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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불호 극명히 갈리는 남자…이재명 인생 바꾼 '2004년 그 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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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명 경기지사(이하 직함 생략)가 더불어민주당의 대선 후보로 확정됐다. 이재명은 10일 최종 누적 득표율 50.29%를 얻어 2위 이낙연 후보를 제치고 1위를 차지했다.

어릴 때부터 대선 후보가 될 때까지 이재명의 인생은 아슬아슬한 줄타기의 연속이었다. 청소년기 그는 흙수저보다 못한 ‘무(無)수저’에 가까웠다. 성남 지역 인권변호사로 시민운동에 매진한 청장년기엔 사사건건 갈등에 휘말렸다. 정치에 입문한 중년 이후엔 소송과 추문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하지만 위기를 발판 삼아 자신을 늘 새로운 차원으로 끌어올렸다.

대한민국 근대사에 대한 평가가 정치적 입장에 따라 크게 나뉘듯, 이재명에 대한 평가에도 중간이 없다. 어떤 이는 속 시원한 서민의 대변인이라고 추켜세우지만, 다른 이는 위험한 포퓰리스트라고 깎아내린다.

통상적인 중고교 정규교육과정을 밟지 않은 이재명은 교복에 대한 '환상'이 있었다. 대학 시절에도 교복을 입곤 했다. 이재명은 대학생 시절의 자신을 내성적이고 소심한 사람이라고 소개한다. 그가 대중 앞에서 연설을 하고 비판에 거세게 맞붙는 정치인으로 성장할 것이라고는 상상하기 어려웠다. 사진 『나의 소년공 다이어리』, 이재명, 팬덤북스

통상적인 중고교 정규교육과정을 밟지 않은 이재명은 교복에 대한 '환상'이 있었다. 대학 시절에도 교복을 입곤 했다. 이재명은 대학생 시절의 자신을 내성적이고 소심한 사람이라고 소개한다. 그가 대중 앞에서 연설을 하고 비판에 거세게 맞붙는 정치인으로 성장할 것이라고는 상상하기 어려웠다. 사진 『나의 소년공 다이어리』, 이재명, 팬덤북스

“누군가의 미래가 궁금하면 그의 과거를 보아야 합니다.” 이재명이 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에 나서면서 한 말이다. 이재명은 위기의 순간을 어떻게 돌파하며 이 자리에 섰을까. 5가지 키워드를 중심으로 그의 삶을 돌아봤다.

공장: 강해야 살아남는 곳

이재명은 1963년 경북 안동에서 일곱 남매 중 다섯째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대학 중퇴 학력을 지닌, 당시로선 고학력자였다. 교사와 경찰로 일한 적도 있지만 노름으로 재산을 탕진했다고 한다. 이 탓에 집은 찢어지게 가난했다.

이재명의 가족 사진. 아랫줄 가장 왼쪽이 이재명. 사진 『나의 소년공 다이어리』, 이재명, 팬덤북스

이재명의 가족 사진. 아랫줄 가장 왼쪽이 이재명. 사진 『나의 소년공 다이어리』, 이재명, 팬덤북스

하루하루 먹을 음식도 부족했다. 초등학교까지 5㎞가 넘는 산길을 걸어 다녀야 해서 결석하기 일쑤였다. 준비물을 제대로 챙기고 갈 형편도 못 돼서 선생님에게 많이 맞았다고 했다.

이재명은 초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아버지가 자리를 잡은 성남으로 이사갔다. 이재명은 중학교에 진학하지 않고 아버지가 시키는 대로 공장에 취직했다. 어린 나이라 다른 사람들 이름을 빌렸다.

이재명의 어릴 적 성남 시절. 처음으로 지하방에서 지상으로 이사한 날이다. 중앙포토

이재명의 어릴 적 성남 시절. 처음으로 지하방에서 지상으로 이사한 날이다. 중앙포토

그는 대학 입학 전까지 공장 여섯 군데를 전전했다. 1977년 야구 글러브 공장을 다닐 때, 가죽을 찍어내는 프레스에 손목 관절 부분이 찍히는 사고를 당했다. 손이나 팔을 잃기도 했던 동료들에 비해 크게 다친 것도 아니라고 스스로 위안하며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않았다. 이는 심각한 후유증으로 이어졌다.

