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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밥뉴스] 이게 좋은 부모? 아이 망친다…'인에이블러' 진단법

중앙일보

입력 2021.10.13 06:00

업데이트 2021.10.13 19:28

바쁜 당신을 위한 세 줄 요약
· '인에이블링'은 아이가 요청하지 않아도 도와주는 걸 말합니다. 그렇게 하면 아이가 스스로 할 수 있는 기회를 박탈합니다.

· 인에이블러 부모가 되지 않으려면 기다릴 줄 알아야 합니다. 스스로 충분히 기다렸다고 생각하는 것의 2~3배 기다려야 합니다.

· 기다릴 줄 아는 부모가 되기 위해서는 누구의 부모가 아닌 나 자신의 삶을 돌보고 살아야 합니다.

단맛이 오른 제철 사과를 아이 입에 넣어주고 싶은 것이 부모 마음. 그런데 언제까지 사과를 깎아 아이 입에 넣어줘야 할까. 사과를 깎는 법은 언제쯤 가르쳐줘야 할까.

손을 베지 않도록 과도를 쓰는 법을 익히고, 언제든 사과가 먹고 싶을 때 깎아 먹을 수 있는 아이로 자라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부모의 일이다. 부모가 맞닥뜨린 양육이란 현실은 소소한 듯, 중요한 나날로 켜켜이 이뤄져 있다. 이 일상 속에서 아이를 사랑한다면서 잘못된 부모의 의사선택으로 아이에게 독이 되는 경우가 있다. 사랑한다면서 되레 상대방을 망치는 사람을 '인에이블러(enabler·조장자)라 부른다. 『나는 내가 좋은 엄마인 줄 알았습니다』(앤절린 밀러 지음 ·이미애 옮김, 월북)에서 나온 말로, 원서는 30여년 전 출간됐다. 인에이블러에 대한 이야기를 지난달 24일 김태경 우석대 상담심리학과 교수와 줌으로 나눠봤다.

김태경 교수(우석대 상담심리학과)는 "아이가 요청하지 않은 도움을 먼저 주는 건 아이가 스스로 뭔가를 할 수 있는 기회를 박탈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김성태 기자

김태경 교수(우석대 상담심리학과)는 "아이가 요청하지 않은 도움을 먼저 주는 건 아이가 스스로 뭔가를 할 수 있는 기회를 박탈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김성태 기자

인에이블러, 우리 말로 콕 짚어 표현이 어려운데요.
번역서가 출간될 때 우리 말로 뭐로 하면 좋을까 고민을 같이 많이 했어요. (※김 교수는 이 책의 추천사를 썼다) 조장자라고 할 수 있는데 이 말이 어려워요. 간단하게 생각하면 인에이블러는 ‘상대방이 원치 않는데 내 마음 편하자고 해주는 돌봄’이다. 청하지 않는 돌봄을 주는 것이죠. 가족이라는 이유, 연인이라는 이유로 상대방이 청하지 않는데도요. 제3자면 괜찮은데, 친밀한 관계를 맺은 사이에선 일방적인 도움이 이어지면 의존하게 만들 수 있거든요. 우울한 사람에게 계속 우울한 사람이 되도록 허용해주는 것인데, 장기적으로는 상대방이 극복해보는 경험을 하지 못하게 돼요. 그래서 인에이블러가 없으면 살아갈 수 없게 되고요.
부모 입장에선 '인에이블러'의 모습이 어떤 걸까요. 책을 읽으며 나는 어떤 부모인가, 인에이블러이진 않나 생각을 해보기도 하게 되는데요.
부모는 아이가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면 참고 견뎌야 하는데요. 사실 그게 쉽지 않아요. 자꾸 뭔가 해주고 싶죠. 그래야 나는 선량한 엄마라는 감각을 느낄 수도 있어요. 그런데 결과적으로는 아이에게 좋지 않은 것 같아요. 부모는 본능적으로 아이를 보호하고 싶은 경향이 있어요. 모든 부모가 그런 면이 있어요. 그런데 자원이 풍부하다 보니, 여유가 되는 가정에선 이를 더 과잉으로 할 수 있죠. 

※『나는 내가 좋은 엄마인줄 알았습니다』를 쓴 앤절린 밀러가 든 인에이블러(enabler) 부모의 모습은 이렇다. 수시로 수업을 빼먹는 아들의 잘못을 덮어주려고 학교에 전화를 하는 부모가 대표적이다. 장기적으로 최선의 해결책은 수업 빼먹기를 중단하는 일이지만, 부모는 다른 선택을 하는 것이다. 아이에게 집안 일을 시켰는데 아이가 “나중에 한다”고 하고는 하지 않을 때, 아이가 불편하거나 힘들어 보인다는 이유로 부모가 지속적으로 이를 직접하는 행위들이 간단한 인에이블러의 사례로 꼽힐 수 있다. 건강한 상호의존 관계가 아니라 기생적인 의존 관계를 형성해, 아이 스스로 선택하고,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기 어렵도록 하는 부모를 지칭한다.

