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잠 청했는데"…11시간 전 돌연 취소, 존엄사 힘든 이 곳

중앙일보

입력 2021.10.12 05:00

콜롬비아에서 때아닌 존엄사 논쟁이 일고 있다. 콜롬비아 최초로 시행될 예정이었던 존엄사가 시행 11시간 전 갑자기 취소되면서다. 줄곧 존엄사를 반대해온 가톨릭교계는 환영하고 있지만, 존엄사를 준비해온 환자 측은 “품위 있게 죽을 권리 침해”라고 반발하고 있다.

콜롬비아에서 존엄사 승인을 요청한 마르타 세풀베다(51). [페루 엘코메리치코 영상 캡처]

콜롬비아에서 존엄사 승인을 요청한 마르타 세풀베다(51). [페루 엘코메리치코 영상 캡처]

10일(현지시간) 워싱턴포스트(WP)는 이날 오전 7시로 예정되었던 마르타 세풀베다(51)의 존엄사가 갑자기 승인 취소됐다고 보도했다.

이에 따르면 콜롬비아 존엄사 최종 결정기관인 ‘학제간과학위원회’는 전날 밤 “세풀베다의 존엄사 허가를 취소한다”는 재심의 결과를 통보했다. 위원회는 “세풀베다의 건강이 개선된 것으로 판단했다”며 “존엄사는 말기 질환을 앓고 있는 환자에게만 허용된다는 조건을 충족하지 못했다”고 설명했다.

WP에 따르면 이날 재심의는 당일 오후까지도 예정에 없던 일정이었다. 세풀베다 역시 취소 통보를 받기 전까지 재심의가 열린 사실조차 몰랐다. 재심의가 열리던 시각 그는 생애 마지막 밤이라는 마음으로 잠자리에 들었다고 한다.

세풀베다의 변호인 카밀라 자라밀로는 “그는 휴대전화 요금제 탈퇴를 끝으로 주변 정리를 마친 상태였다”며 “위원회의 결정은 품격있게 죽음을 권리를 침해한 것”이라고 비판했다. 또 다른 변호인 루카스 코레아 몬토야도 “위원회는 세풀베다에게 원치 않은 삶을 살도록 강요하고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가족의 부축을 받으며 걷는 마르타 세풀베다(51). [페루 엘코메리치코 영상 캡처]

가족의 부축을 받으며 걷는 마르타 세풀베다(51). [페루 엘코메리치코 영상 캡처]

WP에 따르면 세풀베다는 2018년 11월 루게릭병 진단을 받았다. 이후 병세가 급속도로 악화하며 극심한 고통에 시달렸다. 무엇보다 일상이 처참하게 망가질 수 있다는 두려움이 그를 짓눌렀다. 고통과 불안에서 도망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던 세풀베다의 눈에 들어온 건 존엄사였다.

콜롬비아는 1997년 존엄사를 허용한 뒤 2015년 이를 법으로 제정해 제도화했다. 하지만 ‘말기질환을 앓고 있는 환자에게만 허용한다’는 등의 높은 기준 때문에 실제 존엄사가 이뤄진 경우는 없었다.

그러던 중 지난 7월 헌법재판소가 “존엄사를 선택할 권리를 확대할 필요가 있다”는 유권해석을 내놓으며 기회가 생겼다. 당시 헌법재판소는 존엄사 대상 선정 기준에 대해 “말기 질환자가 아니어도 극심한 신체적·육체적 통증을 겪는 사람도 심의 대상이 된다”고 해석했다. 세풀베다는 곧장 존엄사를 신청했고, 위원회도 헌법재판소를 참고해 그의 결정을 승인했다.

마르타 세풀베다(51)는 극심한 고통과 불안에서 벗어나기 위해 존엄사를 택했다고 전했다. [페루 엘코메리치코 영상 캡처]

마르타 세풀베다(51)는 극심한 고통과 불안에서 벗어나기 위해 존엄사를 택했다고 전했다. [페루 엘코메리치코 영상 캡처]

하지만 콜롬비아 사회에서는 거센 반발이 일었다. 가톨릭국가인 콜롬비아에서 존엄사는 인정할 수 없는 행위라며 폐지 목소리가 날로 높아졌다. 그때마다 세풀베다는 “나 역시 독실한 가톨릭 신자다. 하느님도 내가 더는 고통받는 걸 원치 않으실 것”이라며 존엄사에 대한 강한 의지를 내비쳤다. 최근에는 TV·라디오 등에 출연해 죽음을 준비하는 과정을 소개하기도 했다.

그는 인터뷰에서 “극심한 고통을 견디며 미래에 대한 불안을 안고 사는 나에게 최선의 선택은 존엄사로 죽음을 앞당기는 것”이라며 존엄사 결정 후 오히려 더 즐겁고, 편안한 하루를 보내고 있다고 했다.

세풀베다의 희망은 이날 위원회의 번복 결정으로 무참히 깨졌다. 일각에선 위원회의 이번 결정이 비판 여론 눈치 보기였던 것 아니냐는 지적도 나온다. 이에 위원회는 콜롬비아 통증 연구소(Incodol)의 검사 결과 지난 7~10월 사이 세풀베다의 상태가 호전됐다는 결과가 뒤늦게 확인돼 갑작스럽게 회의를 열었던 것이라고 밝혔다.

이번 결정에 대해 세풀베다는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다. 대신 그의 아들 페데리코 레돈도 세풀베다(22)는 “어머니는 다시 절망과 슬픔 속에서 고통받고 있다”며 위원회가 결정을 재고해줄 것을 호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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