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암 모퉁이 하나 돌면 정자…저마다 월출산을 바라본다

중앙선데이

입력 2021.10.16 00:21

업데이트 2021.10.16 0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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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8호 26면

[휴가지가 된 유배지] 월출산 

지난달 6일 한 탐방객이 월출산 구정봉에서 바람재 삼거리로 내려서고 있다. 이날 바람재의 바람은 제대로 서 있기 조차 힘들 정도였다. 왼쪽 봉우리가 천황봉이다. 김홍준 기자

지난달 6일 한 탐방객이 월출산 구정봉에서 바람재 삼거리로 내려서고 있다. 이날 바람재의 바람은 제대로 서 있기 조차 힘들 정도였다. 왼쪽 봉우리가 천황봉이다. 김홍준 기자

“어이구야, 이렇게 좁아서야 나 같은 사람은….”

조선 때 영의정 지낸 김수항의 귀양지
죽림정·회사정·원풍정…정자 곳곳에

구림, 도선·왕인 등 배출한 호남 명촌
모정마을서 보는 월출·일출은 장관

지난 13일, 서울에서 왔다는 김모(56)씨는 월출산 구정봉 막바지에서 진땀을 흘리고 있었다. 건장한 체격의 그는 바위틈에서 몸을 옆으로 틀어 벽면과 얼굴을 맞대고 올라섰다.

농암(農巖) 김창협(1651~1708)도 340여 년 전 가을, 이곳 구정봉에 올랐다. 음력 1675년 8월이었다. 그가 ‘등월출산구정봉기(登月出山九井峰記)’에 적는다. ‘구정봉은 꼭대기에 오르려면 굴속으로 들어가야 하는데…반드시 뱀처럼 포복해야…갓이며 두건을 벗지 않을 수 없다. …굽어보니 큰 바다가 마치 발밑에 놓인 것 같아 또한 상쾌하였다 ….’

농암 김창협이 쓴 ‘등월출산구정봉기(登月出山九井峰記)’에는 월출산 구정봉 정상에 오르기 위해서는 이와 같은 굴을 힘겹게 지나가야 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김홍준 기자

농암 김창협이 쓴 ‘등월출산구정봉기(登月出山九井峰記)’에는 월출산 구정봉 정상에 오르기 위해서는 이와 같은 굴을 힘겹게 지나가야 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김홍준 기자

김창협의 바로 밑 동생인 삼연(三淵) 김창흡(1653∼1722)도 그해 10월(음력) 월출산에 올랐다. 형제는 왜 잇달아 한양에서 800리(314㎞)나 되는 머나먼 월출산에 갔을까. 둘은 산수 유람을 즐긴 당대 최고의 문인이었다. 이유는 더 있다. 아버지 문곡(文谷) 김수항(1629~1689)이 전남 영암에 유배 중이었다.

조선 문인 중 산문에 능했다는 김창협, 시에 탁월했다는 김창흡 형제가 각자 월출산을 찾은 시기(음력 8월과 10월)의 가운데가 요즈음이다. 일백 걸음 깊이의 가을에 마흔 걸음쯤 들어간 때다. 김수항의 창(昌)자 돌림 아들 여섯이 ‘육창’으로 불리며 가문의 창성을 예고했지만, 불안한 그림자가 드리운 때이기도 하다.

# “달이 산 따라 올라” 김시습도 감탄한 월출산
“그닝께, 저기 원풍정도 꼭 들러. 마을회관을 지나가. 앞에, 그닝께 정자 앞에 철비도 찍고.”

전남 영암군 군서면 모정마을에 있는 원풍정에서 바라본 월출산. 지난 10월 13일 일출 직전의 모습이다. 김홍준 기자

전남 영암군 군서면 모정마을에 있는 원풍정에서 바라본 월출산. 지난 10월 13일 일출 직전의 모습이다. 김홍준 기자

전남 영암군 군서면 모정마을에 있는 원풍정(願豊亭)은 1934년에 지었다. 12개의 기둥에는 이곳에서 보이는 12경을 적은 주련이 있다.