과잉보호랑 인에이블링이 비슷한 건가요?
과잉보호가 인에이블링 중 하나긴 한데, 이 둘은 좀 달라요. 인에이블링은 요청하지 않아도 해주는 겁니다. 아이로부터 기회를 박탈하는 데 핵심이 있어요. 과잉보호는 뭔가를 해줄 때 불편함이 없도록 모든 걸 챙겨주는 것이고요. 아이는 스스로 무언가 해서 느끼는 즐거움이 있어야 하거든요. 인에이블링은 그것 자체를 빼앗는 거죠. 3~4살만 되어도 ‘내가 할래! 내가 할래!’해요. 실패도 해보고 기고만장한 표정도 지어 보고요. 별거 아닌데 뿌듯한 경험이 누적되어야만 인생에서 소소한 좌절을 감당할 용기를 갖게 되거든요. 그래야만 더 많은 도전을 하게 되고요. 근데 이 기회를 차단하면 어떻게 될까요. 과잉보호는 한편으로는 기회를 많이 제공하긴 해요. 하지만 인에이블러는 아이가 자기에게 의존하게 만들어요. 
김태경 교수(우석대 상담심리학과)는 "스스로 깨달을 때 효과가 더 크고 오래 간다"며 "참을 수 있는 최대치보다 2~3배 더 참고 기다리라"고 조언했다. 김성태 기자

김태경 교수(우석대 상담심리학과)는 "스스로 깨달을 때 효과가 더 크고 오래 간다"며 "참을 수 있는 최대치보다 2~3배 더 참고 기다리라"고 조언했다. 김성태 기자

과잉보호보다 인에이블링이 나쁘다는 건가요?
어느 것이 더 나쁘다고 단정 짓긴 어려워요. 어떻게 보면 과잉보호가 더 나쁠 수 있어요. 과잉보호로 큰 아이들은 나르시시즘이 강하거든요. 좌절을 경험하고 포기하고, 세상과 타협하는 과정이 없거든요. 유명 권력자의 안하무인 행동, 오만한 재벌가 자제들의 모습은 나르시시즘에 가까워요. 세상이 자기 마음대로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강하니까요. 
인에이블러가 된 부모, 왜 나쁠까요?
기성세대 입장에서 알아야 할 것은 아이의 의사를 존중해야 한다는 겁니다. 우리는 아이가 판단을 못 해서, 미숙하고 어리석은 결정을 내릴 것이라고 여기거든요. 실제로 아이들이 어리석은 결정을 또 꽤 해요. 하지만 이걸 피하자고 부모가 다른 결정을 내리자고 한다면, 아이가 원래 자기 의사 결정이 잘못됐다는 걸 배울 기회가 없어요. 특히 사춘기 때요. 아이에게 '도움이 필요하니?' 묻고, 필요하다고 답을 하면 그때 도와주어야 해요. 그러기 전에 도와줘서 스스로 해볼 기회를 박탈하면 문제가 됩니다.
아이가 요청할 때까지 기다려주기가 쉽지 않을 것 같은데.
사실 심리치료 장면에서도 중요한 게 이거에요. 치료를 하다 보면 '이 사람의 문제는 이거구나' 알아차릴 때가 있어요. 하지만 말해주지 않아요. 말해줄 땐 충분히 스스로 준비가 되었을 때 그 말을 해줘요. 그 전엔 받아들이지 못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에요. 근데, 이걸 기다려주다 보면 (내담자가) 알아차릴 때가 있어요. 그럼 정말 효과가 오래가요. 부모 입장에선 지식과 경험이 있는데, 아이들은 귓등으로 들어요. 
김태경 교수(우석대 상담심리학과)는 "아이의 부모로서의 삶이 아니라 내 삶을 살아야 기다릴 수 있다"고 말했다. 김성태 기자

