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국무부, 중공·국민당 싸잡아 비방한 ‘중국백서’ 발표

중앙선데이

입력 2021.10.16 00:21

업데이트 2021.10.20 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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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8호 29면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698〉 

1949년 1월 20일, 텐안먼 성루(城樓)에서 열린 중공 입성식 치장. [사진 김명호]

1949년 1월 20일, 텐안먼 성루(城樓)에서 열린 중공 입성식 치장. [사진 김명호]

1949년 6월 30일, 마오쩌둥은 중국공산당(중공) 창당 28주년을 하루 앞두고 일변도(一邊倒·이비엔다오) 석 자를 강조했다. “이비엔다오는 쑨원(孫文·손문)의 40년 경험과 중국공산당 28년의 경험이 우리에게 가르쳐준 것이다. 숙지해서 승리에 도달하고, 승리를 공고히 하려면 이비엔다오를 견지해야 한다. 40년과 28년의 누적된 경험에 의하면 중국인은 제국주의 편에 서면 안 된다. 사회주의 편에 서야 한다. 예외가 있을 수 없다. 담 위를 걷는 제3의 길은 없다. 우리는 제국주의에 기운 반동파 장제스(蔣介石·장개석)를 반대한다. 제3의 길을 걷는 환상가들에게도 마찬가지다. 국제적으로는 소련을 으뜸으로 한 반제국주의 전선에 속해야 진정한 우의와 지원을 받을 수 있다.” 이쯤 되면 미국 정부 내의 반공주의자들을 자극하고도 남을 내용이었다.

마오 “중국인, 반제국주의 전선에”  

옌칭대학교장 시절의 스튜어트. [사진 김명호]

옌칭대학교장 시절의 스튜어트. [사진 김명호]

미 국무장관 애치슨은 반응이 빨랐다. 이틀 후, 주중대사 스튜어트에게 전문을 보냈다. “7월 25일 전까지 워싱턴에 도착해라.” 베이징에서 마오와 저우언라이(周恩來·주은래)를 만나기로 했던 스튜어트는 난감했다. 동행하기로 했던 난징(南京) 군사관제위원회(군관회) 외사처장 황화(黃華·황화)를 볼 면목이 없었다. 비서 편에 황에게 통보하고 귀국 준비를 했다.

스튜어트는 국민당 정부의 몰락을 확신한 국무부의 〈중국백서(白書)〉 발표가 임박한 것을 알 턱이 없었다. 베이징행을 허락해 달라는 전문을 다시 보냈다. 황화도 스튜어트를 부추겼다. “당 지도부가 선생 오기를 기다린다.” 국무부는 뉴욕타임스의 문의가 빗발치자 8월 2일 전까지 중국을 떠나라고 재촉했다. 8월 2일 오전 7시 45분, 주중대사 스튜어트는 아침도 거른 채 50년간 생활하던 중국을 황급히 떠날 수밖에 없었다.

장제스는 미국의 중국정책 조정과 〈중국백서〉 발간계획을 알고 있었다 시종실 비서가 구술을 남겼다. “미 국무부 안에는 평소 총통이 구워삶은 부원들이 많았다. 백서 내용을 총통에게 알려줬다. 이런저런 이유로 우호적인 공화당 의원들이 백서발간 저지에 나섰지만 허사였다. 화가 난 총통은 대응할 준비를 했다. 미국과 주고받은 문건과 사신(私信)들을 정리하라고 지시했다.

중국 유엔대표 시절, 미국 대표 부시와 대면한 황화. [사진 김명호]

중국 유엔대표 시절, 미국 대표 부시와 대면한 황화. [사진 김명호]