키가 자라면서 당시 부서졌던 손목뼈가 이상하게 붙어버렸다. 지금도 이재명은 왼팔이 굽어 있다. 왼팔을 제대로 쓰지 못한다. 이재명은 이 사고로 나중에 제2국민역(5급) 판정을 받아 평시 병역을 면제받았다.

살아남기 위해 강해져야 했던 공장 시절 동료들과 함께 포즈를 취했다. 아랫줄 오른쪽 무릎을 꿇은 소년이 이재명. 사진 『나의 소년공 다이어리』, 이재명, 팬덤북스

살아남기 위해 강해져야 했던 공장 시절 동료들과 함께 포즈를 취했다. 아랫줄 오른쪽 무릎을 꿇은 소년이 이재명. 사진 『나의 소년공 다이어리』, 이재명, 팬덤북스

공장엔 지독한 괴롭힘 문화가 있었다. 고참들이 후배를 불러서 권투글러브를 주며 싸움을 붙였다. 지면 아이스크림을 돌리라고 강요했다. 팔이 성치 못했던 이재명은 지는 일이 더 많아 일당을 그대로 날리기도 했다. 정글 같은 공장에서의 일상은 어린 이재명을 독하게 만들었다.

이재명이 시계공장을 다니던 시절, 동료들과 야유회에 간 모습. 가장 왼쪽 빨간색 점퍼 차림의 소년이 이재명이다. 사진 『나의 소년공 다이어리』, 이재명, 팬덤북스

이재명이 시계공장을 다니던 시절, 동료들과 야유회에 간 모습. 가장 왼쪽 빨간색 점퍼 차림의 소년이 이재명이다. 사진 『나의 소년공 다이어리』, 이재명, 팬덤북스

소년 이재명은 교복을 입고 오가는 학생들을 바라보며 지긋지긋한 공장 생활을 그만둬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던 차에 눈에 들어온 사람이 공장관리자였다. 기세등등한 그 관리자가 고졸이라는 사실을 안 이재명은 검정고시 준비를 시작했다.

아버지는 이런 이재명을 탐탁지 않아 했다. “공부는 무슨 공부냐. 전기 아까우니 빨리 불 끄고 자라”고 타박을 듣는 나날이 이어졌다. 학교도 못 다니며 공장에 나가야 하는 막장 인생이라는 자괴감과 아버지를 향한 야속함은 사춘기 소년 이재명을 극한의 우울감에 빠뜨렸다. 그는 자살 기도를 두 번 했지만 실패했다. 이재명은 결국 공부에서 끝장을 보기로 마음먹었다. 중등 검정고시를 4개월 만에 합격했고, 고등 검정고시를 1년 반 만에 통과했다.

이재명의 대입 학력고사 수험표. 사진 『나의 소년공 다이어리』, 이재명, 팬덤북스

이재명의 대입 학력고사 수험표. 사진 『나의 소년공 다이어리』, 이재명, 팬덤북스

입시정책의 변화도 소년 이재명에게 천운으로 작용했다. 1981년도 입시에서 주관식 시험인 본고사가 폐지되면서 객관식인 학력고사 성적만으로도 대학 입학이 가능해졌다. 당시까지 주관식을 제대로 공부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재명은 학원 야간반을 다니며 공부에 매진했다. 의지력을 기르려고 뒷산에서 몸을 나뭇가지로 때리고 잠들지 않으려고 압정으로 몸을 찌르기도 했다.

이재명은 대학입시 공부 6개월 만에 전국 상위 30%에서 0.2%로 성적이 수직으로 상승했다. 중·고교를 다니지 않아 내신이 학력고사 성적에 연동된 점도 유리하게 작용했다. 전액 장학금에다가 생활비까지 지원하는 중앙대 법대에 지원했다.

중앙대학교 입학식 날, 교복을 맞춰입고 어머니와 함께 섰다. 사진 『나의 소년공 다이어리』, 이재명, 팬덤북스

중앙대학교 입학식 날, 교복을 맞춰입고 어머니와 함께 섰다. 사진 『나의 소년공 다이어리』, 이재명, 팬덤북스

광주: 인권변호사로 이끈 정신적 고향

이재명은 1982년 대학에 입학했다. 한쪽 팔에 장애를 입은 이재명은 일반 회사에 취업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접고 일찌감치 사법고시에 매진했다. 학생 운동이 한창이던 시절, 그는 시위에 나가자는 친구들 권유도 마다했다고 한다.

