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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찬 바람이 분다. 뜨끈한 국수 한 그릇이 생각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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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석의 면면면 ③ 안동국시 

불과 3년 전까지만 해도 나는 칼국수를 먹지 않았다. 이따금 일행과 바닷가에 놀러 갈 때 바지락칼국수를 한 젓가락 맛보는 정도였을 뿐이다. 그마저도 굳이 생각나는 음식이 아니었던 걸 보면, 칼국수는 딱히 내 취향의 음식은 아니었던 게 분명하다. 파스타에 빗대어 설명하면, 당시 나의 면 취향은 ‘알덴테(al dente)’였다. 씹는 식감이 느껴질 정도로 파스타를 삶은 정도를 말한다.

그러던 내가 지인에 의해 처음으로 안동국시를 먹게 됐다. 안동국시와의 첫 만남은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일단, 메뉴명이 국수가 아니라 국시인 것이 의문이었다. 나중에야 국시가 경상도를 포함해 몇몇 지역에서 쓰는 방언이라는 걸 알게 됐지만 말이다.

안동국시를 만들어봤다. 면발 때문에 즐기지 않았는데, 지금은 그 이유로 손에 꼽는 국수가 됐다. 인생도 입맛도 변화무쌍하다. 사진 이유석

안동국시를 만들어봤다. 면발 때문에 즐기지 않았는데, 지금은 그 이유로 손에 꼽는 국수가 됐다. 인생도 입맛도 변화무쌍하다. 사진 이유석

이름이야 어쨌든 내 앞에 놓인 국수는 죽인지 면인지 알 수 없게 푹 퍼져 있었고, 국물은 떡국처럼 걸쭉했다. 면에서는 어린 시절 시골 사랑방을 떠올리게 하는 쿰쿰한 냄새가 났는데, 이게 또 은근히 거슬렸다. 지금이야 가장 좋아하는 우리나라 국수가 뭐냐고 누군가 내게 묻는다면 멸치국수와 함께 안동국시를 제일로 꼽지만, 그때의 첫인상은 그러했더랬다.

안동국시를 다시 만난 건, 역시 3년 전의 일이었다. 면집 오픈을 앞두고 성수동 근방에서 점심을 해결하기 위해 식당을 찾고 있었다. 하필 직장인 점심시간과 겹친 탓에, 웬만한 식당은 대기 중인 손님들로 긴 줄이 늘어서 있었다. 그때 마침 새로 문을 연 안동국시 집이 눈에 띄었다. 일단 손님이 없이 한산했다. 재빨리 한 끼를 때우려는 생각으로 들어갔다.

주문하고 십 분 정도 지나자 국수가 나왔다. 배가 고팠던 나는 얼른 국수 한 젓가락을 들어 후루룩 빨아들였다. 물론 큰 기대는 없었다. 그런데 웬걸, 옛날에는 불어터진 것 같다고 싫어했던 그 면이 세상 부드럽게 느껴졌다. 기분 좋게 끊기는 면과 함께 고소하고 걸쭉한 국물을 한 입 곁들이니, 면과 국물이 미끄럼틀이라도 타듯 매끄럽게 식도를 타고 내려왔다.

국수와 함께 나온 깻잎장아찌와 김치부추무침은 면 자체의 맛을 방해하지 않으면서도 개운한 역할을 톡톡히 해줬다. 국수와 반찬의 조화가 무척 잘 어우러져 마치 좋은 아카펠라를 보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계산을 하려고 일어났을 때는, 놀랍게도 그릇이 바닥까지 깨끗이 비어 있었다! 그 후로도 그 식당을 종종 찾았는데, 아쉽게도 어느 날 식당이 문을 닫고 말았다, 그다음부터는 유명하다는 안동국시 집을 직접 찾아다니게 됐다.

안동국시는 양반가의 음식이었다. 밀국수를 제사상에 올리던 것이 시초다. 사진 중앙포토

안동국시는 양반가의 음식이었다. 밀국수를 제사상에 올리던 것이 시초다. 사진 중앙포토

안동국시는 경북 안동에서 유래한, 양반가의 음식이었다. 옛날에는 밀이 귀했는데, 그 귀한 밀국수를 제사상에 올리던 것이 시초였다고 한다. 분명 부엌에서 구슬땀을 흘리며 국수를 만들었을 게 뻔하다. 홍두깨(다듬이질에 쓰는 단단한 나무로 만든 도구)를 사용해 밀가루 반죽을 최대한 얇게 밀은 다음, 가지런히 썰어내는 일은 보통 정성이 아니기 때문이다. 때문에 안동국시는 제사상이나 잔칫날, 혹은 귀한 손님에게 대접하는 음식이었다고 한다.

사실, 우리나라는 밀 재배가 흔하지 않았다. 고온에 약한 밀은 연간 평균 기온이 3.8도, 여름 평균 기온이 14도인 지대에서 잘 자라기 때문이다. 즉, 안동은 밀 농사를 짓는 몇 안 되는 지역이었다고 한다. 더불어 안동에서는 콩 농사도 많이 했는데, 그 때문인지 안동국시의 면에 콩가루가 자연스레 배합된 것으로 보인다. 콩가루가 들어가면 점성이 낮아져 면의 끈기가 떨어지고 툭툭 끊긴다. 이런 식감의 면을 몇 년 전에 중국에서 먹어본 적이 있다. 북경의 유명한 면 요리 집의 국수였는데, 면이 툭툭 끊어지는 치감이 좋길래 식당 측에 물어보니 면에 완두콩 가루를 배합한다고 했다.