김태경 교수(우석대 상담심리학과)는 "아이의 부모로서의 삶이 아니라 내 삶을 살아야 기다릴 수 있다"고 말했다. 김성태 기자

기다려 줄 줄 아는 부모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내려놓으면 됩니다. 참는 것이 부모의 가장 중요한 역할이에요. 해주고 싶은 것은 본능인데, 이 욕구를 참아내는 것. 이것이 부모의 역할입니다. 잘 참다가 갑자기 ‘왜 우리 애는 해달라고 말하지 않지?’ 하면 안 돼요. 사실 아이가 말하게 하려면 그간 (부모와) 쌓아 놓은 역사가 있어야 해요. 
그럼 어떻게 하면 잘 참을 수 있나요? (웃음)
부모님 입장에서요, 내가 최선을 다해 참았다고 생각한 것의 2~3배는 더 참아야 해요. 아이가 일어나 걸어 다니기 시작하면 부모는 '이제 아이는 내 것이 아니구나' 하고 인정해줘야 해요. 아이를 인정해주면, 부모에게도 ‘내 삶’이 생깁니다. 아이와 나를 분리해서 생각하고 살자는 말이 이 뜻이에요. 
아이와 나를 분리해 생각하는 것이 어렵지 않습니까?
정당하지 않은 소유욕이에요. 아이가 나의 일부가 아닌데도 일부라고 생각하면, 어떤 면에서는 나와 똑같이 생각할 것이라고 착각해요. 내가 해주고 싶으면 아이가 원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게 인에이블링으로 가는 겁니다. 요즘 중2병 이야기를 많이 하잖아요. 아이가 강력하게 목소리를 내는 것이거든요. 그 전에도 아이가 목소리를 냈을 겁니다. 근데, 그걸 약하게 했던 거에요. 사춘기가 되면서 ‘반란’에 가까운 목소리를 내니까, 부모가 그제야 내려놓는 것이거든요. 부모님들, 좀 더 내려놓으세요. (웃음)
혹시 내가 인에이블러 성향이 있나 돌아보고 싶은 독자를 위해 자기 진단법 같은 건 없을까요?
혹시 아이가 청하지 않은 도움을 주고 있지 않은가를 봐야 해요. 부모라는 이유로, 아이의 삶을 내가 책임져야 한다는 마음을 갖고 있진 않은가를요. 사실은 이게 아이가 원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고 싶은 것이거든요. 아이는 부모를 닮아요. 우리가 놓치는 부분이 이겁니다. 부모가 갈등이나 스트레스를 해결하는 방식을 아이들이 학습해요. 
김태경 교수(우석대 상담심리학과)는 "나쁜 것보다 좋은 것이 좀 더 많으면 충분히 좋은 엄마"라고 말했다. 김성태 기자

김태경 교수(우석대 상담심리학과)는 "나쁜 것보다 좋은 것이 좀 더 많으면 충분히 좋은 엄마"라고 말했다. 김성태 기자

어렵네요. 좋은 부모, 어떻게 될 수 있을까요?
'충분히 좋은 엄마(good enough mother)'라고 하는데, 이만하면 좋은 부모란 뜻이거든요. 핵심은 나쁜 것보다 좋은 것이 좀 더 많으면 된다는 데 있어요. 부모도 욕구를 가진 존재잖아요. 좋은 부모란 기준을 만들고 하면 나는 부모로서만 존재해야 한다는 착각을 하게 해요. 우리는 누군가의 부모기도 하지만, 누군가의 이웃, 친구, 자식이기도 하잖아요. 근데 안타깝게도 우리가 부모가 되고 나면 오로지 부모로서의 나만 생각하게 되는 것 같아요. 그래서 좋은 부모가 되겠다고 고군분투하고, 결과적으로 좋은 부모가 못 되기도 해요. 심리학자들은 그래서 아이와 나를 분리해 바라볼 수 있는 것을 꼽아요. 부모, 썩 나쁘지 않으면 괜찮은 거거든요. 남편, 나, 아이를 분리해서 각자도생하라는 것이 아니라, 본질적인 나에 대한 깨달음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아이가 원하는 건 원하는 것이고, 아이가 싫어하는 것은 싫어하는 것이라고 인정해주는 것이 부모로서 중요하고요. 
마지막으로 인에이블러에서 탈출할 수 있는 법이 있을까요?
부모는 자식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하잖아요. 좋은 엄마, 나쁜 엄마 프레임을 갖고 있기도 하고요. 위인전, 교과서에 있는 부모를 가져다 놓고 끊임없이 나를 깎아내리기도 해요. 저는 가끔 아동학대를 하거나 어떤 면에서는 적절하지 않은 양육 태도를 가진 부모를 만나기도 해요.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분들이 변하기 위해 저를 찾아왔다는 겁니다. 그럼 변화가 시작된 거죠. 요즘 ‘나는 나쁜 부모다’라고 자책하는 분들이 많아요. 그런데 우리가 스스로를 너무 평가하는 건 아닌가란 생각도 들어요. 제가 직접 하면서 효과를 본 방법이 있는데, ‘내가 나의 삶을 살고 있나?’ 하고 질문을 하는 거예요. '사회적 나'를 신경 쓰는 것이 아니라, 나로서의 삶을 잘살고 있는 것인지를 생각해보는 거예요. 내 삶이 윤택하지 않은데, 누구의 무엇으로서의 삶이 과연 윤택할까요? 전 아닐 거라고 생각해요. 꼭 한 번 생각해보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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