이재명의 대학 시절. 사진 『나의 소년공 다이어리』, 이재명, 팬덤북스

이재명의 대학 시절. 사진 『나의 소년공 다이어리』, 이재명, 팬덤북스

이재명의 대학 시절. 사진 『나의 소년공 다이어리』, 이재명, 팬덤북스

이재명의 대학 시절. 사진 『나의 소년공 다이어리』, 이재명, 팬덤북스

첫 도전이었던 1984년 사법고시 2차 시험에서는 문제를 착오해 낙방했다. 하지만 다행히 입영신체검사에서 병역을 면제받으면서 2년의 유예 기간을 확보했다. 절치부심 공부한 끝에 1986년 사법고시에 최종합격했다.

대학 졸업식에서 어머니, 아버지와 함께 한 이재명. 사진 『나의 소년공 다이어리』, 이재명, 팬덤북스

대학 졸업식에서 어머니, 아버지와 함께 한 이재명. 사진 『나의 소년공 다이어리』, 이재명, 팬덤북스

대학생 이재명은 광주민주화운동의 진실을 알고 충격을 받았다. 공장을 다니던 시절엔 이재명은 ‘폭도가 장악한 광주’라는 내용의 뉴스를 보고 동료들과 함께 광주 시민을 싸잡아 욕했다고 한다. 하지만 몇 년 뒤, 광주 시민들의 민주화 요구를 정부가 총검으로 탄압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이재명은 광주를 욕했던 자신을 크게 탓했고, 큰 충격에 휩싸였다.

이후 사법연수원에 들어가 개혁적 성향의 동료들과 함께 지내며 인권변호사의 길을 걷기로 마음먹었다. 동료들과 함께 집회에 참여했고 연수원 내에 학회를 조직했다. 사법연수원생 신분으로 정부에 사법개혁을 촉구하는 성명을 발표하기도 했다.

사법연수원을 마친 이재명. 중앙포토

사법연수원을 마친 이재명. 중앙포토

하지만 사법연수원을 막상 떠날 때가 되자 인권 변호사가 돼서 생계를 꾸릴 수 있을지 걱정이 됐다고 한다. 흔들렸던 마음을 잡아준 건 노무현 대통령의 강연이었다. 당시 부산의 인권변호사로 시민운동 스타로 떠올랐던 노무현의 강연은 많은 예비 법조인들을 인권변호사의 길로 이끌었다. 이재명의 결심을 굳히게 한 건 노무현 대통령의 이 한마디였다. “변호사는 굶지 않는다.”

판검사가 되기를 오매불망 기다려온 어머니에겐 “성적이 안 돼서 판검사 임용이 힘들다”고 핑계를 댔다. 이재명은 1989년 지역 운동에 앞장서겠다는 포부로 성남시청 앞에 변호사 사무소를 열었다.

공공병원: 정치에 입문한 계기

변호사가 된 이재명은 인생에서 처음 맞은 여유를 누렸다. 불현듯 결혼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1990년 여름 ‘모솔 탈출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그때까지 이재명은 제대로 된 연애를 하기보다 ‘짝사랑 전문가’였다고 한다. 지금의 아내 김혜경 씨를 소개로 만났다. 저돌적인 연애 스타일로 밀어붙여 1년도 안 돼 결혼했다.

이재명의 신혼 시절. 중앙포토

이재명의 신혼 시절. 중앙포토

이재명은 집회ㆍ시위에 참여하고 노동문제를 상담하면서 조금씩 시민운동의 중심부로 진입했다. 1994년 무렵엔 지방자치와 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한 시민단체인 성남참여연대(구 성남시민모임)를 꾸렸다. 분당 남부저유소 반대와 같은 환경 운동, 분당 파크뷰 특혜분양과 같은 비리 척결 운동에 매달렸다. 시장실 앞에서 농성을 벌이며 시청 직원과 드잡이를 벌이기도 했다. 투기세력의 협박을 받아 가스총을 갖고 다니기도 했다.

