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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박현도의 한반도평화워치

강대국에 둘러싸인 아프간, 분열로 국민 고통 이어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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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아프가니스탄이 주는 교훈

이슬람 무장단체 탈레반이 정권을 재장악하면서 지난 8월 16일 수도 카불 공항에서 아프가니스탄을 탈출하려는 사람들이 항공기 탑승 계단에 매달려 혼잡을 이루고 있다. [트위터 캡처]

이슬람 무장단체 탈레반이 정권을 재장악하면서 지난 8월 16일 수도 카불 공항에서 아프가니스탄을 탈출하려는 사람들이 항공기 탑승 계단에 매달려 혼잡을 이루고 있다. [트위터 캡처]

미군이 철수하면서 탈레반이 20년 만에 아프가니스탄을 다시 장악했다. 탈레반과 반탈레반 저항 세력의 무력 충돌, 탈레반과 타지키스탄 간 긴장, 탈레반과 이슬람국가(IS)의 세력 다툼, 주변 열강의 움직임, 국제사회의 부정적 반응 등 풀어야 할 숙제가 남아 있지만, 1979년 12월 소련의 침공으로 시작한 42년 전쟁의 참화라는 역사의 어두운 한장을 불안하게나마 일단은 닫았다.

오늘날 아프가니스탄의 모습은 1907년 영국과 러시아가 만들었다. 아프가니스탄과 중앙아시아를 두고 양국이 벌인 그레이트 게임의 결과다. 두 나라는 직접 충돌을 피하고자 아프가니스탄을 완충지대로 두었다. 중국이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 와한회랑도 영국령 인도와 러시아령 타지키스탄이 서로 직접 맞대는 것을 피하고자 아프가니스탄으로 붙인 것이다. 영국과 세 번의 전쟁을 치른 아프가니스탄은 1921년에 영국으로부터 독립했다.

탈레반은 이슬람의 이름으로 국민 괴롭히는 데 능할 뿐
다민족 국가인 아프간, 통합 비전 갖춘 지도자 없어 실패
강대국에 둘러싸인 나라가 살아남는 최선은 국민 통합
종교인이 종교보다 나라 앞세운 3·1운동 전통 계승해야

주변 강대국에 둘러싸인 완충지대라는 점에서 한반도와 아프가니스탄은 지정학적으로 비슷하다. 그런데 아프가니스탄은 한반도보다 3배나 더 크다. 해발 5000~7000m에 이르는 힌두쿠시 산맥 때문에 국토의 75%가 산악지대이고, 해발 2000m가 넘는 곳이 50%에 달하는 험난한 지형의 나라다. 바다가 없는 내륙국가라서 한반도처럼 해양 세력과 대륙 세력이 충돌하지는 않지만, 중국·파키스탄·이란·투르크메니스탄·우즈베키스탄·타지키스탄 등 여섯 나라와 국경을 맞대고 있다.

다민족 국가로, 국민 통합을 제대로 이루지 못한 점도 우리와는 다르다. 2019년 세계은행 통계에 따르면 총인구는 약 3800만 명으로, 모두 14개의 민족이 산다. 파슈툰족(42%)이 가장 많고, 그 뒤를 타지크족(27%), 하자라족(9%), 우즈벡족(9%) 등이 따르고 있다. 언어는 모두 10여 개가 사용되는데, 공식 언어는 다리(Dari)와 파슈토(Pashto)다. 다리는 현대 페르시아어와 무리 없이 소통되는 언어인데, 오랫동안 문화어로 써왔다. 파슈툰족의 언어인 파슈토는 페르시아어 계통이지만, 다리나 페르시아어와 통하지 않는다.

