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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안경 물범, 고무 물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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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천인성 기자 중앙일보 모바일24부디렉터(EYE)
천인성 EYE디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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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대서양의 섬나라 영국엔 회색물범(Halichoerus grypus)의 서식지가 여럿 있다. 대서양바다표범이라고도 부르는데, 이름처럼 몸빛은 회색이고 배엔 짙은 반점이 있다. 동그란 눈에 긴 수염이 달린 모습이 귀여워서인지 시민들의 관심과 사랑을 받고 있다.

그런데 최근 쓰레기를 몸에 낀 채 사는 회색물범이 잇따라 발견됐다. 지난달 말 더타임스 등엔 파란색 수영용 물안경이 목 부위에 낀 물범을 찍은 사진이 게재됐다. 언뜻 동물이 주인공인 만화의 한 장면처럼 보이나, 알고 보면 해양 쓰레기의 심각성을 돌아보게 하는 ‘웃픈’ 사진이다. 환경단체들은 “이런 쓰레기는 시간이 지나면 동물 살에 박혀 부상을 일으키고 서서히 죽음에 이른다”고 경고했다. 해변 산책 중 이 물범을 촬영한 50대 사진작가는 “인간의 부주의가 생태계에 얼마나 치명적인지 보여준다”고 안타까워했다.

‘물안경 물범’이 알려지기 일주일 전쯤엔 ‘고무 물범’도 발견됐다. 수중촬영 다이버가 잉글랜드 북동부 판 제도에서 찍은 영상을 SNS에 올렸는데, 고무타이어로 보이는 검은색 물체를 목에 낀 물범이 바닷속을 헤엄치는 장면이 담겼다. 다이버는 “며칠 동안 계속 찾아가 고무를 빼려 했으나, 너무 꽉 껴있어 되레 다칠까 봐 포기했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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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지에서 흘러간 쓰레기, 버려진 어구가 생태계를 위협하는 상황은 삼면이 바다인 한국도 마찬가지다. 지난달 제주 서귀포시 대정읍 앞바다에선 등지느러미에 낚싯줄이 걸린 채 헤엄치는 남방큰돌고래가 발견됐다. 시간이 지날수록 낚싯줄로 인한 상처가 커지고 있다. 제주에선 2월과 8월에도 지느러미에 낚싯줄·낚시추가 걸린 채 사는 돌고래가 발견됐다.

우리나라 바다로 유입되는 쓰레기는 한해 14만5000톤에 이른다. 쓰레기 문제는 동물뿐 아니라 인간의 건강, 산업에도 직결된다. 해양수산부에 따르면 선박 사고의 10%가 바다를 떠다니던 쓰레기 탓에 발생했다. 버려진 그물에 갇혀 어류가 폐사하는 ‘유령어업’으로 인한 피해가 매년 어획량의 10%(3800억원)에 이른다. 가장 두려운 건 미세 플라스틱이다. 바다에 흘러든 플라스틱은 썩지 않고 잘게 부서져 떠돌고, 이를 먹이로 오인한 어패류에 축적돼 포식자인 사람의 몸에 들어온다.

정부는 지난 5월 ‘제1차 해양폐기물 관리 기본계획’을 발표했다. “2030년 해양 플라스틱 쓰레기 60% 감소, 2050년 제로”란 목표를 걸었다. 하지만 해양쓰레기의 절반에 이르는 폐어구 관리와 직결된 수산업법 개정안은 아직 국회 본회의에 상정되지 않은 상태다. 물범뿐 아니라 사람의 목까지 옥죄는 올가미, 해양쓰레기 문제를 더는 방치해선 안 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