인권변호사 시절의 이재명. 사진 『나의 소년공 다이어리』, 이재명, 팬덤북스

인권변호사 시절의 이재명. 사진 『나의 소년공 다이어리』, 이재명, 팬덤북스

이 시절 음주운전과 공무원자격사칭 전과도 생겼다. 정치인이 된 뒤 이재명은 음주운전에 대해선 변명의 여지가 없는 잘못이라고 사과했다. 공무원자격 사칭 부분은 2002년 방송사 PD가 당시 김병량 성남시장을 취재하는 과정에서 검찰을 사칭해 사건 내용을 들은 것인데, 이를 도우려다 누명을 썼다고 주장했으나 벌금 150만원을 선고받았다.

좌충우돌하며 지역 운동을 이끌던 이재명은 2004년 인생을 바꿀 큰일을 하나 기획했다. 성남시립병원 설립 운동이다. 당시 성남에 있던 대형 종합병원인 성남병원과 인하병원이 2003년 연달아 폐업했다. 이재명은 성남에도 공공성을 띤 종합병원이 있어야 한다는 취지로 운동을 벌여 시민 10만 명의 서명을 받았다. 이 서명을 들고 시의회에 설립 조례 안건을 올렸지만 개회 1분도 안 돼 부결됐다. “다른 지역의 시립 병원 사례를 보면 의료서비스 질이 낮고 만성적자에 허덕인다”는 이유였다. 분노한 이재명과 동료들은 시의회 의장석을 점거하고 항의를 했다. 이로 인해 특수공무집행방해죄 전과가 추가됐다.

인권변호사 시절의 이재명. 사진 『나의 소년공 다이어리』, 이재명, 팬덤북스

인권변호사 시절의 이재명. 사진 『나의 소년공 다이어리』, 이재명, 팬덤북스

당시 경찰 수배를 받던 이재명은 한 교회 지하에 숨어 지내며 숙식을 해결했다. 이때 이재명은 ‘시장이 돼 직접 시립병원을 세우겠다’고 결심했다. 2006년 성남시장 선거를 앞두고 열린우리당에 입당하면서 이재명은 정치에 입문했다.

SNS: 이슈메이커 정치인

성남시장 첫 도전은 실패였다. 노무현 정부 레임덕으로 여당의 인기가 떨어졌던 시기였다. 2009년 기회가 찾아왔다. 성남시장 선거를 앞두고, 이대엽 당시 성남시장이 3200억원을 들여 지은 호화로운 시청사에 대한 비판이 쏟아졌다. 한나라당 심판론이 일면서 이 기회를 놓치지 않은 이재명이 2010년 성남시장에 당선됐다.

2006년 이재명이 처음으로 성남시장에 출마할 당시의 공보. 첫번째 선거에선 낙선했다. 사진 중앙선거관리위원회

2006년 이재명이 처음으로 성남시장에 출마할 당시의 공보. 첫번째 선거에선 낙선했다. 사진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이재명은 당선 직후부터 화려한 퍼포먼스로 전국에 이름 석 자를 알렸다. 9층에 아방궁처럼 지어놓은 시장실을 개방해 시민을 위한 북카페로 만들었다. 시장실은 2층으로 옮겨 누구나 자유롭게 찾아올 수 있게 했다. 민원인이나 시위대가 찾아와도 직접 대응하는 ‘상남자’의 면모도 보였다. ‘깨끗하고 화끈한’ 시장이라는 점을 적극적으로 어필했다.

부채로 허덕이던 성남시의 모라토리엄을 선언했다. 지자체로서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모라토리엄 선언이 허울뿐이라는 비판도 있었지만, 선언 직후 전임 이대엽 시장의 비리가 우수수 드러나면서 이재명은 반사이익을 톡톡히 누렸다. 이대엽 시장의 조카가 관급 공사를 주무르고, 성남시 공무원이 뇌물을 주고 승진하는 등 토착 비리의 ‘끝판왕급’ 사례가 드러났기 때문이다.

이재명 성남시장이 2015년 10월 경기도 성남시청에서 청년배당 정책 추진 관련 내용을 설명하고 있다. 사진 연합뉴스

이재명 성남시장이 2015년 10월 경기도 성남시청에서 청년배당 정책 추진 관련 내용을 설명하고 있다. 사진 연합뉴스

이후 이재명은 7000억원이 넘던 성남시 빚을 다 갚았다면서 뉴스의 중심에 섰다. 성남시 청년들에게 한해 100만원을 지급하는 ‘청년 배당’을 실시하면서 기득권에 저항하고 시민복지를 챙기는 시장이라는 이미지를 굳혀나갔다.