강대국이 설정한 완충지대

탈레반이 지난달 1일 아프가니스탄 제2의 도시 칸다하르에서 미군 철수를 축하하는 장갑차 행진을 벌이고 있다. [EPA=연합뉴스]

탈레반이 지난달 1일 아프가니스탄 제2의 도시 칸다하르에서 미군 철수를 축하하는 장갑차 행진을 벌이고 있다. [EPA=연합뉴스]

아프가니스탄이 지난 반세기에 이르도록 유혈의 역사를 써온 이유는 지정학과 함께 통합을 이루지 못한 채 민족·종교·사상 노선을 두고 내부 다툼을 벌인 데에서 찾아야 한다. 강대국이 설정해 둔 완충지대에서 독선적 권력을 누리려던 지도층 때문에 그렇지 않아도 국민 통합을 이루지 못한 허약한 국가가 더욱 쉽게 무너졌다.

1973년 무혈 쿠데타로 사촌 형이자 왕인 자히르를 쫓아내고 왕정을 폐지한 후 공화정 대통령이 된 친소련 성향의 모함마드 다우드는 나토와 유연한 관계를 맺었다. 소련이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못하자 내정에 간섭하지 말라고 반박하면서 서구·이란·사우디아라비아와 우호 관계를 확장할 것이라고 강경하게 맞섰다. 이에 78년 4월 아프가니스탄의 공산주의자들은 쿠데타를 일으켜 다우드를 죽이고 권력을 잡았다. 1747년부터 아프가니스탄 정치 엘리트로 지배해온 두라니(Durrani) 파슈툰족의 아성이 무너졌다. 이른바 ‘사우르(Saur) 혁명’으로 42년 전쟁 참화의 서막이다.

쿠데타 이전부터 오랫동안 아프가니스탄 공산당은 파르참(Parcham)파와 할크(Khalq)파로 갈라져 대립하고 있었다. 파르참은 깃발, 할크는 인민이라는 뜻으로, 둘 다 공산당 계열 신문의 이름이다. 비파슈툰족 중심으로 구성된 파르참은 점진적인 변화를, 파슈툰족 중심의 할크파는 보다 급진적인 개혁을 주장했다. 소련의 노력으로 77년 이 두 파는 손을 잡았고, 쿠데타로 집권에 성공했다. 그러나 정권을 잡은 할크파는 파르참파를 제거했다. 할크파 정권도 내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급진 마르크스주의를 파슈툰족보다 우위에 두었던 할크파는 파슈툰족 지지 기반을 잃었다.

79년 9월 지도자 타라키(Taraki)를 2인자이자 라이벌인 아민(Amin)이 죽이고 권력을 잡았다. 이에 놀란 소련은 그해 12월 24일 군을 투입해 아민 정권을 무너뜨리고 파르참파의 지도자 카르말(Karmal)을 권좌에 앉혔다. 당시 파르참파는 아민의 독주를 막아줄 것을 소련에 지속적으로 요청했다. 침략 명분은 78년 소련이 타라키의 아프가니스탄과 맺은 우호조약 수호였다. 살려둘 이유가 없었던 아민은 결국 12월 27일 목숨을 잃었다.

쿠데타로 집권한 공산주의 정권은 처음부터 국민의 마음을 사로잡지 못하였다. 떠나간 민심은 반대 세력이 돼 소련 침공 이전부터 무기를 들고 무신론자 정부에 도전하기 시작하였다. 무자헤딘 항쟁의 시작이었다. 미국은 소련 침공 6개월 전부터 이들을 돕기 시작했다. 당시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 브레진스키는 79년 7월 3일 카터 대통령이 반군 지원 명령서에 서명했다고 밝혔다. 당시 소련은 아프가니스탄에서 미국이 비밀리에 벌이는 작전에 맞대응한다고 했는데, 그 누구도 소련 말을 믿지 않았다. 소련의 말은 사실이었다. 소련은 미국이 쳐놓은 덫에 걸린 것이다.

