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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고현곤 칼럼

대장동에 고건 같은 공직자는 없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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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고현곤 기자 중앙일보 편집인
고현곤 논설주간 겸 신문제작총괄

고현곤 논설주간 겸 신문제작총괄

1990년 봄 서울시장실. 정태수 한보그룹 회장이 고건 시장을 찾아왔다. 정 회장은 수서지구에 주택조합 아파트를 지을 수 있도록 토지를 특별분양해 달라고 요청했다. 고 시장이 거절했다. 그러자 정 회장은 슬그머니 안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두툼한 봉투를 꺼내더니 탁자에 올려놨다. 고 시장은 화가 치밀었다. “어디서 수작입니까. 당장 나가요.” 소리치면서 손으로 탁자를 치고 일어섰다. 정 회장은 얼굴이 붉어지면서도 능글맞게 웃고 있었다(고건 회고록 『국정은 소통이더라』).

한보그룹은 89년부터 수서지구 특별분양을 받기 위해 전방위 로비를 벌였다. 청와대는 무슨 영문인지 고 시장에게 특별분양을 해주라고 유언·무언의 압력을 가했다. 검찰은 서울시 도시계획국장을 구속하며 고 시장을 고립시켰다. 고 시장은 2급인 도시계획국장 후임에 김학재 4급 서기관을 앉혔다. 청렴하고 강직한 김 국장을 전격 발탁해 맞선 것이다. 고 시장은 그렇게 직을 걸고 2년을 버텼다. 결국 90년 말 노태우 대통령이 고 시장을 경질했다. 곧바로 서울시의 특별분양 허가가 났다.

고건 서울시장, 91년 수서 사건 때
2년간 한보 특혜분양 막다가 경질
대장동은 성남시 누구도 막지 않아
이재명 자화자찬, 문 대통령 침묵

영원한 비밀은 없는 법. 91년 초 폭로 보도가 나왔다. 정 회장은 물론 뇌물을 받은 여야 의원과 공무원이 줄줄이 구속됐다.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수서 특혜분양 사건이다. 4년 후 전두환·노태우 비자금 수사 때 노 전 대통령이 정 회장으로부터 150억원을 받은 사실이 드러났다. 정치인, 공직자, 기업인이 얽히고설켜 탐욕스럽게 배를 채운 희대의 부동산 스캔들이었다. 그 후에도 한보그룹은 로비를 일삼다 97년 초 파산했다. 한보 사태는 97년 말 외환위기의 시발점이 됐다. 한보 같은 기업을 진작 막았더라면 외환위기 때 충격이 덜하지 않았을까.

수서 사건에서 보듯, 권력형 비리 사건은 한두 사람의 힘만으로 성사되기 어렵다. 사업을 추진하고, 인허가를 내주고, 뒤를 봐주고, 알고도 눈감고. 수많은 사람의 협조와 방조가 있어야 가능하다. 그만큼 관련자와 증인이 많다. 비밀을 유지하기 어렵다. 언젠가는 진실이 드러나게 돼 있다. 수서 인허가권자가 서울시장이었다면 대장동 인허가권자는 성남시장이다. 당시 성남시장은 이재명 경기지사다. 이 지사 관할 구역에서 몇 사람이 상식 밖의 떼돈을 벌었다. 구속된 유동규 전 성남도시개발공사 본부장은 그의 측근이다. 이 지사는 “(대장동 사업의) 설계는 내가 한 것”이라고 했다. 공교로운 우연이 너무 여러 개 겹쳤다. 합리적 의심이 들 수밖에 없다.

“1원도 받은 일이 없다”는 이 지사 입장에선 화가 날 만하다. 그가 강조해 온 ‘부패지옥 청렴천국’에 먹칠하는 일이기도 하다. ‘내 구역에서 몹쓸 짓 한 게 누구냐’며 당장 쫓아가 유동규 일당 멱살이라도 잡아야 이 지사다운 것 아닌가. 대중 앞에서 “바지 한 번 더 내릴까요”라고 할 정도로 거침없는 그다. 과천 신천지 본부에 직접 쳐들어간 그다. 웬일인지 이번엔 그 기세를 찾아볼 수 없다. “내 것부터 다 까보자”고 정면 대응할 줄 알았는데…. 평소와 다른 건 또 있다. 이 지사는 포퓰리스트라는 비난을 받을 정도로 민심의 흐름에 민감하다. 부동산 때문에 상처받은 국민은 대장동 사건으로 폭발 직전이다. 그런데도 그는 공공개발로 5503억원을 건졌다며 “단군 이래 최대 공익환수”라고 자화자찬했다. 그 과정에서 투기꾼들이 활개쳤는데 “사과할 일이 아니라 칭찬받을 일”이라고 했다. 급해서일까. 분노하는 민심을 읽지 못했다. 이 지사답지 않다.

대장동 사건의 본질은 5503억원을 건진 게 아니라 8000억원대의 큰돈이 부당하게 새어나간 것이다. 이재명 캠프가 내놓은 ‘대장동 Q&A’는 논리가 궁색하다. ‘(화천대유 같은) 민간 영역은 자신들이 자율적으로 결정하는 것이다. 민간사업자가 운이 좋았다.’ 운만 좋으면 국민 상대로 장사해 수천억원을 벌어도 괜찮은 건가. 또 Q&A에 ‘화천대유 배당은 이 지사가 성남시장을 그만둔 후 진행된 일’이라는 대목은 책임을 회피하는 듯한 해명이다. 의혹이 커지자 이 지사는 말을 살짝 바꿨다. “(민간 합작을 하려면) 마귀와 거래해야 한다”고 했다. 자신을 마귀와 맞선 피해자로 프레임을 짜며 화천대유와 선긋기를 한 것이다.

화천대유는 누군가 막았어야 했다. 아무도 막을 수 없었다면 국가 시스템에 큰 구멍이 난 것이다. 다들 침묵한 것을 보면 성남시에는 고건이나 김학재 같은 공직자는 없는 것 같다. 그 틈을 비집고 정치인, 법조인, 공직자, 언론인, 기업인들이 대장동에 빨대를 꽂고 단물을 빨아먹었다. 이들은 승자독식 사회의 탐욕스러운 기득권층이다. 민주당 경선에서 승리한 이 지사는 “부패 기득권과의 최후대첩”을 선언했다. 그런데 12년째 성남시장과 경기지사를 하고 있는 이 지사부터 기득권층인지, 아닌지 소명하는 게 먼저다.

이 대목에서 짚고 넘어갈 인물이 문재인 대통령이다. 취임사에서 “특권과 반칙이 없는 세상, 상식대로 해야 이득을 보는 세상을 만들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난처한 곳에 나서지 않는 스타일대로 이번에도 침묵을 지킨다. 청와대는 “엄중하게 지켜보고 있다”고 애매모호하게 한마디 했다. 대통령은 국정 최고책임자인가, 아니면 국정 평론가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