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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시론

노벨 평화상을 언론인이 수상한 까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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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김대호 인하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

김대호 인하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

올해 노벨 평화상은 필리핀 언론인 마리아 레사(58)와 러시아 언론인 드미트리 무라토프(60)가 공동 수상했다. 언론인이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것은 독일이 1차 세계대전 뒤 비밀리에 재무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폭로한 독일인 카를 폰 오시에츠키(1889~1938)가 1935년에 수상한 지 86년 만이다.

최근 몇 년간 노벨 평화상의 가치가 크게 하락했다는 지적이 많았는데, 올해는 평화상의 가치를 제대로 살린 것 같다. 사실 노벨 평화상을 두고 논란이 적지 않았다. 대표적 사례가 2019년 수상한 아비 아머드 에티오피아 총리다. 그는 2018년 집권하자 정치범 석방 등 민주적 개혁을 추진하고 에리트레아와 국경분쟁을 해결한 공로로 수상했지만, 이후 소수민족을 탄압하고 집단학살과 성폭력을 방치했다. 평화와 거리가 먼 독재 행태를 보여 ‘노벨 평화상의 굴욕’이란 비난을 받았다.

필리핀·러시아 언론인 공동 수상
표현의 자유를 위해 반독재 투쟁

올해 수상자 마리아 레사는 CNN 기자 출신으로 온라인 탐사보도 미디어인 ‘래플러(Rappler)’의 공동 설립자다. 로드리고 두테르테 필리핀 대통령이 마약 소탕을 내세워 인권을 유린하고 가짜뉴스를 퍼뜨리며 비판자를 탄압한 것을 신랄하게 보도했다. 권력 비판 때문에 체포되는 등 정치적 탄압을 받았지만 굴하지 않았다. 또 다른 수상사 드미트리 무라토프는 러시아 독립언론사인 ‘노바야 가제타(Novaja Gazeta)’ 공동 설립자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권력 집중, 부패 의혹, 불법 행위, 선거 부정 등을 지속해서 보도했다. 지난 20년간 정부 비판 보도 때문에 이곳 언론인 6명이 총격 등으로 희생됐지만 흔들림 없이 부정부패를 보도했다. 무라토프는 “언론의 자유는 부패와 독재 권력을 막는 수단”이라고 소감을 밝혔다.

노벨위원회는 “수상자들이 필리핀과 러시아에서 표현의 자유를 위한 용감한 싸움을 벌였다”고 평가하면서 언론의 자유를 지키는 것이 인류 보편의 가치임을 분명히 했다.

올해 노벨 평화상이 언론인들에게 수여된 것은 매우 시의적절하다고 본다. 전 세계적으로 민주주의의 위기와 언론의 위기가 심각한 상황이기 때문이다. 권위주의가 다시 득세하고 가짜뉴스 문제가 커다란 사회 문제가 되고 있다. 소셜미디어가 확산하면서 의도적으로 퍼뜨린 허위 정보가 여론을 왜곡하는 바람에 언론의 신뢰도가 떨어지고 있다.

한국도 마찬가지다. 문재인 정부와 여당은 언론중재법을 개악하려고 해 국제적으로 비판을 받았다. 언론의 고의 또는 중과실로 인한 허위·조작 보도에 대해 최대 5배의 징벌적 손해배상을 신설하는 내용 등이 언론의 자유를 크게 위축할 것이란 비판을 받았다.

유엔 인권이사회는 지난 8월 한국의 언론중재법 개정이 언론 표현의 자유에 대한 권리를 심각하게 제한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국경없는기자회(RSF), 국제기자연맹(IFJ), 세계신문협회(WAN) 등도 깊은 우려를 표명했다. 올해 노벨 평화상은 한국의 언론중재법 같은 권력의 언론 자유 제약 시도에 경종을 울린 중요한 시금석이다.

이번 노벨 평화상은 언론사와 언론인에게도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계기가 되기에 충분하다. 언론의 위기는 언론 내부에서도 온다. 언론인이 특정 권력과 밀착하거나 특정한 이해관계의 대변자가 됨으로써 권언유착의 불명예를 자초하기도 한다. 예컨대 최근 경기도 성남 대장동 게이트에서 보듯 현직 언론인이 부동산 개발 관련 자산관리회사(AMC)의 대표를 맡아 언론인의 윤리에 큰 오점을 남겼다.

노벨 평화상이 언론의 자유를 위해 헌신하는 언론인에게 주어진 의미를 언론과 권력자 모두 제대로 새겨야 한다. 그것은 민주주의와 항구적인 평화의 전제 조건인 표현의 자유 수호가 세계의 공통된 규범이라는 사실을 웅변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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