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시론

‘신의 현미경’ 4세대 방사광 가속기, 시너지 극대화하자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3면

이수형 한국표준과학연구원 책임연구원

이수형 한국표준과학연구원 책임연구원

빠른 속도의 전자를 금속에 부딪치면 전자는 충돌로 높아진 에너지를 낮추기 위해 감속하면서 빛을 내는데, 이 빛이 엑스레이다. 1895년 독일의 빌헬름 뢴트겐이 발견했고 지금도 의료 분야에 널리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크기가 작고 불규칙한 사물을 보기에는 너무 어두워 생체의 분자를 보지는 못한다.

엑스레이는 전자의 양을 늘리거나 가속할수록 밝아지지만, 뜨거워져서 사용에 한계가 있었다. 1947년 제너럴일렉트릭(GE)은 고에너지 전자를 원형으로 회전시키면 전자가 방향을 틀면서 1000배 이상의 엑스레이를 발생하는 것을 발견했다. 이 원리로 더 밝아진 엑스레이를 근육에 비추자 분자 기계들의 조합으로 이뤄지는 생명의 움직임을 선명하게 관찰할 수 있었다. 이것이 1세대 방사광 가속기다.

청주에 4세대 원형 가속기 추진
첨단기업들 참여해 효율 높여야

1980년대엔 전자의 발생과 가속 기술을 개선해 또다시 1000배 이상 밝아진 2세대 가속기가 제작됐다. 이 가속기를 쓰게 되면서 단백질 구조를 측정할 수 있게 됐고, 생명을 분자 단위에서 이해하게 됐다. 약품은 우연히 발견되는 것이 아니고 마치 건축물처럼 설계될 수 있었다.

미시 세계를 세밀하게 보려면 빛이 훨씬 더 밝아야 하므로 더 밝은 빛을 위해서는 빛을 모을 필요가 있다. 2000년대에 빛을 모으는 기술이 발전하면서 가속기는 다시 한번 1000배 이상 밝아져 3세대로 올라섰고, 분자 규모를 확실히 볼 수 있는 ‘신(神)의 눈’으로 진화했다. 이제 인간 면역 결핍 바이러스(HIV) 억제제, 화이자와 모더나 같은 mRNA 백신, 더 작고 정교한 반도체 칩, 그리고 에너지·배터리 등의 원천 기술을 실시간으로 보면서 만들어낼 수 있게 됐다. 지금도 전 세계에 설치된 3세대 가속기 26대의 사용권을 얻으려는 과학자들의 발걸음이 분주하다.

한국도 1994년 경북 포항에 3세대 가속기를 설치하고 2011년 업그레이드했다. 2016년 4세대 선형 가속기를 설치했으나 급증하는 수요를 맞추기엔 벅찼다. 지난해 충북 청주에 새로운 4세대 원형 가속기를 건설하는 계획이 확정됐고, 최근 사업추진단이 구성된 것은 우리나라 과학 발전을 위해 천만다행이다.

레이저와 같이 높은 직진성을 갖는 엑스레이를 한군데로 모으면 피사체에 도착하는 빛의 양이 100배 이상 높아져 분자 구조를 세밀하게 관찰할 수 있는 ‘신의 현미경’인 4세대 가속기가 된다. 4세대 원형 가속기는 40여 개 실험을 동시에 수행할 수 있어서 활용성이 대폭 향상되는 이점이 있다. 청주 원형 가속기가 건립되면 4차 산업혁명의 꽃인 반도체 소자, 신소재, 제약 등의 분야에서 중요한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된다. 첨단기술을 놓고 국가 패권주의 경쟁이 치열해지는 최근 상황을 고려하면 아주 고무적이다.

그러나 효율성이 높은 발전소를 만드는 것만으로 전기가 일상생활에 제대로 쓰일 수 없듯 단순히 방사광 광원(光源)을 건설하는 것만으로 활용성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미국의 아르곤 연구소는 가속기와 함께 국립연구원이나 대학 외에도 제약·화학·반도체 등 기업 연구자들의 공동 연구 주제와 공간을 충분히 갖추고 있다.

국내에서도 가속기 운영 역사가 꽤 길지만, 기업의 참여가 제한돼 가속기가 산업에 활용된다는 소식은 과학자들 사이에서도 매우 생소하다. 반도체 산업의 세계적 리더인 삼성이나 SK하이닉스의 참여가 없는 것이 의아하다.

효과적으로 가속기를 운영하기 위해서는 가속기를 통합적인 연구 인프라로 활용해야 한다. 필요한 실험을 수행할 수 있는 연구시설이 있어야 하고 장비·소프트웨어·분석까지 전담할 수 있는 고급 전문인력 확보가 필수적이다. 기업의 참여도 꼭 필요하다. 체계적인 연구 공동체가 조기에 구축돼 4세대 가속기 사업이 국가 발전의 원동력이 되길 바란다.

※  외부 필진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