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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스크 있지만 젊으니까” 의사 가운 벗고, 호텔 요리사 접고 버섯·감귤 재배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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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8호 08면

[SPECIAL REPORT]
청년귀농의 진화

호텔 요리사를 그만두고 전남 나주로 귀농한 박융권씨. [사진 박융권]

호텔 요리사를 그만두고 전남 나주로 귀농한 박융권씨. [사진 박융권]

전남 나주시 동강면 옹정리 몽송마을에서 한라봉, 천혜향 등 고급감귤류를 재배하는 박융권(36)씨. 그는 20대 때만 해도 자신이 농부가 될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고 한다. 대학을 졸업하고 변리사 자격증을 따기 위해 노력했지만 매번 탈락의 쓴잔을 마셨다. 그 뒤 몇몇 회사에 취업하기 위해 문을 두드렸지만 최종 면접에서 떨어졌다. 평소 요리에 소질이 있던 그는 요리사의 꿈을 키우기 위해 진로를 바꿨다. 호텔에 일자리를 구해 요리사 일을 배웠다. 하지만 문제가 생겼다. 요리사에게는 생명과도 같은 양 손가락에 심한 통증이 왔다. 과중한 업무 탓이었다. 호텔에서 일한 지 2년 만에 요리사로서의 꿈을 접어야 한다는 생각에 좌절감과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밀려왔다. 일을 그만두고 쉬던 중 박씨는 우연히 지인의 소개로 청년농부사관학교를 알게 됐다. 귀농을 꿈꾸는 이들에게 농부가 되기 위한 기본 준비부터 다양한 체험과 기술을 알려주는 프로그램이었다. 교육 과정은 6개월(2019년 4월~10월까지)이었다. 특히 2개월 동안 실제 농장에서 진행되는 현장실습을 통해 그는 전혀 다른 미래를 설계할 기회를 가졌다. 감귤농업의 마이스터로부터 감귤 농사를 배우게 된 것이다.

밭떼기 대신 직접 유통 판로 개척

13일 오후 경기 이천시 백사면에 위치한 HS 플라워에서 홍해수 대표가 재배한 꽃을 들고 있다. HS플라워는 농업에 ICT를 적용한 국내 최초 농장으로 카네이션·제라늄 등을 생산하고 있다. 정준희 기자

13일 오후 경기 이천시 백사면에 위치한 HS 플라워에서 홍해수 대표가 재배한 꽃을 들고 있다. HS플라워는 농업에 ICT를 적용한 국내 최초 농장으로 카네이션·제라늄 등을 생산하고 있다. 정준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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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부터 농촌에서 농사를 지을 생각을 한 건 아니었는데 마침 고향에 부모님 소유의 농지도 있어 15년 동안의 서울 생활을 정리하고 귀농하기로 결심했어요. 부모님도 처음에는 걱정하셨지만 지금은 응원해주시고 저도 만족하며 살고 있습니다.”

그는 2645㎡(800평) 규모의 감귤 과수원을 경영하는 몽송뜨락농장 대표가 됐다. 또 올해부터는 고구마 농사에도 도전했다. 그는 판로도 새롭게 개척하고 있다. 공판장을 통하거나 밭을 통째로 계약하는 전통적인 방식 대신 생산한 농산물을 직접 수매·가공·판매하는 방식을 택했다. 아직 생산량이 많지는 않지만 SNS를 통해 점점 판매가 늘어나고 있다고 했다. 최근에는 박씨가 구축한 판매 방식에 동참하겠다는 마을 농민들도 하나둘 생겨났다. 그는 주민들과 함께 ‘상생마켓’을 마련할 꿈에 부풀어 있다.

박씨는 “시골 마을에 활력을 주고 싶어요. 마흔이 넘으면 마을 이장도 맡아볼 생각도 하고 있고요. 주변 사람들과 작지만 튼튼한 마을기업도 계획하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박씨는 젊은 세대가 용기를 얻어 귀농에 도전하기를 바란다고 했다. 그는 그것이 생기를 잃어가는 농촌을 살리기 위한 길이라고 믿는다.

