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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만 아이 성학대…85세 개혁교황 '역겨운 성직자' 몰아낼까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프랑스 가톨릭 당국이 5일(현지시간) 지난 70년 동안 프랑스에서만 약 33만 명에 이르는 아동이 3000여 명의 사제와 교회 관계자에 의해 성적으로 학대당했다는 사실을 발표해 전 세계가 충격에 빠졌다. 이에 이른바 ‘개혁의 교황’으로 불리는 프란치스코(85) 교황의 차기 행보에도 이목이 쏠리고 있다.

지난 2018년 일반 알현 도중 깊은 생각에 잠긴 프란치스코 교황. [AP=연합뉴스]

지난 2018년 일반 알현 도중 깊은 생각에 잠긴 프란치스코 교황. [AP=연합뉴스]

여전히 전 세계서 만연한 성추행과 사건 은폐

이날 프랑스24 등 현지 언론에 따르면, 지난 1950년부터 2020년까지 프랑스 가톨릭 교회와 연계기관에서 벌어진 아동 성추행 사건의 가해자 중 3분의 2가 성직자, 피해자 80%는 10~13세 사이 소년이었다.

장 마르크 소베 조사위원장은 기자회견에서 “실제 가해자 숫자는 조사된 것보다 더 많을 것”이라며 “교회가 체계적으로 학대 사실은 은폐해왔다”고 고백했다. 지난 2002년 미국 보스턴 글로브지의 탐사보도팀 ‘스포트라이트’가 수십 년간 수면 밑에 감춰졌던 사제들의 아동 성추행과 은폐를 폭로한 이후에도 상황이 크게 달라지지 않은 것이다.

에릭 드 물랭 보포르 프랑스 주교회의장이 5일(현지 시각) 아동 성 학대 독립조사위원회의 보고서 공개 기자회견에서 발언하고 있다. [AFP=연합뉴스]

에릭 드 물랭 보포르 프랑스 주교회의장이 5일(현지 시각) 아동 성 학대 독립조사위원회의 보고서 공개 기자회견에서 발언하고 있다. [AFP=연합뉴스]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아 달라. 나와의 비밀을 지켜 달라”

지난 1월 독일 쾰른 대교구는 사제들의 성범죄를 조사한 외부 로펌의 보고서와 관련한 기자회견에서 참석 기자들에게 내용을 공개하는 대가로 ‘침묵’을 요구한 바 있다. 당시 쾰른 대교구장 라이너 마리아 뵐키 추기경은 보고서를 통해 1946년에서 2018년 사이 적어도 314명의 피해자가 사제 및 교구 관계자로부터 성폭력 등을 당한 사실을 인지하고도, 수개월 간 이를 공개하지 않았다. 결국 뒤늦은 발표에 쾰른 대성당 앞에는 뵐키 추기경을 풍자하는 조형물이 설치됐다. 미국‧아일랜드‧영국‧칠레‧호주 등 여러 나라에서도 비슷한 논란이 이어지고 있다.

지난 3월 독일 쾰른에서 가톨릭교회에 항의하는 시위의 일환으로 쾰른 대성당 앞에 잠자는 추기경을 묘사한 풍자 조형물이 설치돼 있다. [AP=뉴시스]

지난 3월 독일 쾰른에서 가톨릭교회에 항의하는 시위의 일환으로 쾰른 대성당 앞에 잠자는 추기경을 묘사한 풍자 조형물이 설치돼 있다. [AP=뉴시스]

가톨릭 신자 급감…“믿음이 깨졌다”

사제들의 성비위와 부적절한 대처는 신자들이 믿음을 잃게 만들었다. 소베 조사위원장은 “가톨릭 교회는 가족과 친구를 제외하고 성폭력이 가장 많이 발생하는 곳이었다”고 말했다.

현재 전 세계 가톨릭 신자는 약 12억 명으로 추산된다. 워싱턴포스트(WP)에 따르면 1965년부터 2010년 사이 무슬림 신자는 3배 늘어난 반면, 가톨릭 신자는 70% 증가하는 데 그쳤다. 독일 공영방송 도이치벨레(DW)는 “2019년 한 해에만 독일에서 27만 명이 가톨릭 교회를 떠났다”며 “지난 2010년부터 이어진 성직자들의 미성년자 학대 스캔들로 많은 교인이 믿음을 잃었다”고 전했다. 오는 2060년에는 독일 내 가톨릭 신자 수는 2019년의 절반 수준으로 줄 것이란 예상도 나왔다.

개혁의 교황, 가톨릭 최대 난제 해결할까

사제 성비위 문제는 그간 교황청의 비밀주의를 혁파하며 개혁 행보를 걸어온 프란치스코 교황의 주요 과제가 됐다.