8월 1일, 타이베이(臺北) 차오산(草山), 지금의 양밍산(陽明山)에 국민당 총재 집무실을 차린 장제스가 시종실 주임에게 지시했다. “이승만과 태평양지역 반공연맹 출범 의논 차 한국에 갈 계획이다. 3일 오후 출발하니 준비해라.” 미 군정과 의논한 한국 측이 6일로 변경을 요구했다. 장은 보안상 3일 날 타이베이를 출발했다. 중공의 손길이 미치지 못하는 저장(浙江)성 해안지역을 유람하고 8월 6일 진해에 도착했다. 전날 미국이 〈중국백서〉를 발표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1,200페이지에 달하는 〈중국백서〉는 중공과 국민당을 싸잡아 비방하는 내용이었다. 파장이 컸다. 국민당 지도부가 노발대발했다. “미국 정부가 우리를 배반했다. 우물에 빠진 사람에게 돌 던진 것과 다를 바 없다. 재기를 노리는 국민당에 찬물을 뿌리고, 붕괴를 가속화했다. 미국이 국민당 통치구역의 민심이 중공 쪽으로 기우는 계기를 만들었다. 정말 나쁜 놈들이다.” 장제스의 반응은 의외였다. 평소와 다른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일기에는 솔직한 심정을 토로했다. “애통할 뿐이다. 미 국무부의 조치에 통석(痛惜)을 금치 못한다. 심모원려(深謀遠慮)가 결핍된 미국의 지도자가 제 손으로 제 팔을 잘랐다.” 이런 일기도 남겼다. “마셜과 에치슨은 중국정책의 착오와 실패를 덮기 위해 양국의 전통적인 우의에 흠집을 냈다. 국가 간의 신의와 외교의 규범을 모르는 사람들이다. 미국 역사에 기록될 큰 오점이다.” 국민당 비상대책위원회가 백서를 비판하는 성명을 작성했다. 초안을 본 장제스는 발표를 저지했다. “공산당보다 미국이 더 고약하다. 그래도 우리가 의지할 유일한 세력은 미국 외엔 없다. 이를 악물고 고통을 삼켜라.” 일기에 이런 구절을 첨가했다. “심판대에 선 그리스도는 억울하지만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체면상 침묵만 유지할 수는 없었다. 비상대책위원회에 두 가지를 지시했다. “다시는 미국에 도움을 청하지 마라. 정부 명의로 성명을 발표해라. 정부 입장에 치중하되 미국 비난이나 변명은 한마디도 거론하지 마라.”

스튜어트, 기내서 백서 보고 경악

중일전쟁 시절, 중공의 항일근거지 옌안(延安)에는 미군들이 상주했다. 마오쩌둥과 펑더화이(오른쪽)와도 자주 어울렸다. [사진 김명호]

중일전쟁 시절, 중공의 항일근거지 옌안(延安)에는 미군들이 상주했다. 마오쩌둥과 펑더화이(오른쪽)와도 자주 어울렸다. [사진 김명호]

열 받기는 중공도 마찬가지였다. 마오쩌둥이 직접 나섰다. 스튜어트를 비난하는 문장을 발표했지만 실제 비판 대상은 미국 정부와 백서를 만든 국무장관 에치슨이었다. 간추려 소개한다. “스튜어트가 난징을 떠났다. 워싱턴에 도착하기도 전에 백서가 날아왔다. 이해가 간다. 스튜어트는 철저히 실패한 미국 침략 전쟁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스튜어트는 중국에서 태어난 미국인이다. 중국 사회에 상당히 넓은 관계망을 구축하고, 오랜 세월 교회학교를 이끌었다. 항일전쟁 시기엔 일본인 감옥에 있었다. 평소 미국을 사랑하고 중국도 사랑하다 보니 일부 중국인들을 미혹시켰다. 마셜의 눈에 들어 중국대사 역임한, 마셜계열 풍운 인물 중 한 사람이다.” 내전 기간도 나름대로 회상했다. “지난 3년간 미국의 카빈총과 기관총, 박격포, 화염방사기, 수류탄, 탱크, 폭격기가 수백만의 중국인을 살상했다. 저들만 우리를 죽인 게 아니라 우리도 저들을 죽였다. 이제 저들은 우리에게 봉쇄, 실업, 통화팽창, 물가상승 등 어려운 일만 남기고 패주했다”. 마무리가 가관이었다. “미국의 백서는 파산의 기록이다. 교육자들은 참고해라. 스튜어트가 떠나고 백서가 날아온 것은 좋은 일이다. 두 사건은 경축할 가치가 있다.”

스튜어트는 호놀룰루에서 〈중국백서〉 두 권을 입수했다. 옌칭(燕京)대학 졸업생들과 어울리느라 볼 시간이 없었다. 샌프란시스코로 가는 기내에서 백서를 펼쳐보고 경악했다. 대사 재직기간 국무부와 주고받은 전문과 보고서는 물론, 극비리에 나눈 대화 내용이 깡그리 들어있었다. 자신이 모르는 내용도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스튜어트는 타고난 교육자였다. 워싱턴까지 가는 동안 좌고우면(左顧右眄)하며 불안을 감추지 못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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