충북 충주로 귀촌한 임혜수씨가 마을 어르신들을 위한 밥상 행사를 준비하고 있다. [사진 임혜수]

충북 충주로 귀촌한 임혜수씨가 마을 어르신들을 위한 밥상 행사를 준비하고 있다. [사진 임혜수]

귀농·귀촌하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 한국농촌경제연구원에 따르면 지난해 귀농·귀촌 인구는 49만4569명으로 전년 대비 7.4% 증가했다. 특히 30대 이하 귀농가구수는 1362가구로 전년도 보다 12.7% 늘어 역대 최대치를 기록했다. 30대 이하 젊은 층의 귀농 비중은 전체 귀농 가구에서 10.9%지만 최근 몇 년 동안 꾸준히 증가세에 있다.

귀농·귀촌이 증가한 데는 수도권 등 대도시 집값의 급격한 상승, 코로나19 팬데믹에 따른 영향도 있다. 하지만 농촌 생활과 농업에 대한 젊은 세대의 시각 변화, 선호도 증가, 농업기술의 발달 등도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충북 옥천에서 10년째 마을 이장으로 일하고 있는 김선호(62)씨는 “예전에는 직장에서 은퇴한 60대 이상의 귀농·귀촌이 대부분이었는데 최근에는 30~40대 젊은 층의 귀농인들도 늘고 있다”면서 “과거엔 외지인이 마을에 들어오면 이상하게 생각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요즘엔 젊은 세대가 들어와 사는 것 자체로 마을에 생기가 돌아 대부분 환영하는 분위기다”라고 말했다.

박씨처럼 도시에서 취업 등을 고민하다 귀농하는 경우도 많지만 최근에는 안정적인 직업을 가진 이들 중에서도 과감하게 귀농·귀촌을 택하는 이들도 있다. 전북 무주군 부남면에서 버섯농장을 운영하는 이재훈(39)씨는 2019년 6월 귀농전까지 서울 강남에서 병원을 운영하는 ‘잘나가는’ 의사였다. 도시를 벗어나 살아본 적이 없었다는 이씨는 “경쟁에 시달리며 숨 가쁘게 살아왔지만 삶의 질이 그다지 만족스럽지 못했다”며 “어느 순간 도시를 떠나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2018년부터 전국을 돌며 정착할 곳을 찾아 헤맸다”고 했다. 그는 농장들을 돌아다니며 농사짓는 법도 배워나갔다. 어떤 작물을 택할지를 고민하고 알아보다 선택한 것이 버섯이었다. 그가 재배하는 녹각 영지버섯은 특히 베트남 등 해외에서 각광받고 있어 최근에는 수출판로를 알아보는데 신경을 많이 쓴다고 한다.

경북 김천에서 고추 농사를 짓는 보배농부 이민진씨가 직접 트랙터를 몰고 있다. [사진 이민진]

경북 김천에서 고추 농사를 짓는 보배농부 이민진씨가 직접 트랙터를 몰고 있다. [사진 이민진]

젊은 세대의 귀농·귀촌은 활력을 잃었던 농촌 마을에 생기를 불어넣는 역할을 하고 있다. 경북 영덕군 고래산 마을이 대표적이다. 이 마을은 수 년 전부터 귀농·귀촌인과 함께 사는 젊은 마을 만들기를 표방했다. 주민들의 자발적 참여로 마을 경관을 가꾸고, 귀농 가구를 적극 유치해 지원했다. 폐교를 리모델링해 키즈카페 등 공간도 새로 만들었다. 특히 귀농·귀촌인을 위한 어울림 행사를 매년 열어 마을 공동체를 활성화하는 노력을 기울였다. 그 결과 2013년부터 지금까지 귀농·귀촌 가구가 58%나 늘었고 마을 인구 증가율도 41%나 됐다. 빈집이 사라지고 아이들 웃음소리가 다시 퍼지면서 고래산마을은 주민 평균연령 57세의 젊은 농촌마을로 탈바꿈했다.