안젤로 베추 추기경이 지난해 9월 25일(현지시간) 로마에서 기자회견을 하면서 곤혹스러운 표정을 한 채 손으로 이마를 긁고 있다. 한때 차기 교황 후보로 꼽혔던 베추 추기경은 교황청 ‘부동산 스캔들’에 연루돼 재판에 넘겨졌다. [AP=연합뉴스]

안젤로 베추 추기경이 지난해 9월 25일(현지시간) 로마에서 기자회견을 하면서 곤혹스러운 표정을 한 채 손으로 이마를 긁고 있다. 한때 차기 교황 후보로 꼽혔던 베추 추기경은 교황청 ‘부동산 스캔들’에 연루돼 재판에 넘겨졌다. [AP=연합뉴스]

지난 2013년 건강 문제로 돌연 사임한 베네딕토 16세의 후임인 프란치스코 교황은 아르헨티나에서 태어난 가톨릭 역사상 첫 미주 대륙 출신 교황이다. 시리아 출신 그레고리오 3세(731년) 이후 1282년 만의 비유럽인 교황이기도 하다. 가톨릭 내부 문제 해결의 시급성을 인지한 콘클라베(추기경단 비밀 투표 회의)가 비주류인 그를 선택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취임 당시부터 “바티칸의 부정부패를 뿌리 뽑겠다”고 선언한 뒤, 교황청 내 금융 부문에 대한 개혁을 추진해왔다. 지난 2019년엔 총 40억 유로(약 5조4201억원) 규모의 교황청 보유 자산을 공개한 데 이어, 올해 7월엔 보유 부동산을 공개했다. 그간 제기된 부패 의혹에 대한 적극적인 조사를 주문했다.

다만 사제들의 성범죄에 대해선 미온적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그는 지난 2018년 성직자 성범죄 은폐 의혹을 받는 후안 바로스 칠레 주교에 대한 논란과 관련해 “그의 주장을 반박하는 확증이 하나도 없다. (은폐 의혹은) 중상모략”이라며 두둔하는 발언을 해 거센 항의를 받았다. 이후 “교황이 면전에 대고 ‘확증이 담긴 편지를 가져오라’는 말을 하는 것은 뺨을 맞는 것과 같은 일이었을 것”이라며 사과했다.

지난 2018년 4월 프란치스코 교황은 공개서한을 통해 후안 "내가 상처를 준 모든 사람에게 사과하며 (희생자들과) 수 주 내로 만나 개인적으로 사과를 하고 싶다"며 "진실하고 균형 잡힌 정보의 부족으로 이 상황을 평가하고 인식하는 데 심각한 실수를 저질렀다"고 사과했다. [AP=연합뉴스]

지난 2018년 4월 프란치스코 교황은 공개서한을 통해 후안 "내가 상처를 준 모든 사람에게 사과하며 (희생자들과) 수 주 내로 만나 개인적으로 사과를 하고 싶다"며 "진실하고 균형 잡힌 정보의 부족으로 이 상황을 평가하고 인식하는 데 심각한 실수를 저질렀다"고 사과했다. [AP=연합뉴스]

이후 프란치스코 교황은 2019년 사제의 성적 학대 등 특정 범죄에 대한 바티칸의 비밀 유지법을 폐기하며 본격적인 개혁 절차에 나서고 있다. 올 6월엔 1983년 요한 바오로 2세 이후 38년 만에 교회법을 개정하며 사제가 자기 의사결정 능력이 부족한 성도를 대상으로 십계명 제6계명(간음하지 마라)을 위반할 경우 성직 박탈과 함께 성직자 신분 제명까지 가능하게 했다.

교황은 이번 프랑스 가톨릭 당국의 보고서에 대해서도 “먼저 희생자들의 상처에 깊은 슬픔을 안고 간다”라면서 “프랑스 교회는 이 끔찍한 현실을 자각하고 구원의 길로 나아가야 한다”며 강도 높은 유감을 표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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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 인기 여전하지만…‘외로운 투쟁’ 뚫어야

문제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비밀주의 혁파 기조에 추기경과 고위 관료 등 교황청 내 많은 이들이 반발하고 있다는 것이다. 지난 2015년 이탈리아 언론인 잔루이지 누치가 바티칸 내부 인물 대화 녹취록을 바탕으로 쓴 『성전의 상인들』에 따르면 교황청에서는 프란치스코 교황 취임 뒤 교황청의 비밀주의 및 현상유지를 선호하는 구파와, 프란치스코 교황이 주도하는 개혁을 지지하는 신파로 나뉘어 대립하고 있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퇴위를 요구하는 11쪽짜리 공개편지로 가톨릭계에 파문을 불러일으킨 카를로 마리아 비가노 대주교. [로이터=연합뉴스]

프란치스코 교황의 퇴위를 요구하는 11쪽짜리 공개편지로 가톨릭계에 파문을 불러일으킨 카를로 마리아 비가노 대주교. [로이터=연합뉴스]

이같은 대립은 지난 2017년 프란치스코 교황을 비방하는 벽보 수백 장이 수도 로마 거리에 붙으며 가시화됐다. 2018년 아동 성학대 의혹으로 물러난 시어도어 매캐릭 전 추기경(2001~2006년 워싱턴 대교구장)의 비위를 프란치스코 교황이 알고 있었음에도 이를 은폐하려 했다는 고발을 담은 카를로 마리아 비가노(77) 대주교의 ‘비가노 편지’를 통해 본격적으로 드러났다.

올해 7월엔 프란치스코 교황이 결장 협착증으로 수술을 받는 과정에서 일부 고위 사제들이 후임 선출을 논의하자, 교황이 “몇몇은 내가 죽기를 바랐겠지만 나는 여전히 살아있다”고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이어 “나에 대해 역겨운 말을 하는 성직자들이 있다. 나도 가끔 인내하지 못할 때가 있다”고 이례적으로 강한 비판을 했다.

한편 프란치스코 교황에 대한 대중적 지지는 여전하다. 7일 WP는 지난달 미 여론조사 전문업체 퓨리서치센터 설문 결과를 인용해, 미국인의 83%가 현 교황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고, 부정적 평가는 14%에 불과하다고 전했다. 이는 2013년 첫 설문조사 때와 거의 동일한 수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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