2014년 선거에서 무난히 재선에 성공했다. 그해 10월 판교 테크노밸리 야외공연장에서 걸그룹 공연을 보려고 지하주차장 환풍구에 서 있던 관람객이 철골구조 붕괴로 추락해 16명이 죽고 11명이 다치는 사고가 있었다.

이재명은 2014년 국정감사에서 조원진 새누리당 의원의 호통에 ″실실 쪼개지 않았습니다″라고 답했다. 이 영상이 인터넷에 퍼지면서 이재명의 '사이다' 이미지에 호감을 갖는 이들이 늘어났다.

이재명은 2014년 국정감사에서 조원진 새누리당 의원의 호통에 ″실실 쪼개지 않았습니다″라고 답했다. 이 영상이 인터넷에 퍼지면서 이재명의 '사이다' 이미지에 호감을 갖는 이들이 늘어났다.

이 사건을 다룬 경기도 국정감사에서 새누리당 조원진 의원이 이재명에게 “이 자리가 어떤 자리인데 실실 쪼개고 웃고 있습니까”라고 호통쳤다. 이재명은 지지 않고 답변할 기회를 주지 않아서 그랬다며 “실실 쪼개지 않았습니다”라고 맞받아쳤다. 이를 계기로 차츰 전국구 스타 정치인으로 도약했다.

미디어에선 국회의원에게 맞서고, SNS에선 속 시원하게 자기 할 말을 다 쏟아내는 모습을 신선하다고 평가하는 대중이 늘었다. 사실 이재명은 2010년 성남시장 당선 직후 페이스북을 시작한 ‘원조 SNS 정치인’이다. 다른 정치인과 달리 의견과 감정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화법을 처음부터 선호했다. 그의 지지층은 ‘손가락혁명군’이라 불린다.

2017년 1월 15일 광주광역시 김대중컨벤션센터에서 열린 ‘손가락혁명군’ 출정식 행사에 참여한 이재명. 손가락혁명군은 이재명의 지지자 모임이다. 사진 연합뉴스

2017년 1월 15일 광주광역시 김대중컨벤션센터에서 열린 ‘손가락혁명군’ 출정식 행사에 참여한 이재명. 손가락혁명군은 이재명의 지지자 모임이다. 사진 연합뉴스

이재명은 여러 강연과 펴낸 책에서 주류 언론이 기득권의 편에 서 있다며 불신을 드러내 왔다. 광주민주화운동과 관련해서도 당시 방송과 신문이 정부 측 발표만 앵무새처럼 보도했다고 비판했다. 80년대 민주화 운동 세력이 유인물을 뿌려 군사정권의 가려진 비리를 폭로한 것처럼 이재명은 SNS로 미디어들이 보도하지 않는 진실을 알리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시민들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 페이스북 메시지도 꼼꼼히 읽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재명은 속 시원한 화법과 활발한 SNS 소통으로 인지도를 쌓아나갔다. 2016년 박근혜 전 대통령 국정농단 사태 이후엔 대선주자 반열까지 올라섰다. 촛불 집회에서 “박근혜 하야”를 공개적으로 외치면서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동시에 정치 인생 최대의 위기를 부른 사건도 연달아 터졌다.

위기: 힘들수록 강해진다

이재명은 2017년 대선 경선에서 문재인 대통령에게 패했다. 이어서 현직 성남시장보다 한 체급을 높여 경기도지사에 도전했다.

이즈음 대선 경선 때 문재인 대통령을 향한 악성 비방글을 잔뜩 올린 ‘08__hkkim’이라는 트위터 계정이 도마에 올랐다. 일부 네티즌은 이 계정이 이재명의 아내 김혜경씨의 것이 아니냐는 의혹을 제기했다. 이들은 이 계정을 김혜경씨 이름에 빗대어 '혜경궁 김씨'라 불렀다.

