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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시평

북한의 외화흡수 작전과 김여정의 ‘실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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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김병연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장·경제학부 교수

김병연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장·경제학부 교수

9월 말 김여정 담화의 키워드는 남한 정부의 ‘실천’이었다. 얼마 후 조선중앙통신도 “남조선 당국은 선결되어야 할 중대 과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적극 노력해야 할 것”이라며 재차 ‘실천’을 강조했다. 북한은 다급해졌다. 2019년 하노이 회담 결렬 후 김정은은 미국이 새로운 계산법을 들고 와야만 협상할 것이라고 말했다. 2020년 7월에 김여정은 “제재를 가해온다고 우리가 못사는 것도 아닌데 무엇 때문에 미국에 끌려 다니겠는가”라며 “미국이 바쁘지 우리는 바쁘지 않다”고 여유를 부렸다. 그런데 지금은 남한이 적극적으로 행동하라고 압박한다. 기다림이 초조함으로 바뀐 것이다.

북한의 시간 셈법을 바꾼 것은 경제다. 필자의 추정에 따르면, 2017∼19년 북한 주민의 가계소득은 이전 3년 대비 25% 줄었으며, 제재의 충격을 가장 적게 받는 시멘트 산업의 지난해 생산량도 2015년 대비 25% 감소했다. 북한 정권은 초기엔 제재의 영향을 과소평가했지만 이젠 그 무게를 절감하고 있다. 더욱이 코로나 사태까지 겹쳐 경제난은 훨씬 심각해졌다. 가장 긴급한 문제는 정권이 사용할 수 있는 외환보유고가 빠른 속도로 감소하는 것이었다. 외환보유고가 고갈되면 무역이 재개되더라도 경제의 생명줄인 석유와 생필품을 수입할 수 없다. 김정은 일가를 위한 소비품과 권력층에게 지급할 선물도 수입할 수 없다. 제재를 더 버텨내려면 주민 보유 외화를 정부로 흡수하는 것이 필수적이었다.

남한 실천을 강조한 김여정 담화
오히려 북한의 초조함 담고 있어
민간 외화를 흡수하려는 시도가
북이 처한 곤경을 뚜렷이 보여줘

코로나 방역 조치인 무역 봉쇄가 ‘외화흡수 작전’을 펼 절호의 기회였다. 하지만 강제로 빼앗으면 주민의 반발이, 드러내놓고 작전을 펴면 제재 효과를 더 확신할 미국의 대응이 염려됐다. 따라서 시장을 활용하여 조용히, 그리고 값싸게 주민 외화를 사들일 방법을 궁리했다. 무역이나 밀수가 막혀 있으니 주민이 외화를 사용할 수 있는 곳은 북한 내 시장뿐이었다. 만약 시장에서도 달러나 위안화를 사용할 수 없다면 외화 가치는 크게 떨어질 것이다. 그러나 2009년 화폐개혁 때처럼 외화 사용을 명시적으로 금지할 수는 없다. 마치 시장의 수급으로 인해 달러가 절하되는 양 가장하는, 이른바 ‘어둠의 하락 작전’을 펴야 했다. 지금까진 작전이 먹혀들었다. 지난해 10월, 1달러에 8000원, 1위안에 1200원 하던 환율이 지금은 각각 5000원, 700원으로 떨어졌다.

문제는 2단계, 즉 주민 보유 외화를 ‘조용히’ 정권 곳간으로 옮기는 ‘어둠의 이동 작전’이다. 싼값으로 달러를 시장에서 암암리 매집하고 있지만 지금 환율로 외화를 팔려는 주민은 많지 않다. 최근 북한 정부가 발행한 ‘돈표’는 이런 상황에서 나온 외화흡수 방안이다. 예전에도 돈표는 있었다. 외화를 가진 사람이 북한에서 물건을 사려면 이 돈표와 교환해야 했기 때문에 ‘외화와 바꾼 돈표’라고 불렀다. 그런데 이번에는 ‘외화와 바꾼’이란 말을 아예 빼고 돈표를 찍었다. 발행의 목적이 외화 부족을 메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주민에게 일종의 재난지원금을 지급하려는 양 가장하려 했다. 그러나 정말 재난지원을 위해서라면 현금으로 지급하면 될 것을 비용까지 들이며 돈표를 찍을 이유가 없다. 결국 돈표를 자발적으로 외화와 바꿀 주민은 많지 않을 것이다. 만약 강제력을 발동한다면 ‘대낮의 작전’이 되어 북한의 아킬레스건이 대내외에 다 드러날 것이다.

비핵화 압력에 맞선 북한의 전술은 ‘숨기기, 압박하기, 흔들기’다. 북한의 곤경을 숨기고, 무기 개발 속도전을 벌여 한미를 압박하면서, 한국을 흔들어 제재를 허문 상태에서 유리한 조건으로 미국과 협상하려는 속내다. 이에 대응하는 우리 정책은 북한의 상황을 정확히 아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 북한의 치트키를 우리가 꿰뚫고 있다는 것을 김정은이 알아야 제대로 된 비핵화 협상을 할 수 있다. 우리는 북한 행동의 이유를 드러내고, 군사적 억지력을 키우고, 철저한 한미 공조 가운데 움직여야 한다.

북한이 단지 대화에 나오는 대가로 제재를 해제하자는 제안은 미숙하고 성급하다. 비핵화 협상은 빨리 시작되는 것이 좋다. 비핵화의 진전에 맞추어 제재도 점진적으로 완화할 필요가 있다. 그 과정에서 북한 스스로 미래를 위해 핵을 내려놓는 결단을 하도록 국제적 환경도 조성해야 한다. 그러나 북한을 협상에 불러낼 목적으로 제재를 해제하면 오히려 한미의 협상력만 떨어진다. 그 상태에서 북한이 버티면 실제 핵보유국이 될 수도 있다. 일부에서는 제재 해제라는 인센티브를 먼저 주되 스냅백(snapback) 조항을 넣자고 한다. 북한이 협상에서 비핵화를 거부하면 다시 제재를 부과하면 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미·중 갈등이 첨예화된 지금, 이런 제안은 이미 철 지난 레퍼토리다.

제재로 경제난이 지속되는 한 북한은 협상 트랙을 벗어날 수 없다. 김여정 ‘실천’의 역설적인 고백이다. 문재인 정부는 어떻게 빨리 협상을 시작할지에 관심을 집중하고 있다. 그러나 시작보다 성공이 더 중요하다. 잘못 시작하면 협상을 그르친다. 정확한 지식으로 때를 읽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