아프간에서 미국의 덫에 걸린 소련

미국은 소련을 전쟁의 사지로 직접 밀어붙이기보다는 전쟁 발발 가능성을 높이고자 노력했다. 소련군이 국경을 넘던 날, 브레진스키는 카터 대통령에게 “이제 우리가 소련에 베트남전쟁을 선물할 기회를 얻었습니다”라고 썼다. 그로부터 10년 동안 브레진스키가 말한 대로 소련은 체제와 제국 붕괴를 불러일으킨 아프가니스탄 전쟁에 기력을 써야만 했다. 소련은 86년 카르말 대신 같은 파르참파의 나지불라를 권좌에 앉히면서 정국을 수습하고자 했으나, 소용없었다. 결국 나지불라의 철군 만류 요청에도 불구하고 89년 2월 아프가니스탄에서 완전히 철수하였다.

소련이 물러간 후 무자헤딘이 단일한 대오를 이루었다면 아프가니스탄은 지금과 달리 탈레반이 등장하지 않았을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무자헤딘은 이슬람의 이름으로 소련에 반대한다는 틀에서만 공감대를 이뤘을 뿐이다. 전사들은 종교적으로는 시아·수니·극단파·중도파 등으로 나뉘었고, 민족적으로도 서로 갈라져 교집합을 찾기 어려웠다. 다양한 색채의 무자헤딘은 결국 무지개를 만들지 못하고 각자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서로 싸웠다. “나는 형제에 맞서고, 나와 형제는 사촌에 맞서고, 나와 형제와 사촌은 세상에 맞선다”는 부족주의가 강력한 아프가니스탄에서 국민 통합은 쉽지 않은 일이다. 탈레반이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파슈툰족이 중심을 이룬 탈레반이 아프가니스탄에서 다수를 차지하는 파슈툰족의 관습과 이슬람을 교묘하게 결합했기 때문이다.

부계에 따라 민족 정체성을 따지는 아프가니스탄에서 공산주의 파르참파의 카르말이 파슈툰족인 모계를 들어 자신이 파슈툰족이라고 한 것도 바로 파슈툰족으로 인정받지 않고서는 통치가 어렵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사실 카르말은 파슈툰의 위상을 끌어내리고자 ‘파슈툰족의 나라’를 뜻하는 아프가니스탄 대신 이 지역을 전통적으로 가리켰던 말 ‘호라산’이나 ‘자유민의 나라’라는 뜻의 ‘아자디스탄’을 제안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움직임은 파슈툰족의 반감을 불러일으키면서 민족 갈등을 부채질하는 역효과를 낳았다.

국민 통합 중요성 일깨운 아프간

강대국에 둘러싸인 나라가 살아남을 수 있는 최선의 방책은 무엇보다도 국민 통합이다. 다민족 국가인 아프가니스탄은 통합의 비전을 갖춘 지도자를 만나지 못해 실패했다. 특히 국민 과반을 차지하진 못해도 다수를 차지하는 파슈툰족이 1893년 영국이 그어놓은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 국경인 듀란드라인의 파키스탄 쪽에 더 많이 살고 있기 때문에 자국 내 파슈툰족 독립운동을 저지하려는 파키스탄이 끊임없이 아프가니스탄 내정에 관여할 수밖에 없는 구조다. 국민 통합이 어렵다면 차라리 현재 판즈시르 저항군의 요구대로 각 민족의 독자적 자치를 인정하는 연방제가 더 낫겠지만, 콧방귀조차 뀌지 않는다. 국민 대다수가 무슬림인 점을 고려해 이슬람을 국민 통합 기준으로 삼으면 될성싶기도 하지만, 종파와 종교관의 차이라는 건널 수 없는 강폭이 넓다. 탈레반을 보라. 이슬람의 이름으로 국민을 괴롭히는 데 능할 뿐이다. 열강 충돌을 막는 완충지대 아프가니스탄을 돌아보면서, 지정학적 요건은 비슷해도 우리가 다민족 국가가 아니라는 점에 안도한다. 다문화가 위험하지 않겠냐고 걱정하는 시선도 있지만, 종교인들이 종교보다 나라를 먼저 앞세우며 1919년 3·1운동을 이끈 전통이 쉽게 사라지지는 않으리라 믿는다. 아프가니스탄은 국민 통합을 큰 교훈으로 우리에게 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