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서소문 포럼

‘0선 후보’ 못 꺾은 도합 28선들

중앙일보

입력 2021.10.12 0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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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김형구 정치에디터

김형구 정치에디터

“공교롭게도 범여권, 범야권에서 대선 지지율 1위 하고 계신 분들이 둘 다 원내 경험이 없다.”

지난 5월 말 이준석 당시 국민의힘 대표 후보가 경쟁주자들의 ‘경험 부족’ 비판을 반박하며 한 말이다. 그가 거론한 둘 중 이재명 경기지사는 마침내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가 됐다. 기존 경선 흐름을 완전히 뒤엎으며 2위 주자가 더블스코어로 압승한 3차 선거인단 개표 결과, 불복 논란의 불씨가 된 1위 후보 턱걸이 과반 등 초유의 상황에 역시 민심은 늘 절묘하고 무섭다는 걸 새삼 깨닫게 된다. 당 지도부는 ‘이재명 후보 확정’을 11일 재확인하며 변수 발생 가능성을 차단하고 나섰다.

의정경험 없는 이재명 후보 선출
야당 선두 후보인 윤석열도 0선
여의도서 멀수록 청와대 가까워져
조롱받는 의회 민주주의의 위기

나머지 한 명인 윤석열 전 검찰총장은 치열한 선두 다툼 속에서도 국민의힘 경선 4강 컷오프를 1위로 통과했다는 소식이 들린다. 여당이 됐든 야당이 됐든 ‘0선(選) 대통령’ 탄생이 성큼 가까워진 것처럼 느껴진다.

이재명 후보는 성남시장 재선, 경기지사 초선 등 행정가로선 3차례 당선됐지만 여의도 국회에 입성하진 못했다. 2008년 총선 때 성남 분당갑 후보로 출마했다가 낙선했다. 반면 그와 경쟁했던 민주당 예비후보들의 의정 경력은 화려하다. 국회의장 출신 정세균(6선) 의원을 비롯해 이낙연·추미애(5선), 양승조(4선), 이광재(3선), 박용진·김두관(재선), 최문순(초선) 예비후보 등(후보 등록 9인 기준). 도합 28선들이 0선 후보 하나를 못 꺾은 결과가 됐다. 28선이면 국회의원 임기가 4년이니 햇수로만 112년의 의정 경력인데 대선 레이스에선 무용지물이었다. 국민의힘에서도 윤 전 총장이 만일 후보로 확정된다면 홍준표(5선), 유승민·원희룡·박진(4선), 안상수·하태경(3선), 장성민(초선) 예비후보 등 도합 24선들이 0선 후보에 눌린 패장 신세가 되고 만다.

이재명 경기지사가 10일 더불어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선출됐다. 이 후보(오른쪽 둘째)를 비롯한 민주당 대선 경선 예비후보 9명이 7월 3일 첫 합동토론회에 앞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뉴스1]

이재명 경기지사가 10일 더불어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선출됐다. 이 후보(오른쪽 둘째)를 비롯한 민주당 대선 경선 예비후보 9명이 7월 3일 첫 합동토론회에 앞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뉴스1]

1987년 대선 직선제 이후 0선 대통령이 나온 적은 아직 없다. 12대 의원 출신 노태우 전 대통령과 19대 의원 출신 문재인 대통령부터 9선 출신 김영삼 전 대통령에 이르기까지 역대 대통령은 모두 한 차례 이상은 의정 경력이 있다. 국회의원은 개개인이 헌법 기관으로서 국가 운영에 큰 영향을 미치는 정치적 의사결정의 주체다. 국회에서 펼쳐지는 설득과 타협의 정치, 이해관계의 조정, 첨예한 갈등을 풀어내는 협치 등 의정활동 경험은 대통령이 갖춰야 할 중요 덕목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런데 여야 모두 0선 후보가 직업 정치인보다 주목을 받는 세상이 됐다. 여의도에서 멀어질수록 청와대 권력은 가까워지는 게임의 법칙. 이는 조롱받는 의회 민주주의의 위기이자 제구실을 못하는 정당 정치에 대한 유권자들의 엄중한 경고다. 진보와 보수 각 진영에 기댄 여와 야의 악다구니 싸움은 기성 정치에 대한 유권자들의 환멸을 한껏 키웠다. 지난해 총선을 앞두고 급조된 비례 위성정당 막장쇼는 의회 정치를 웃음거리로 전락시켰고 민주주의를 후퇴시켰다.

정치 혐오의 책임 소재는 아무래도 여당인 민주당이 크다고 할 수밖에 없다. 지난해 4월 총선 이후 180석 힘을 앞세워 선과 악의 이분법 속에 입법 독주를 해왔다. 당내에선 ‘원팀’이란 미명 하에 주류와 다른 목소리들을 불허했다. 단일대오와 전체주의는 한끗 차이다. 뼈를 깎는 혁신이나 내부 인재 양성보다 반짝스타 수혈로 승부를 보려 했던 국민의힘도 성난 유권자 눈에 실망스럽긴 마찬가지다.

0선 이력이 대통령직에 중대한 결격사유일 수는 없다. 이재명 후보와 윤석열 전 총장이 0선이긴 하지만 대선 후보로서 차별화된 브랜드와 정체성, 스토리는 평가할 만한 요소다. 미국에서 상·하 양원 경력과 무관하게 주지사 이력만으로 대통령 당선인이 곧잘 나오는 것처럼 대통령 선출 경로가 다양화되는 흐름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그럼에도 묘한 불안감이 가시지 않는 건 국정 지도자는 행정의 영역과는 다른 고도의 총체적 경영 능력이 필요하다는 점, 반대 세력을 더 크게 안는 포용과 협치가 앞으로 더 절실해질 거란 점 때문이다. 0선의 이준석 대표가 지난 6월 당선되자 이 후보는 “기성 정치에 대한 심판”이라는 의미심장한 축하 메시지를 전했고, 윤 전 총장도 덕담 문자를 보냈다. 그런데 각종 실언 논란, 이(이준석)-윤(윤석열) 갈등, 국민의당 통합 무산 등 팡팡 터진 악재에 ‘이준석 리스크’란 말이 회자된 건 이준석호 출범 두 달 만이었다.

만약 내년에 0선 대통령이 현실화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건 ‘좋은 정치인’을 찾기가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다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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