전남 영암군 군서면 모정마을에 있는 원풍정(願豊亭)은 1934년에 지었다. 12개의 기둥에는 이곳에서 보이는 12경을 적은 주련이 있다.

영암 군서면 모정마을. 밭에서 일을 하던 신상길(73)씨가 일러줬다. 마을회관을 지나 오른쪽에 모정저수지를 끼고 가면 1934년에 지은 정자가 나온다고. 가만, 조금 전 할머니 셋이 “뭣 땜시 왔서라”라며 물어보던 곳에도 정자가 있고 원풍정 가는 길에 망월정이라는 정자도 있다.

영암은 정자의 고을이다. 모퉁이를 돌면 하나, 다시 모퉁이를 돌면 하나가 있을 정도로 많다. 죽림정, 간죽정, 회사정, 원풍정, 영팔정, 영보정 등 이름을 대기조차 벅차다. 대부분 월출산을 바라보거나 그 산의 품에 들어있다.

월출산은 호남의 금강산이다. 설악산, 주왕산과 함께 한반도 남쪽의 3대 바위산으로 군림한다. ‘영암(靈巖·영험한 바위)’은 바로 여기서 비롯된다. 월출산의 ‘달’은 ‘돌’에서 변형됐다고도 한다. 김시습(1435~1493)은 월출산을 두고 “달이 청천에 뜨지 않고 산을 따라 오르더라”며 경탄했다. 영암 쪽에서 보면 달이 산 뒤에서 나와 산 뒤로 넘어가는데, 이를 두고 한 말이다.

지난 10월 12일 월출산 서쪽에 상현달이 걸려 있다. 김홍준 기자

지난 10월 12일 월출산 서쪽에 상현달이 걸려 있다. 김홍준 기자

전남 영암군 군서면 모정마을에서 모정저수지를 앞에 두고 바라본 월출산. 지난 10월 13일 일출 직전의 모습이다. 김홍준 기자

전남 영암군 군서면 모정마을에서 모정저수지를 앞에 두고 바라본 월출산. 지난 10월 13일 일출 직전의 모습이다. 김홍준 기자

지난 12일, 월출산에는 반달이 떴다. 모정저수지에서는 월출산의 이름 근거가 되는 월출뿐만 아니라 장엄한 일출도 볼 수 있다. 그런데, 마을회관 앞 할머니 한 분이 말한다. “지금 저수지 물을 다 빼부렷당께. 더 깊이 만들라구.”

원풍정 앞에는 흔치 않은 철비(鐵碑)가 있다. 모정저수지의 소유권은 농사를 짓는 모정마을에게 있다는, 전라도 관찰사였던 김병교의 명판결을 기리기 위해 1857년에 쇠로 만든 비석이다. 원풍정 열두 기둥에는 원풍정에서 보이는 12경을 써놓았다. 그중 하나. ‘구림조연(鳩林朝烟)-구림의 아침 연기’.

전남 영암과 강진에 걸쳐 있는 월출산. 지난 10월 13일 벼 가을걷이가 한창이었다. 김홍준 기자

전남 영암과 강진에 걸쳐 있는 월출산. 지난 10월 13일 벼 가을걷이가 한창이었다. 김홍준 기자

# 구림의 연주 현씨 도움 받은 유배자 김수항
“뭐시기? 어디? 산에 간다고라? 뭐시기? 아, 뱀 조심혀.”

모정마을에서 월출산으로 더 바짝 다가서 있는 구림마을. 동네 주민 한명이 이웃과 소주를 마시던 중 “내 귀가 어둡다”며 말소리를 키웠지만 친근하게 말했다. 구림은 김수항에게 친밀한 곳이다.

서인이었던 김수항은 당파의 부침에 따라 입지가 출렁였다. 복상(服喪)문제를 놓고 그는 남인과 대립(예송 논쟁)했다. 추문을 벌인 왕족의 처벌을 주장했다가 숙종의 노여움을 샀다. 이때 남인의 공격을 받고 유배를 가게 됐다. 1675년 7월이었다. 원주에 갔다가 영암으로 옮겼다.