콩가루를 넣은 국수라 콩의 풍미도 살아 있는 것도 안동국시의 매력이다. 처음 안동국시를 먹었을 때 느낀 그 쿰쿰한 향이다. 그땐 이 향에 적응하기 어려웠는데, 나이가 40대로 접어든 지금에는 마치 어린 시절 함께 살던 외할머니의 품에서 나는 정겨운 향처럼 느껴진다. 게다가 이 독특한 콩의 향은 국수의 베이스인 사골육수나 멸치육수와도 기막힌 조합을 보인다.

사골육수에 관해서 얘기해보자면, 지금도 귀한 소사골을 옛날에는 얼마나 먹기 귀했을까? 분명 재탕하고 또 재탕해서 뿌연 국물이 안 나올 때까지 쓰지 않았을까 상상해본다. 물론, 사골육수를 쓸 정도로 부유한 집이 많지 않았겠지만 말이다. 개인적으로는 멸치육수를 좋아해서 사골육수에 적당히 섞어 먹는 걸 좋아한다.

예나 지금이나, 요리하는 엄마 옆에서 한 줌 주워먹는 음식이 최고가 아닐까. 사진 중앙포토

예나 지금이나, 요리하는 엄마 옆에서 한 줌 주워먹는 음식이 최고가 아닐까. 사진 중앙포토

칼럼을 쓰며 어머니에게 안동국시 이야기를 했더니, 국수에 얽힌 당신의 추억을 말해주신다. 어머니가 아이였던 1960년대 무렵의 일이다. 외할머니가 홍두깨로 칼국수 반죽을 얇게 밀어 썰기 시작하면 남은 자투리를 얻어와 이모들과 곁불에 구워 먹었다고 한다. 간식이 없던 시절의 별미였던 셈이다. 국수와 관련한 추억은 어쩐지 다 따뜻하고 아련하게 느껴지는 것 같다.

어느새 가을바람이 차갑다. 날씨가 이럴 때는 역시 뜨끈한 국수 한 그릇이 당긴다. 쿰쿰한 콩의 풍미, 진한 사골육수, 그리고 얇고 하늘하늘한 면발이 눈앞에 아른거린다. 마침 가까운 어르신과 전화통화를 하게 됐는데 나도 모르게 “언제 안동국시 한 그릇 어떠세요?”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튀어나온다. 예전과 달리 지금의 나는 안동국시의 매력에 푹 빠진 게 틀림없어 보인다.

이유석의 안동국시 만들기

면 만들기 
▶ 셰프의 노하우
반죽은 많이 할수록 탄성이 올라가 식감이 좋아져요. 더 쫄깃하고 탄성있는 면을 원한다면 휴지 시, 냉장고에서 최소 1시간 이상 휴지하세요.

준비 재료(2인분)
중력분 200g, 날 콩가루 50g, 물 90~100g, 소금 2g.

만드는 법
① 중력분과 콩가루를 같은 비닐봉지에 넣은 뒤, 흔들어 잘 섞는다.
② 섞은 가루를 넉넉한 용기의 보울에 담는다. 중심부에 손가락으로 작은 홈을 파준 다음 물과 소금을 넣는다.
③ 나무젓가락으로 잘 뒤섞는다. 가루가 뭉쳐 작은 덩어리가 생길 때까지 섞어 준다.
④ 손을 이용해 반죽한다.
⑤ 비닐봉지에 담고 상온에서 30분간 휴지한다.
⑥ 밀가루나 전분을 덧가루로 뿌려주며, 홍두깨로 최대한 얇게 밀어준다. 칼로 썰기 좋게 반으로 두어 차례 접은 뒤, 원하는 너비로 썰어준다.

국물 만들기 
▶ 셰프의 노하우
시판하는 사골육수를 사용할 때는 강불에 한 김 끓여주는 것이 중요해요. 끓을 때, 적갈색 거품이 일면 바로 거품을 제거하세요. 불순물이 다량 함유된 적갈색 거품은 강불에 끓여야 나오고 약불에 끓일 때는 국물에 용해되니 꼭 강불을 사용하세요.

준비 재료(2인분)
면 170g, 소고기 다짐육(민스) 50g, 애호박 30g, 사골육수 600㎖(한 팩에 500㎖로 나온 제품을 샀을 경우 물을 100㎖ 정도 추가한다), 후추, 참기름 약간.

만드는 법
① 두꺼운 냄비에 식용유를 두른다. 소금, 후추로 간을 해둔 소고기를 볶아준다.
② 시판하는 사골육수 600㎖를 추가해서 강불에 한 김 끓여준다.
③ 육수에 간이 부족하면 소금으로 살짝 간을 한 후, 면을 추가하고 면의 두께에 따라 익힘 시간을 조절한다. 일반적인 칼국수 면의 두께로는 2분을 추천한다.
④ 면이 익으면 국수 그릇에 담고 참기름에 살짝 볶아낸 애호박을 고명으로 올려주고 후추를 살짝 뿌려 완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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