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 비판한 언론인 노벨상…막말 두테르테 의외의 침묵 왜

중앙일보

입력 2021.10.11 05:00

필리핀 언론인 마리아 레사(58)의 2021년 노벨 평화상 수상이 내년 5월 필리핀 대선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주목받고 있다. 필리핀 대선을 불과 7개월 여 앞둔 시점에서 로드리고 두테르테 정권의 권위주의 통치에 맞서 온 언론인이 필리핀 최초로 노벨상을 수상해서다.   

대선 7개월 앞둔 시점에 언론인의 평화상 수상
두테르테 침묵…"놀랐다는 증거" "축하 딜레마"
"평화상 수상, 내년 대선 새바람 동력 될 수도"
두테르테 딸, 후보등록 안해…"가능성 열려 있어"

9일(현지시간) 미국 타임지는 "필리핀의 중요한 시기에 레사가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고 평했다. 국제 언론인 단체는 물론, 필리핀 언론 단체와 야당 정치인들도 이번 수상에 대해 환영 메시지를 내놨지만, 두테르테 대통령은 아직까지 침묵하고 있다. 평소 거침 없는 그의 언사를 감안할 때 이는 그가 레사의 수상에 난처해하고 있음을 보여준다는 분석이 나온다.  

2021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필리핀 언론인 마리아 레사가 9일(현지시간) 인터뷰 도중 기뻐하고 있다.[AP=연합뉴스]

2021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필리핀 언론인 마리아 레사가 9일(현지시간) 인터뷰 도중 기뻐하고 있다.[AP=연합뉴스]

필리핀 대통령은 6년 단임제로 두테르테는 내년 대선에 출마할 수 없다. 하지만 그는 대신 부통력직에 도전하겠다고 했다가 차차기 대선을 노린 꼼수란 비판이 일었고, 지난 2일 그는 돌연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 그러나 이 역시 그의 큰딸이자 다바오의 시장인 사라 두테르테 카피오(43)에게 정권을 물려주려는 의도가 아니냐는 지적이 나왔다.   

2012년 탐사보도 온라인 언론사 '래플러'를 설립한 레사는 두테르테 정권이 '마약 소탕'이란 명목 하에 재판 없이 수천 명을 사살한 인권 유린 과정을 폭로하는 등 정권의 부패와 무능을 비판해왔다. 이에 두테르테 정권은 레사와 래플러를 상대로 무더기 소송을 거는 등 압박을 가했다. 미국과 필리핀 국적을 모두 갖은 레사는 CNN 필리핀 지국장을 지내기도 했다.  

노벨위원회는 8일 레사와 러시아에서 블라디미르 푸틴 정권의 언론 탄압에 저항한 신문사 노바야 가제타의 편집장인 드미트리 무라토프(60)를 노벨 평화상 수상자로 선정했다. 1935년 독일 기자 카를 폰 오시에츠키의 수상 이후 86년 만에 표현의 자유를 위해 싸운 언론인에게 노벨상이 돌아간 것이다.    

로드리고 두테르테 필리핀 대통령. [로이터=연합뉴스]

로드리고 두테르테 필리핀 대통령. [로이터=연합뉴스]

일각에선 이번 노벨 평화상 수상이 필리핀의 내년 대선에 새바람을 일으키는 동력이 될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타임지에 따르면 정치 평론가 리차드 헤이다리언은 레사의 수상이 국제적인 지지를 얻으면서 2022년 5월 대선을 앞두고 현 정권 비판론자들에게 희망을 줄 것이란 분석을 내놨다. 그는 "필리핀은 새로운 선거를 향해 가고 있고, 변화의 희망이 있는 상황에서 이번 평화상 수상은 올바른 방향으로 가는 모멘텀이 될 수도 있다"고 진단했다. 