귀농·귀촌을 꿈꾸는 이들이 늘었지만 모두 성공적인 농촌 생활을 하는 것은 아니다. 일부에선 충분한 준비 과정을 거치지 않고 막연히 도전했다가 실패하는 사례도 적지 않다. 또 이를 이용한 사기 사건도 심심치 않게 일어난다. 30대 후반에 다니던 직장을 나와 퇴직금과 모아둔 돈 3억원으로 귀농을 준비하던 A씨는 최근 큰 낭패를 봤다. 그는 지인의 소개로 호두나무 농장을 하면 큰 수익을 올릴 수 있다는 말에 한 영농조합법인을 통해 수천만원을 주고 임야를 샀다. 호두나무 성목 한 그루당 40㎏의 알호두를 수확해 연간 60만~80만원의 수익을 올릴 수 있다는 것이었다. 호두나무 100그루만 심어 잘 기르면 연간 6000만원 이상의 고수익이 기대된다는 것이 영농법인 측의 설명이었다. 또 영농법인 측은 호두나무 재배 관련 각종 기술과 판로 등도 모두 책임지고 알려주겠다고 했다. 하지만 A씨는 그가 산 임야가 호두농사를 짓기에 적합한 땅이 아니라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됐다. 또 영농법인 측은 이후 연락을 끊고 잠적했다.

마을 이장 “젊은 세대 오는 것 환영”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경기도 귀농귀촌지원센터 관계자는 “최근 예비귀농인들을 대상으로 유망 수종이라고 호두나무, 대추 등을 추천하고 노후까지 보장받을 수 있다는 과대광고를 하는 일이 많다”며 “투자대비 3~5배 이상의 수익을 올리고 위탁판매도 해준다는 등 장밋빛 전망만 믿다가 사기 피해를 보는 일이 많다”며 주의를 당부했다. 이 관계자는 이어 “할 것 없으니 농사나 지어볼까라는 단순한 생각만 가지고 철저한 사전준비 없이 귀농·귀촌을 감행하는 것은 무모한 일”이라며 “정부나 지자체의 귀농 지원책, 다양한 관련 교육 프로그램 등을 꼼꼼히 살펴보고 최소 1~2년 동안 준비 기간을 가져야 한다”고 했다. 센터 측은 또 “청년귀농이 농촌 미래를 밝히는 희망이 될 수 있고 발전하는 농업기술을 잘 적용하면 새로운 블루오션도 될 수 있지만, 이를 위해서는 리스크를 최소화하는 준비를 충분히 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청년귀농을 돕는 정부의 대표적인 지원책으로는 2018년에 도입된 ‘청년농업인 영농정착 지원사업’이 있다. 매년 1600~1800명 정도 청년농업인을 선정해 최대 3년간 월 최대 100만원의 정착지원금을 제공하는 사업이다. 1년 차에는 월 100만원(연 1200만원), 2년 차에 월 90만원, 3년 차에는 월 80만원을 지원한다. 정착지원금을 받는 청년농업인을 후계농업인으로 인정해 농지은행에서 빌려주는 농지를 1순위로 제공하고 있다. 또 이들에게는 교육이나 컨설팅 프로그램도 연계해 원활한 귀농을 돕고 있다. 농업창업자금 지원사업도 있다. 최대 3억을 빌려주는데 이율 2%, 5년 거치 10년 상환 조건이다. 거치기간이 끝나고 상환일이 돌아오면 1년에 3000만원씩 갚아야 한다. 억대의 창업지원금만 생각하고 덜컥 뛰어들었다가 실패하고 오히려 큰 빚을 지는 사례도 있어 이 역시 사전에 꼼꼼한 준비와 전문가 상담, 교육이 필수적이다. 각 지자체가 운영하는 다양한 프로그램도 잘 활용해야 한다. 지자체별 귀농·귀촌 지원센터가 대표적이다. 이곳에서는 청년귀농자를 위한 주택 마련 지원비와 수리비, 초보농부 창업을 위한 지원교육 등을 하고 있다.

오형은 지역활성화센터 대표는 “청년귀농은 말처럼 결코 쉬운 도전은 아니기 때문에 정부와 지자체의 관심과 지원이 필요하다”며 “특히 청년들이 귀농해 지역사회의 일원으로 역할 하기 위해서는 기존 농촌사회에서도 이들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려는 자세와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오 대표는 이어 “귀농의 핵심인 농지획득과 농업기술은 개인의 노력만으로는 한계가 있어 정부가 그 기반 마련에 적극 나설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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