듯한 모양새였다. “열매가 맛있게 익으면 산짐승과 산새들이 먼저 알고 달려듭니다”
나무 위 그물막은 비 피해는 줄이고 햇빛을 받아 당도를 최대한 높이기 위해 설치한 것이라고 했다.

흙의 생김새도 특이하다
화학 비료는 일절 쓰지 않고 유기농으로 재배합니다. 부엽토와 와인 찌꺼기 등을 섞어서 일군 밭인데 땅이 알아서 거름져집니다. 잡초도 그대로 두고요. 순환하는 땅 덕분인지 가끔 멧돼지가 땅속 지렁이를 먹으러 내려오기도 해요.  
당도를 높이기 위해 인위적으로 송이를 덜어낸 나무들. 한 그루에서 와인 한 병이 생산된다. 장진영 기자

당도를 높이기 위해 인위적으로 송이를 덜어낸 나무들. 한 그루에서 와인 한 병이 생산된다. 장진영 기자

그는 산머루외에 여러 품종의 포도도 재배중이다. 우연하게 자라나는 귀부와인. '귀부'는 귀하게 부패됐다는 뜻으로 잿빛곰팡이균이 퍼져 포도알이 쭈글쭈글해지는 현상이다. 포도가 상한것은 아니다. 수분을 빼앗겨 알맹이에는 당분만 남아 벌꿀향이 풍부한 와인으로 탄생한다. 장진영 기자

그는 산머루외에 여러 품종의 포도도 재배중이다. 우연하게 자라나는 귀부와인. '귀부'는 귀하게 부패됐다는 뜻으로 잿빛곰팡이균이 퍼져 포도알이 쭈글쭈글해지는 현상이다. 포도가 상한것은 아니다. 수분을 빼앗겨 알맹이에는 당분만 남아 벌꿀향이 풍부한 와인으로 탄생한다. 장진영 기자

나무의 크기에 비해 열매 맺은 송이가 적은 편이다
농약을 쓰지 않으니 버텨낸 놈만 살려냅니다. 또한 줄기가 많아지면 열매들끼리 영양분을 나눠 갖게 됩니다. 보통 한 나무에서 산머루를 5~10kg 정도 수확하는데 2kg 정도만 남기고 덜어내고 있어요. 한 그루의 나무는 딱 와인 한 병으로 세상에 나옵니다.
오크통에서 숙성중인 와인들. 오크통은 약 3-4회 사용하고 새것으로 교체한다고 했다. 장진영 기자

오크통에서 숙성중인 와인들. 오크통은 약 3-4회 사용하고 새것으로 교체한다고 했다. 장진영 기자

백승현 대표가 병입된 와인의 탁도를 관찰하고 있다. 장진영 기자

백승현 대표가 병입된 와인의 탁도를 관찰하고 있다. 장진영 기자

백승현 대표는 2017년산 빈티지를 가장 자신있게 선보인다고 했다. 2021년 대한민국 주류대상에서 최고상을 수상한 빈티지다. 병입 후 숙성중인 와인병의 모습. 장진영 기자

백승현 대표는 2017년산 빈티지를 가장 자신있게 선보인다고 했다. 2021년 대한민국 주류대상에서 최고상을 수상한 빈티지다. 병입 후 숙성중인 와인병의 모습. 장진영 기자

옹기 숙성을 고집하다가 여러 번 실패했다고
2006년 옹기에 숙성한 첫 와인을 생산했는데 품평회에 내놓았더니 ‘주스’라고 하더군요. 그해에 생산한 거 다 버리고 오크통 숙성을 시작했습니다. 재배해서 수확하고, 오크통 숙성, 병입, 또다시 숙성해서 세상에 내놓을 때까지 약 4년의 세월이 걸립니다. 여름에 태풍이라도 맞게 되면 다시 처음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사람이 맘대로 할 수 있는 게 없어요. 자연의 섭리에 따라가야지.
그런 지구력에 ‘복서’출신이란 게 도움이 되는지
챔피언이 꿈이었는데 몸 관리를 못 해서 그 목표를 이루지 못했어요. 그렇지만 와인에는 오기가 생기더군요. 좌절을 맛봤으니까 지금의 ‘숙제’를 해결해야겠다는. 수확부터 와인병에 라벨 붙이는 것까지 혼자서 모든 것을 다 하고 있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다 알아야 자신 있게 내놓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백승현 대표는 자연을 링삼아 한국 와인의 챔피언이 되고싶다고 말했다. 장진영 기자

백승현 대표는 자연을 링삼아 한국 와인의 챔피언이 되고싶다고 말했다. 장진영 기자

수도산 와이너리의 와인브랜드 '크라테(Krate)'. 수도산 지형이 분화구를 닮아 분화구를 뜻하는 크라테(Crater)에 한국 술(K)를 조합해 만든 이름이라고 했다. 장진영 기자

수도산 와이너리의 와인브랜드 '크라테(Krate)'. 수도산 지형이 분화구를 닮아 분화구를 뜻하는 크라테(Crater)에 한국 술(K)를 조합해 만든 이름이라고 했다. 장진영 기자

그는 와인만 좋아하지는 않는다고 고백했다. 소주, 맥주, 막걸리 등 기분에 따라 마시고 싶은게 달라진다는 이유였다. 그런데 와인에는 이들과는 다른 특별함이 분명하게 존재한다고 했다. “와인에는 취향, 추억, 바램 등 많은 대화가 담겨 있습니다. 한 병을 놓고 밤새 이야기를 나눌 수도 있죠” 그리고 젊은 시절 이루지 못한 꿈을 이루고 싶다고 덧붙였다. “자연을 링 삼아서 한국 와인 챔피언이 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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