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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피아노 기법 가죽 패턴…3년을 썼는데도 광택 그대로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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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8호 24면

[쓰면서도 몰랐던 명품 이야기] 펠리시 클러치 백

펠리시 클러치 백. [사진 윤광준]

펠리시 클러치 백. [사진 윤광준]

외출 한 번 할라치면 챙겨야 할 물건이 꽤 많다. 신용카드가 담긴 얇은 지갑, 사람 만나면 나누어야 할 명함, 자동차 키와 작은 수첩, 만년필, 그리고 스마트 폰…. 아! 지긋지긋한 예비용 마스크도 있다.

여자들은 핸드백이 있으니 문제될 게 없다. 남자들은 사정이 다르다. 손에 뭘 들고 다니거나 어깨에 메는 것을 질색하는 이들이 많다. 상남자들이라면 지갑은 윗옷이나 바지 허리춤에 대충 넣어 다닌다. 귀찮아도 줄일 수 없는 소지품은 넘치고 이를 담고 다닐 백은 마땅치 않다.

오가는 사람들을 보니 열 사람 중 다섯은 백팩을 메고 다닌다. 난 백팩이 싫다. 업무를 위한 노트북이 필요한 직장인도 아니고 이것저것이 필요한 활동적인 젊은이도 아닌 까닭이다. 게다가 백팩의 크기란 어깨 폭을 기준으로 만들어졌으므로 꽤 커 보여 전체의 비례와 맞지도 않는다. 하드 케이스가 아니라면 내용물을 채우지 않아 축 처진 모양이 영 꼴사납다. 돌이켜보니 대학 생활 이후 한 번도 백팩을 사용하지 않았다. 양손이 편하자고 축 처진 백을 등에 매달고 다니는 그림이 싫었던 거다.

그렇다고 손잡이가 달린 여느 가방도 싫다. 업무용 노트북을 담는 투미를 오래 쓰긴 했지만 이는 일할 때만이다. 젊게 보이고 튀어 보이려고 일부러 거친 질감의 국방색 나일론 천을 쓴 밀리터리 룩 스타일의 크로스 백은 이제 나이에 걸맞지 않는 오버다. 고상한 디자인의 가죽 크로스 백도 있지만 약간 큰 듯해 비례감이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

나이 들수록 백의 부피감·무게 부담

펠리시 클러치 백. [사진 윤광준]

펠리시 클러치 백. [사진 윤광준]

평소 잘 쓰던 가방에 이런저런 투정이 생겼다. 백의 부피감과 무게가 점점 부담스러워져 이젠 들거나 메거나 하는 게 싫어진 거다. 만날 사람도 줄고 갈 곳도 줄었다. 담을 게 줄어들어 예전 같은 가방이 필요 없어졌다. 온갖 이유를 들어 투덜거린 속내는 뭔가 잃어버린 듯한 허전함 때문일 것이다.

요즘 들고 다니는 백은 조그만 클러치 백(clutch bag)이다. 클러치 백은 유럽에서 격식을 갖춘 자리나 파티에 들고 다닐 여성용 작은 지갑을 부르던 말이다. 작은 지갑의 필요는 여성에게만 국한되지 않았다. 서류를 넣고 다녀야 할 변호사 같은 이들 또한 이런 백이 필요했다. 클러치 백의 크기를 키우면 사각의 서류(brief) 정도를 담기엔 안성맞춤이었다. A4 용지 크기 정도가 들어갈 만한 납작한 가방을 브리프 백이라 부르는 연유다. 클러치 백과 브리프 백은 출발로 볼 때 남매지간인 셈이다. 종류만 해도 수십 종이 넘는 핸드백의 세계에서 클러치 백은 여성용과 남성용 구분 없이 쓴다. 여성용 클러치 백을 넘봐도 별 흠이 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소지품 몇 개만 불룩하지 않게 담고 손으로 들거나 고리 줄에 손목을 감고 끝을 쥐고 다닌다. 브리프 백 크기라면 당일치기 여행 정도는 물론 밤을 새워도 될 만큼의 내용물이 담긴다. 내 경우 요령 있게 런닝과 팬티까지 개서 넣고 다녔다.