전남 영암 서구림의 죽림정은 1678년 현징이 취음정을 옮겨와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앞에 두 그루의 나무는 수령 250년이 넘은 보호수(팽나무)다. 김홍준 기자

전남 영암 서구림의 죽림정은 1678년 현징이 취음정을 옮겨와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앞에 두 그루의 나무는 수령 250년이 넘은 보호수(팽나무)다. 김홍준 기자

전남 영암 서구림의 죽림정은 1678년 현징이 취음정을 옮겨와 지은 것으로, 만곡 김수항이 현징의 호를 따 이름을 짓고 우암 송시열이 현판 글씨를 썼다. 대청과 온돌방이 있는 독특한 3칸 정자다. 김홍준 기자

전남 영암 서구림의 죽림정은 1678년 현징이 취음정을 옮겨와 지은 것으로, 만곡 김수항이 현징의 호를 따 이름을 짓고 우암 송시열이 현판 글씨를 썼다. 대청과 온돌방이 있는 독특한 3칸 정자다. 김홍준 기자

누군들 유배지 적응이 쉽겠는가마는, 김수항은 우울증에 걸릴 정도였다고 한다. 그는 현지인들과 교유하면서 차츰 안정을 찾는데, 도움을 준 이들 중에는 구림의 연주 현씨(延州玄氏) 문중이 있었다. 현징(1629~1702)이 시종면 내동리에 있던 취음정(就陰亭)을 뜯어와 구림에 정자를 다시 세웠다. 1678년경으로 추정된다. 김수항이 이름을 붙여주니, 죽림정(竹林亭)이라고 하였다. 현판 글씨는 우암 송시열(1607~1689)이 썼다. 온돌방이 있는 독특한 정면 3칸, 측면 2칸 정자다.

조용헌 강호동양학자는 “2200년 역사의 구림은 도선국사, 왕인박사, 최지몽 태사가 태어난 호남의 명촌 중 가장 먼저 손꼽히는 곳”이라면서 “월출산의 강한 기가 구림을 둘러싼 야트막한 능에서 순화되면서 명촌이 될 수 있었던 것”이라고 밝혔다. 김수항이 죽림정에 올라 시를 읊었다. ‘창을 열고 월출산 대하니, 동령이 가장 마땅하구나.’

# 2㎞ 무명베 펼친 듯한 강진 경포대

“정상에 다녀왔어요.” “구정봉?” “네.” 지난 13일. 도갑사를 들머리로 해서 억새밭을 거친 뒤 구정봉으로 향했다. 초등학생 몇 명을 만나 나눈 대화다. 뒤따라 내려온 보호자에게 물어보니, 이 초등학생이 말한 ‘정상’은 미왕재 억새밭을 말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아이 눈에는 해발 540m의 억새밭이 정상일 수 있다. 정상은 이렇게 높이로만 규정할 수 없다. 월출산의 ‘제3봉’ 구정봉의 위상이 정상인 것처럼 말이다.

전남 월출산 미왕재 억새밭. 해발 540m에 있다. 김홍준 기자

전남 월출산 미왕재 억새밭. 해발 540m에 있다. 김홍준 기자

전남 월출산 구정봉 정상에는 우물처럼 움푹 패인 '나마지형'이 있디. 이런 '우물'이 9개라고 해서 구정봉(九井峰)이라는 이름이 생겼다. 지난 10월 13일 구정봉에서 바라본 영암 들판이 누렇게 익어 있다. 김홍준 기자

전남 월출산 구정봉 정상에는 우물처럼 움푹 패인 '나마지형'이 있디. 이런 '우물'이 9개라고 해서 구정봉(九井峰)이라는 이름이 생겼다. 지난 10월 13일 구정봉에서 바라본 영암 들판이 누렇게 익어 있다. 김홍준 기자