필리핀 언론계도 레사의 수상을 높이 평가했다. 필리핀 전국언론인연합(NUJP)은 성명을 통해 "우리는 이 상이 기본적인 자유와 민주주의가 공격받는 상황에서 진실을 알리는 사람들에게 더 많은 빛을 비춰주길 바란다"고 밝혔다. 필리핀 외신기자협회는 "레사의 승리는 언론 자유를 지키려는 이들의 승리"라고 축하했다. 

이번 그의 수상은 필리핀의 언론 자유 실태를 국제사회에 알리는 계기도 됐다는 평이다. 국경없는기자회(RSF)의 세계 언론 자유 지수에서 필리핀은 180개국 중 138위다. 미 비정부기구인 언론인보호위원회(CPJ)에 따르면 필리핀에선 1992년부터 올해까지 89명의 언론인이 살해당했다.    

두테르테 대통령과 그의 딸인 사라 두테르테 카피오.[AFP=연합뉴스]

두테르테 대통령과 그의 딸인 사라 두테르테 카피오.[AFP=연합뉴스]

야당도 두테르테 정권에 공세를 폈다.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두테르테와 각을 세우며 내년 대선 출마를 선언한 레니 로브레도 필리핀 부통령은 자신의 트위터에 "이는 진실과 책임을 다하려는 지칠 줄 모르는 노력에 대한 인정이자 확인"이라고 썼다.

두테르테와 대통령궁이 이번 수상에 침묵하는 데 대해 야당 정치인 카를로스 이사가니 자라테는 "대통령궁의 침묵은 그들이 놀랐다는 증거"라면서 "특히 자신에 대해 비판적인 언론인을 모욕한 두테르테 본인도 타격을 입게 됐다"고 주장했다. 다닐로 아라오 필리핀대 언론학 교수는 "대통령궁 입장에선 정권이 박해한 인물을 축하해줘야 하는 딜레마에 빠졌다"고 말했다.

국경없는기자회·언론인보호위원회 등은 레사와 무라토프 두 언론인의 수상을 축하하며 자유롭고 독립적인 보도를 위해 애쓰는 모든 언론인들에 대한 인정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레사는 수상 후 AFP통신과의 인터뷰에서 "이번 수상은 전 세계 언론인들을 위한 것"이라면서 "언론 자유를 위한 투쟁을 계속하겠다"고 밝혔다.

두테르테 딸, 대선 후보 등록 마감 뒤 입후보 가능성도 

두테르테의 딸 사라 두테르테 카피오.[로이터=연합뉴스]

두테르테의 딸 사라 두테르테 카피오.[로이터=연합뉴스]

한편 9일 CNN 등은 두테르테의 딸인 카피오 시장이 전날 마감된 내년 대선 후보에 등록하지 않았다고 보도했다. 그는 내년 대선 유력 후보로 거론돼 왔으나 다바오 시장 3선에 도전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대신 집권당의 차기 대선 후보로는 두테르테의 측근인 경찰청장 출신의 델라 로사 의원이 등록했다. 하지만 필리핀은 선거법상 다음 달 15일까지 정당별 후보 교체를 허용해 카피오 시장의 대권 도전 가능성은 열려 있다. 두테르테 역시 2015년 이 규정을 활용, 후보 등록 마감 기한을 넘긴 뒤 입후보한 전례가 있다.

내년 5월 치러칠 필리핀 대선에는 현재까지 로사 의원, 로브레도 부통령, 복싱 영웅 매니 파키아오, 독재자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전 대통령의 아들인 페르디난드 봉봉 마르코스 주니어, 배우 출신인 프란시스코 도마고소 마닐라 시장 등 5명이 입후보했다.

하지만 두테르테에 대항한 레사의 노벨상 수상이 내년 대선에 미치는 영향이 크지 않을 것이란 반론도 나온다. 타임지, CNN 등에 따르면 여론조사에서 두테르테 정권에 대한 국민 지지도가 이전 정권들보다 높고, 차기 대선 주자 선호도 조사에서 그의 딸이 선두를 달리고 있다는 이유에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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