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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치 시절 버스도 몰았던 김도균 “챔스리그 도전해야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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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6면

프로축구 수원FC 돌풍을 이끈 김도균 감독. 박린 기자

프로축구 수원FC 돌풍을 이끈 김도균 감독. 박린 기자

프로축구 K리그1은 시즌 33경기를 치른 뒤 파이널A(1~6위)와 파이널B(7~12위)로 나뉘어 우승과 강등 팀을 가린다. 수원FC는 올해 승격한 팀인데도 4위(12승 9무 11패·승점 45)에 올라 파이널A 행이 거의 확실하다.

올해 승격, 파이널A 사실상 확정 #최다 실점해도 더 악착같이 공격 #허드렛일부터 시작해 K리그 돌풍

수원FC는 3월 중순부터 5월 초까지 11위와 꼴찌(12위)를 오갔다. ‘에이스’ 이영재가 부상을 입었고, 오심 피해도 봤다. 그런데 5월 중순부터 쭉쭉 치고 올라와 한때 3위까지 점프했다. 강원도 홍천에서 만난 김도균(44) 수원FC 감독은 “시즌 초반 실점이 너무 많아서 포백을 스리백으로 바꿨다. 미드필더 김건웅을 중앙수비로 내리고, 측면 수비 박주호를 중앙 미드필더로 돌린 게 주효했다”며 “측면보다 중앙 공격에 집중했고, 공수전환을 빠르게 하려 했다. 우리가 최다 실점(46점)을 했지만, 더 넣으려고 했다. 전력에서 밀려도 물러서는 축구는 안 했다. 7월에 울산을 이기고 분위기를 탔다”고 했다. 수원FC는 7월에 선두 울산 현대를 5-2로 대파했고, 8월에는 2위 전북 현대도 1-0으로 잡았다.

시민구단 수원FC의 살림은 열악하다. 리그 12개 팀에서 광주 다음으로 적다. 그런데 올해 국가대표 출신 박주호, 양동현 등 19명을 새로 영입했다. FA(자유계약선수)나 주전 경쟁에서 밀린 선수들을 잘 데려왔다. 김 감독은 “이적료를 주고 데려온 건 이영재와 정동호 정도”라고 했다. 시즌 중 중앙수비 박지수가 입대하자 연봉이 높지 않은 라클란 잭슨(호주)으로 공백을 메웠다.

2000년 올림픽대표팀 시절 김도균. [중앙포토]

2000년 올림픽대표팀 시절 김도균. [중앙포토]

김 감독은 2000년대 초반 올림픽대표팀과 국가대표를 오가며 수비형 미드필더로 뛰었다. 이동국과 함께 ‘꽃미남’이라 불린 그는 앙드레김 패션쇼에 나서고 화보촬영도 했다. 하지만 2006년 29세 나이에 일찍 은퇴했다. 김 감독은 “2004년 일본 교토에서 뛰다 발목 인대 3개가 끊어졌다. 전남 시절인 2006년엔 자꾸 무릎에 물이 찼다. 그해 무릎 수술만 세 번 했다. 축구에 자신은 있었지만, 그런 몸 상태로 뛰면 팀에 민폐였다. 돌이켜보면 지도자 준비를 빨리 하길 잘했다”고 했다.

그는 이듬해인 2007년부터 2년 넘게 서남대 코치를 맡았다. 김 감독은 “도착하자마자 이틀 동안 축구장 잔디를 깎았다. 대형운전면허도 땄다. 선수들을 버스에 태우고 전북 남원에서 강원도 양구까지 운전했다. 길을 잘못 들어서 굽이굽이 6시간 정도 했다. 내게는 다 과정이었다”고 했다.

그는 2010년부터 울산 현대중 감독, 2014년부터 울산 현대 코치, 2017년부터 울산 현대 유스 총괄부장을 거쳤다. 김 감독은 “지도자 꿈을 접으려 했는데, 절묘한 타이밍에 김호곤 수원FC 단장님으로부터 연락이 왔다”고 전했다. 그는 지난해 수원FC 지휘봉을 잡고 1부 리그 승격을 이뤄냈다.

수원FC가 올해 4위 안에 들면 내년 아시아 챔피언스리그 출전도 노려볼 수 있다. 김 감독은 “1차 목표(K리그1 잔류)를 달성해 사실 마음이 편하다. 파이널A에서 스리백과 포백 혼용을 실험해보고 싶다. 마지막까지 좋은 경기력을 유지해 챔피언스리그 진출도 노려보겠다”고 했다. 이어 “난 선수로 성공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인생이라는 게 오르막과 내리막이 있다. 지도자로는 조금씩 올라가면서 발전하고 싶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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