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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경화의 ILO 수장 도전 유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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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정호
남정호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강경화 전 외교부 장관이 유엔 산하 국제노동기구(ILO) 사무총장 선거에 출마했다. 사진은 강 전 장관이 지난달 10일 이화여대 국제대학원에서 특강하는 모습. [연합뉴스]

강경화 전 외교부 장관이 유엔 산하 국제노동기구(ILO) 사무총장 선거에 출마했다. 사진은 강 전 장관이 지난달 10일 이화여대 국제대학원에서 특강하는 모습. [연합뉴스]

인사청문회가 없던 옛날에도 큰 벼슬을 고사하는 이가 적잖았다. 대표적인 인물이 김준엽 전 고려대 총장이다. 독립투사이자 공산주의 연구의 대가였던 그는 전두환 정권 시절, 학생과 교수를 감싸다 총장에서 쫓겨난 대쪽 같은 선비였다. 노태우 이래 김영삼·김대중 대통령 모두 그의 인품에 반해 총리로 모시려고 했다. 하지만 김 전 총장은 한사코 권력을 멀리한 채 고고한 학자로 남았다.

전문성 없으면서 욕심내선 안 돼 #국내 노동계도 "거리 멀다"며 반대 #적임자 아니라며 자진 사퇴해야

 하지만 요즘은 어찌 된 영문인지 결정적 흠이 있음에도 큰 자리를 넘보는 이가 넘쳐 난다. 최근 국제노동기구(ILO) 사무총장 출마를 선언한 강경화 전 외교부 장관이 바로 그렇다. 그의 치명적 약점은 전문성이 전혀 없다는 거다. 강 전 장관의 경력을 살펴보면 노사문제와는 아무 관련이 없음을 알게 된다. 정치외교·커뮤니케이션을 전공한 그는 아나운서·통역·교수 등을 거쳐 외교부와 유엔에서 일했다. 외교관과 유엔 직원으로 일할 때도 노사 관련 전문지식을 익힐 기회가 없었다.
 국내에선 거의 알려지지 않았지만, 강 전 장관은 지난 7월 '유엔여성기구(UN Women)' 수장에 도전했다가 실패했다고 한다. 비록 고배를 마셨으나 이 자리는 그에게 어울리는 느낌을 준다. 여성으로서 여러 고위직에 오른 경험과 그의 친화력 등이 훌륭한 자질이 될 것으로 보이는 까닭이다.

스위스 제네바에 위치한 ILO 본부 전경. [사진=BiiJii]

스위스 제네바에 위치한 ILO 본부 전경. [사진=BiiJii]

 하지만 ILO 수장은 다르다. 노동 문제는 고도의 전문성을 요하는 분야로 관련 법규 및 작업 환경 등 통달해야 할 게 한둘이 아니다. 국내에 공인노무사제가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런데도 전문성 없는 그가 세계 노동자들의 총사령관이 되겠다니 이게 될 말인가. 1919년 설립된 ILO의 전·현직 사무총장 10명은 죄다 노동 전문가였거나 풍부한 관련 경험이 있었다. 특히 영국이 배출한 가이 라이더 현 총장은 최초의 노동운동가 출신으로 노 측 입장을 과감하게 감안하면서 근 10년간 ILO를 이끌어 왔다. 이런 판에 문외한인 강 전 장관이 정부 지원 후보로 나서면 국제사회가 한국을 어떻게 볼지 뻔하다. 오죽하면 지난 3일 민주노총이 "누울 자리를 보고 다리를 뻗어야 한다"며 "강 전 장관의 경험과 비전은 ILO 사무총장 직책과 한참 거리가 멀다"는 논평을 냈겠는가.

지난 2019년 6월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국제노동회의에 참석한 가이 라이더 ILO 사무총장의 모습. [Reuters]

지난 2019년 6월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국제노동회의에 참석한 가이 라이더 ILO 사무총장의 모습. [Reuters]

 지금껏 한국 출신 국제기구 수장은 꽤 있다.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을 비롯해 이종욱 세계보건기구(WHO) 사무총장, 송상현 국제사법재판소(ICJ) 소장, 임기택 세계해사기구(IMO) 사무총장, 김종양 국제형사경찰기구(ICPO) 총재, 백진현 국제해양법재판소(ITLOS) 소장 등이 중책을 맡아 나라의 명예를 높였다. 이들은 모두 해당 분야 전문가다.
 전문성 문제뿐이 아니다. 노동문제 선진국이라고 볼 수 없는 한국에서 후보를 내는 것도 우습다는 지적이 나온다. 실제로 30여 개의 노동·시민단체는 지난 7일 "ILO가 요구하는 최소한의 규범도 지키지 않는 노동 후진국 한국에서 총장 후보를 내는 게 웬 말이냐"고 비판했다. 노사 갈등도 심각하다. 이 분야 평가에선 한국이 최하위권이다. 자칫하면 국내 노동계가 강 전 장관 퇴진 운동을 펼 판이다.
어쩌면 그는 외교부 장관 당시의 경험 탓에 ILO 총장이 돼도 그럭저럭 꾸려갈 수 있을 걸로 여길지 모른다. 큰 착각이다. 그때는 청와대 지시만 따라도 위에선 좋아했을 거다. 하지만 국제기구 수장은 다르다. 이래라저래라 하는 사람이 없는 대신 본인이 어젠다를 만들고 독려해야 한다. 설사 한국의 뛰어난 로비력으로 당선시킨들 뭐가 중한지도 모르는 이가 어떻게 ILO를 끌고 가겠나.
 ILO 총장 자리가 탐난다면 국내에 후보로 내세울 인물이 없는 것도 아니다. 역대 노동부 장관 중에는 해외 경험이 풍부한 전문가가 꽤 있다. 이런 이가 나섰다면 "어이없다"는 반응은 안 나왔을 거다. 그러니 강 전 장관은 이제라도 "나는 적임자가 아니다"며 물러나는 게 옳다. 면장도 알아야 할 것 아닌가.

남정호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남정호 중앙일보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