손잡이를 달거나 고정쇠로 윗판을 고정한 디자인도 있다. 지퍼만 달아 여닫는 기능만 남긴 클러치 백이 나의 선택이다. L자 모양으로 백의 1/2만 두른 디자인이 가장 단순한 형태다. 손잡이가 없으므로 밑 부분을 손으로 감싸거나 모서리 부분을 잡고 다녀야 한다.

클러치 백은 얇을수록 폼 난다. 두툼한 클러치 백은 일수 받으러 다니는 조폭들이나 좋아한다. 한때 영화나 드라마에서 묘사된 클러치 백 사용자들의 모습은 대개 비슷했다. 이유야 어떻든 클러치 백은 간편한 지갑 혹은 작은 가방으로서의 기능에 충실하다. 옷과 잘 매치시키면 세련된 분위기까지 풍길 수 있다. 가죽으로 제대로 만든 좋은 것일수록 효과가 크다. 너무 크면 엉성해 보인다. 갖고 있는 두 개의 클러치 백 가운데 작은 것의 사용 빈도가 훨씬 높다.

손자국 안 남고 모서리도 닳지않아

남성용 소품은 의외로 마음에 드는 것을 찾기 어렵다. 너무 알려진 구찌나 루이비통은 싫다. 게다가 살 돈도 없다. 대신 명품의 퀄리티와 기품을 지닌 숨겨진 보석을 찾는 게 낫다. 지금 들고 있는 펠리시(Felisi)를 찾아내기 위해 세 개의 클러치 백을 버렸던 일은 비밀이다. 몇 년 전 도쿄의 편집숍에서 우연히 발견했다. 첫눈에 범상치 않음을 알았다. 가죽 잘 다루는 이탈리아 물건답게 겉면에선 은은한 광택이 번졌고, 만져보니 질감도 독특했다. 사피아노 기법(가죽에 무늬를 음각하고 표면 코팅을 해 단단하게 만듦)으로 만든 송아지 가죽의 패턴이 주는 맛이다. 부드럽고도 강인한 느낌이 들었다.

펠리시는 밀라노에서 차로 세 시간 정도 걸리는 페라라에서 1973년 창업해 가방과 관련 액세서리를 만드는 업체다. 전통에 얽매이지 않고 현대의 소재와 가죽을 적절하게 활용하는 것이 특기로, 브리프 백이 남성들에게 꽤 인기를 끌고 있었다. “원하고, 쓰고 싶으며, 아름다움을 담은 백이어야 한다”는 창업자의 소신에 대한 호응이라 할 만 했다. 최소한의 장식으로 단순화한 아름다운 디자인이 전 제품에 이어진다. 적당히 묵직한 느낌으로 매일 사용해도 질리지 않는 걸 미덕으로 삼고 있는 듯했다.  펠리시 클러치 백을 3년째 쓰고 있다. 매일 가지고 다니는 만큼 여느 가죽 백이라면 손이나 옷에 쓸려 닳거나 손상되기 마련이다. 펠리시는 이상했다. 손자국에 가죽이 패이지도 않았고 모서리가 닳아 맨 가죽이 드러나지도 않았다. 좋은 가죽을 썼고 가공 정도가 뛰어나다는 방증이다.

가죽 가방 만드는 업체를 운영하는 친구가 곁에 있어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었다. 후처리 가공과 용도에 따른 적합한 가죽의 선택에서 제품 퀄리티가 좌우된다고 했다. 작은 가방이라고 아무 가죽이나 쓰지 못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균일한 두께와 질긴 정도를 맞추고 제대로 처리한 사피아노 기법에서 비롯된 결과였다. 경험보다 더한 신뢰는 없었다.

펠리시 클러치 백을 열 때마다 새로운 사람과 화제를 이어갔다. 즐거운 일들뿐이다. 최근에 만난 이들이라면 짙은 밤색의 펠리시 백을 든 나의 웃음도 기억할지 모른다. 펠리시를 써 보니 여자들이 핸드백에 집착하는 이유가 수긍된다. 백은 자신을 드러내는 표정 같은 거였다. 들어있는 내용물과 연관된 일만 벌어지는 게 우리의 삶 아니던가. 멋진 백에 흉기를 담을 수 없다. 기대 만큼의 일이 벌어지길 원한다면 좋은 백에 향기 나는 물건만 담고 다닐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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