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북공정’ 논란이 일었던 국립중앙박물관의 역사 지도를 만드는 과정에서 박물관 측이 ‘위키백과를 참고했다’고 밝혔다.
국립중앙박물관 측은 국회 문화체육관광위원회 소속 국민의힘 배현진 의원실에 제출한 자료에서, 지난 3월부터 9월까지 박물관 중국실 입구에 걸려있던 영상 지도를 제작할 때 “‘케임브리지 일러스트레이티드 히스토리’와 위키백과 지도를 참고”했다고 답했다.
해당 영상은 중국 역사를 영상으로 표현한 약 6분 분량의 작품으로, 중국 위나라의 영역을 당시 백제가 위치한 충청도까지, 한나라는 한강 이북까지, 명나라는 만주 지역까지 포함해 표기하면서 ‘중국의 동북공정 논리와 유사하다’는 비판이 제기됐다. 문제가 불거지자 지난 7일 국정감사장에서 민병찬 국립중앙박물관장이 “미처 실수를 걸러내지 못했다”며 고개 숙여 사과하기도 했다.
"위키백과, 학생 레포트에도 안쓴다… 중앙박물관 경각심 부족"
박물관 측은 해당 영상 제작 과정에서 위키피디아 외에 지도 부분은 케임브리지 대학교 출판부에서 펴낸 ‘케임브리지 일러스트레이티드 히스토리, 차이나’를, 연표 및 시대 개괄 설명 부분은 웬 퐁‧제임스 와트의 ‘과거를 소유하다(Possessing the Past)’, 마이클 셜리번의 ‘중국미술사’, 북경중앙미술학원이 펴낸 ‘간추린 중국미술의 역사’ 등 외서 총 4권을 참고했다고 밝혔다.
전문가들은 국립중앙박물관이 ‘위키피디아를 참고했다’고 밝히는 것부터 어불성설이라고 평한다. 한국외대 국제지역대학원 강준영 교수는 “위키백과는 학생 레포트에도 인용으로 쓰지 않는 것”이라며 “중앙박물관이 너무 경각심, 주체의식 없이 수동적, 관습적으로 외부 자료만 인용해오던 문제가 결국 불거진 것”이라고 비판했다.
전문가들 "서양 중심의 동아시아 역사, 더 '중국 중심'
위키백과 외에 외국 서적을 대체로 참고해 지도를 만든 부분도 ‘서양 중심의 역사’에 치중했다는 비판이다. 건국대 중국연구원 한인희 상임고문은 “‘국수주의’ 논란을 피하려고 한국‧중국의 책을 배제하고 괜히 외국 서적을 주로 참고하다가 실수가 난 것 같은데, 서양에서 보는 동북아시아의 역사는 오히려 거의 ‘중국 중심’이라 한국을 더 변두리로 보는 시각을 담고 있다”며 “현재 우리나라가 국제적으로 동해와 일본해 표기에 대해 적극적으로 대응하고 있는 것처럼, 동북공정에 대응하는 '우리 입장의 지도'를 쓰는 게 중앙박물관의 지위에서 더 타당하다”고 지적했다.
경희대 사학과 강인욱 교수도 “서양의 책이라고 해서 더 객관적인 게 아니고, 외국에는 오히려 ‘한국’ 전문가가 적다. 주의해서 자료의 옥석을 가려 취해야 한다”며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펴낸 책 등 모두 전문성은 있지만 대부분 중국 입장에서 쓰인 책들이고, 국내 학자들의 역량도 뛰어난데 다 제쳐두고 외국 자료만 인용하는 건 일견 사대주의적”이라고 비판했다.
"자칫 '한국 중앙박물관도 이렇게 표기했다' 역이용될 수도"
강준영 교수는 “고구려사를 놓고 중국과 ‘동북공정’ 논란을 겪으면서 만든 국책연구기관인 동북아역사재단에서 열심히 역사 오류를 찾아 고치고 있는데, 그쪽에 한 번만 확인해봤어도 이런 실수는 없었을 것”이라며 “이런 실수가 잘못 인용되면 ‘한국 중앙박물관도 이렇게 표기했다’고 역이용될 수 있었던 사건이고, 비슷한 일이 여러 차례 반복되는 걸 보면 단순히 ‘실수’가 아니라 중앙박물관의 무책임하고 반성 없는 태도가 만들어낸 결과”라고 비판했다.
국민의힘 배현진 의원은 “인터넷 자료를 그대로 쓸 거면 전문인력이 필요할 이유가 없다. 이번 사건은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사들의 굴욕”이라며 “지난해에 이어 두 번째로 ‘역사왜곡’ 논란이 크게 일었는데, 국립박물관으로서 앞으로 이런 일이 반복되지 않게 해결책을 제시해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