'혜경궁 김씨' 트위터 계정(@08_hkkim) 이 올린 트윗. 중앙포토

'혜경궁 김씨' 트위터 계정(@08_hkkim) 이 올린 트윗. 중앙포토

이외에도 2018년엔 이재명을 향한 갖가지 의혹이 쏟아져 나왔다. 영화배우 김부선 씨가 자신과의 스캔들을 폭로했다. 셋째 형을 정신병원에 가둘 때 직권을 남용했다는 논란이 벌어졌다. 조폭 연루설까지 나왔다. 이재명이 성남시장 시절 셋째 형수에게 욕설을 퍼붓는 음성 파일도 공개됐다.

이재명은 욕설에 대해 셋째 형과의 사이가 벌어지면서 생긴 일이라고 해명했다. 셋째 형이 시장의 혈육이라는 신분을 이용해 시정에 개입했고 교수 자리를 청탁했는데 거절하자 ‘안티 이재명’ 운동을 벌였다고 했다. 어머니에게 가서 패륜적 폭언을 하고 폭행까지 일삼자 참다못해 형수에게 욕설했다고 주장했다. 반면 셋째 형수 박인복 씨는 “욕설 당시에 어머니도 없었는데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맞섰다. 여전히 두 주장의 진위는 가려지지 않았다.

바른미래당 김영환 경기도지사 후보(왼쪽)가 국회 당대표실에서 기자간담회를 열고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후보의 형수와 함께 후보 사퇴를 요구하고 있다. 중앙포토

바른미래당 김영환 경기도지사 후보(왼쪽)가 국회 당대표실에서 기자간담회를 열고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후보의 형수와 함께 후보 사퇴를 요구하고 있다. 중앙포토

‘혜경궁 김씨’ 사건에 대해선 검찰은 트위터 계정이 김혜경씨의 것인지 단정할 수 없다는 이유로 김씨의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에 대해 증거불충분으로 불기소 처분했다. 조폭 연루설에 대해선 이미 박근혜 정부 시절 검찰에서 무혐의 내사 종결했다는 이유로 수사를 시작하지 않았다. 김부선 씨는 손해배상청구 소송은 유지했지만 명예훼손 고소는 취하했다.

이재명을 상대로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낸 영화배우 김부선씨와 변호인 강용석씨. 중앙포토

이재명을 상대로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낸 영화배우 김부선씨와 변호인 강용석씨. 중앙포토

2020년 7월엔 이재명의 정치 생명을 쥔 중요한 사건의 판결이 내려졌다. 2018년 경기도지사 선거 토론회에서 “친형을 정신병원에 입원시키려 했느냐”는 상대 후보의 질문에 이재명이 “그런 일 없다”고 한 것이 허위 사실 공표냐 아니냐를 가리는 판결이었다. 허위 사실 공표라면 당선무효가 될 수 있는 중대사안이었다. 대법원은 “토론회가 즉흥적, 계속적으로 이뤄지니 표현의 명확성에 한계가 있다. 적극적으로 허위사실을 공표한 것으로 볼 수 없다”라는 취지로 무죄 판결을 내렸다. 이재명은 최악의 위기에서 기사회생했다.

'친형 강제입원'과 관련한 허위사실 공표 혐의에 대해 2심에서 당선무효형을 선고받았다가 대법원의 원심 파기환송으로 지사직을 유지하게 된 이재명이 2020년 7월 16일 오후 경기도 수원시 경기도청에서 입장을 밝히며 지지자들에게 미소를 지으며 인사하고 있다.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직권남용 권리행사 방해, 공직선거법 위반 등 혐의로 기소된 이재명의 상고심에서 일부 유죄로 판결한 원심을 깨고 무죄 취지로 사건을 수원고법으로 돌려보냈다고 밝혔다. 사진 연합뉴스

'친형 강제입원'과 관련한 허위사실 공표 혐의에 대해 2심에서 당선무효형을 선고받았다가 대법원의 원심 파기환송으로 지사직을 유지하게 된 이재명이 2020년 7월 16일 오후 경기도 수원시 경기도청에서 입장을 밝히며 지지자들에게 미소를 지으며 인사하고 있다.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직권남용 권리행사 방해, 공직선거법 위반 등 혐의로 기소된 이재명의 상고심에서 일부 유죄로 판결한 원심을 깨고 무죄 취지로 사건을 수원고법으로 돌려보냈다고 밝혔다. 사진 연합뉴스

이 판결을 마지막으로 이재명을 둘러싼 굵직한 의혹이 대부분 해소됐다. 이재명은 이런 위기 상황 속에서도 경기도지사 직무를 이어나갔다. 경기도 계곡의 불법 영업 시설을 철거했다. 코로나 사태 초기 환자가 다수 발생한 신천지 총회 건물을 직접 찾아가 전수조사를 지휘하기도 했다. 경기도민들은 경기도지사 이재명이 가장 잘한 것으로 ‘코로나 대응’을 꼽는다.