김창협은 ‘등월출산구정봉기’에 이렇게 쓴다. "월출산의 절정은 구정봉….” 구정봉은 아홉 개의 오목한 우물 형상의 바위 모양 때문에 붙은 이름이다. 구정봉은 해발 738m. 높이로 치면 천황봉(809m), 향로봉(743m)보다 낮다. 김창협은 왜 ‘절정’이라고 했을까. 영암문화원은 "신라, 고려 시대에 국가 제사를 구정봉에서 지냈기 때문에 정상이라는 인식이 있다”고 밝혔다. 실제 신동국여지승람에서도 월출산의 주봉을 구정봉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전남 월출산의 경포대는 계곡이 무명베를 펼친 것처럼 아름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김홍준 기자

전남 월출산의 경포대는 계곡이 무명베를 펼친 것처럼 아름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김홍준 기자

하나, 둘, 셋 …. 탐방객들이 구정봉 정상에 모이기 시작했다. 이들 중 서울에서 왔다는 최모씨는 "강진 쪽 경포대에서 올라와 도갑사로 내려간다”고 했다. 경포대(鏡布臺)는 강릉의 경포대(鏡浦臺)와 한자가 다르다. 2㎞에 걸친 계곡이 무명베를 펼친 것 같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김병희(50) 월출산 자연환경 해설사는 "월출산은 전남 강진에 30%, 영암에 70% 물려있다”며 "산세가 걸출하지만, 워낙 수도권에서 멀어 탐방객이 적은 편인 데다 강진 쪽은 더 멀어 한갓지다”고 말했다.

# 이름값 제대로 하는 월출산 바람재
‘휭~.’ 지난 달 6일. 바람재 삼거리에는 이름 그대로 바람이 세차게 불었다. 경기도 부천에서 온 한은희(51)씨는 “서 있기조차 힘들다”며 낮은 자세로 걸어갔다. 광풍이었다.

1680년, 숙종은 다시 김수항을 조정으로 불러들여 영의정에 봉했다. 남인이 실권하고 서인이 정권을 잡은 경신환국이었다. 피바람이 몰아쳤다. 하지만 1689년 숙종은 장희빈에 대한 예우가 박하다며 서인에서 갈려져 나온 노론을 추궁했다. 기사환국이 일어난다. 남인이 집권한다. 김수항은 다시 유배를 간다. 진도에서 사약을 받는다. 김창협은 관직에서 물러나 은거했다. 궁핍해졌다. 아들이 죽고 네 명의 딸 중 두 명도 먼저 떠나보냈다. 김창협의 슬픔은 극에 달했다.

김수항은 죽기 직전 이런 말을 남겼다. “나는 위태로운 때를 만나 오래도록 있지 말아야 할 자리를 외람되이 차지했다.” 안동 김씨의 시련이었다. 하지만 100여 년 뒤, 안동 김씨는 왕비 3명을 내놓으며 세도정치의 정점에 올랐다.

전남 영암과 강진에 걸쳐 있는 월출산의 구정봉. 큰바위얼굴 모양새로, 높이로 치면 천황봉과 향로봉에 이은 제3봉이지만 예전 국가 제사를 지냈을 정도로 제1봉의 위상을 갖추고 있다. [중앙포토]

전남 영암과 강진에 걸쳐 있는 월출산의 구정봉. 큰바위얼굴 모양새로, 높이로 치면 천황봉과 향로봉에 이은 제3봉이지만 예전 국가 제사를 지냈을 정도로 제1봉의 위상을 갖추고 있다. [중앙포토]

전남 영암군 도갑사에서 월출산으로 향하는 산길 왼쪽에 용수폭포가 있고 그 앞에 벽간정(碧澗亭)이 있다. 김홍준 기자

전남 영암군 도갑사에서 월출산으로 향하는 산길 왼쪽에 용수폭포가 있고 그 앞에 벽간정(碧澗亭)이 있다. 김홍준 기자

13일의 하산길. 도갑사 뒤 벽간정(碧澗亭). 김창협이 이곳에서 아버지를 생각하며 읊었다. ‘흩날리는 폭포수, 흰 옷깃 적시는구나.’ 권력의 정점에서는 권력의 최후를 감지하기 힘든 것일까. ‘큰바위얼굴’을 한 구정봉이 바람 부는 바람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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