이재명은 한 강연에서 ‘위기’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밝힌 바 있다. 2016년 경기대 강연에서 그는 “우리 같은 변방의 아웃사이더에겐 좋은 기회가 오지 않고 주로 위기가 오는데, 위기 속에 기회의 요인이 있다”며 “나는 위기적 요인들을 기회로 만드는 일을 계속해왔다”고 밝혔다. 그는 “일부러 나를 까라고 심하게 얘기하기도 했다”며 “위기를 초래한 뒤 싹 바꿔서 기회 요인으로 되치기하며 살아왔다”고 했다.

경기도청 브리핑실에서 열린 코로나19 위기 극복을 위한 경제정책 관련 경기도지사 긴급 기자회견을 마치고 이재명 경기도지사와 장현국 경기도의회 의장, 박근철 경기도의회 민주당 대표의원이 악수를 하고있다. 사진 경기도

경기도청 브리핑실에서 열린 코로나19 위기 극복을 위한 경제정책 관련 경기도지사 긴급 기자회견을 마치고 이재명 경기도지사와 장현국 경기도의회 의장, 박근철 경기도의회 민주당 대표의원이 악수를 하고있다. 사진 경기도

이재명은 실제로 비판을 각오하고 폭발성이 큰 어젠다를 선점하는 유형의 정치인이다. 논란이 생기고 비판을 받으면 더 세게 반격하는 편이다. 각종 무상 시리즈와 기본 소득 논쟁이 그랬다. 다른 정치인에게는 도박에 가까운 위험수일 수 있지만 이재명이 치명상을 입은 적은 없다. 여당 측의 거센 반발을 부른 발언이나 행보에도 최근엔 지지율이 크게 떨어진 사례가 거의 없다. 반면 이낙연 전 민주당 대표는 안정적인 이미지로 2020년 4월 여권 대선 지지율 40%까지 치솟았지만 2020년 말 이명박ㆍ박근혜 대통령 사면론을 꺼내면서 얼마 뒤 지지율이 13.6%까지 꺾였다.

대선까지 5개월, 변수는…

지난달 성남 대장동 땅 개발 특혜 의혹이 터지면서 이재명에게 또 다른 위기가 찾아왔다. ‘화천대유’라는 자금관리회사가 배당금과 분양 이익으로 8000억원이 넘는 수익을 올렸다. 통상 10년이 걸리는 토지 매입과 인허가가 3년밖에 걸리지 않았다. 게다가 성남시보다 뒷순위인 시행사가 훨씬 큰 이득을 챙겼다. 이재명 당시 성남시장이 뒤를 봐주지 않았다면 이 모든 게 가능했겠냐는 의혹이 일었다. 이재명 캠프에선 성남시도 5000억원이 넘는 이익을 거두면서 성남시민에게 혜택이 돌아갔다고 주장했다.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선 경선 후보가 지난달 24일 오후 경남 창원시 의창구 경남도의회 입구에서 '화천대유'와 관련한 설명을 하고 있다. 사진 연합뉴스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선 경선 후보가 지난달 24일 오후 경남 창원시 의창구 경남도의회 입구에서 '화천대유'와 관련한 설명을 하고 있다. 사진 연합뉴스

곽상도 의원 아들이 화천대유로부터 퇴직금 50억원을 받았다는 사실도 밝혀지며 ‘대장동 의혹’은 종잡을 수 없는 방향으로 흘렀다. 하지만 이재명 지지율은 의혹이 제기되기 전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지지세가 ‘역결집’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위기를 기회로 바꾸며 살아온 이재명 민주당 대선 후보. 나비 날갯짓 한번에도 휙휙 바뀔 수 있는 대선 판도 위에서 지금의 기세를 이어나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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