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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차이나 중국읽기

토끼와 몽둥이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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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우리와 세계가 드라마 ‘오징어 게임’에 빠져 있을 때 중국은 전혀 다른 작품에 열광 중이다. 중국 국경절 연휴를 맞아 지난달 30일 개봉한 애국주의 ‘국뽕’ 영화 ‘장진호(長津湖)’가 그것이다. 제작비 13억 위안(약 2400억원)을 들여 중국에서 만들어진 가장 비싼 영화라는 말을 듣는 ‘장진호’는 상영 나흘 만에 수입이 제작비를 넘어서는 등 연일 박스오피스 1위를 기록하며 무서운 흥행 돌풍을 이어가고 있다고 한다. 중국 영화사를 새로 쓸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장진호 전투를 소재로 한 한국전쟁 영화 '장진호'가 지난달 30일 중국에서 개봉돼 중국 애국주의에 불을 지피고 있다. [영화 '장진호' 포스터]

장진호 전투를 소재로 한 한국전쟁 영화 '장진호'가 지난달 30일 중국에서 개봉돼 중국 애국주의에 불을 지피고 있다. [영화 '장진호' 포스터]

한국전쟁 당시의 장진호 전투를 소재로 한 영화지만 스크린에 등장하는 건 소총 등 열악한 장비로 무장한 중국군과 폭격을 퍼붓는 미군뿐 정작 주인공인 국군은 보이지 않는다. 한국전쟁을 ‘북한을 도와 미국과 싸워 집과 나라를 지킨(抗美援朝 保家衛國)’ 전쟁으로 부르는 중국의 입장이 고스란히 반영돼 있기 때문이다. 사실 영화 자체가 중국 공산당 선전부의 의뢰를 받아 만들어진 것으로 이 영화는 ‘작품’이 아닌 ‘선전물’이라고 봐야 옳을 것이다.

중국의 애국주의 영화 ‘장진호’는 미군이 38선을 넘어 중국의 안보가 위협을 받기에 중국의 참전이 불가피했다고 강변한다. [연합뉴스]

중국의 애국주의 영화 ‘장진호’는 미군이 38선을 넘어 중국의 안보가 위협을 받기에 중국의 참전이 불가피했다고 강변한다. [연합뉴스]

우리가 눈여겨볼 건 그 선전의 결과다. ‘오징어 게임’을 본 이후 세계적으론 드라마의 한 게임인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놀이가 한창이다. 반면 중국에선 ‘장진호’를 본 뒤 영화에 나오는 중국군의 고통을 함께 느껴보겠다는 취지에서 ‘얼린 감자’를 먹는 영상이 인터넷 공간에 올라오고 있다. 미군이 크리스마스를 맞아 맛있고 따뜻한 음식을 먹을 때 중국군은 혹독한 추위에 떨면서 얼린 감자를 먹는 장면이 있기 때문이다. 영화가 끝난 뒤 스크린을 향해 거수경례하는 관객의 모습을 웨이보에서 찾을 수도 있다.

중국의 국뽕 영화 ‘장진호’ 관람 이후 한 중국인 여성이 영화 속 중국군처럼 얼린 감자를 먹으며 고통을 체험하는 모습. [중국 바이두 캡처]

중국의 국뽕 영화 ‘장진호’ 관람 이후 한 중국인 여성이 영화 속 중국군처럼 얼린 감자를 먹으며 고통을 체험하는 모습. [중국 바이두 캡처]

그런가 하면 ‘장진호’ 관람 이후 랴오닝(遼寧)성 선양(瀋陽)에 있는 항미원조 열사능을 찾는 중국인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고 한다. 당 선전부로서는 대성공이다. 영화를 통해 현재 대결 상태에 있는 미국에 대한 분노와 적개심을 불러일으키는 데 성공한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사실 왜곡이다. 미군이 38선을 넘어 중국의 안보를 위협했기에 중국의 참전이 불가피했다고 강조하는 영화 ‘장진호’는 한국전쟁에 대한 중국의 여러 비뚤어진 시각 중 하나를 잘 보여준다.

한국전쟁 당시 장진호 전투를 소재로 한 중국 영화 ‘장진호’. 지난달 30일 개봉해 연일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하고 있다. [중국 바이두 캡처]

한국전쟁 당시 장진호 전투를 소재로 한 중국 영화 ‘장진호’. 지난달 30일 개봉해 연일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하고 있다. [중국 바이두 캡처]

한국전쟁에 대한 중국의 왜곡은 어떻게 이뤄지나. 김인희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이 지난 3월 펴낸 『중국 애국주의 홍위병, 분노청년』에 잘 나와 있다. 2015년 제작돼 지금까지 중국 인터넷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끄는 애니메이션 ‘그해 그 토끼는 무슨 일이 있었을까(那年那兔那些事儿, 이하 ‘그 토끼’)’가 있다. ‘그 토끼’는 2015년 중국 정부가 실시한 ‘사회주의 핵심가치관 애니메이션 지원사업’에 선정된 작품으로 만화의 형식으로 중국 건국 전후의 군사와 외교 중 중요한 문제를 다룬다.

중국의 청년세대에 큰 영향을 미친 애니메이션 ‘그해 그 토끼는 무슨 일이 있었을까’. 한국전쟁 당시 북한의 한국 공격이 이승만 정권의 백성 착취 때문에 일어났다고 주장한다. [중국 바이두 캡처]

중국의 청년세대에 큰 영향을 미친 애니메이션 ‘그해 그 토끼는 무슨 일이 있었을까’. 한국전쟁 당시 북한의 한국 공격이 이승만 정권의 백성 착취 때문에 일어났다고 주장한다. [중국 바이두 캡처]

토끼는 온순한 동물로 중국을 가리키며 미국은 독수리, 러시아는 곰, 일본은 닭으로 그려진다. 한데 한국은 남쪽 몽둥이(南棒), 북한은 북쪽 몽둥이(北棒)라고 묘사된다. 남쪽은 철모, 북쪽은 인민모를 쓰고 있다. 중국인이 한국인을 욕할 때 쓰는 말인 일본 앞잡이라는 뜻의 고려 몽둥이(高麗棒子)에서 따온 말이다. ‘그 토끼’에선 한국전쟁을 어떻게 그리고 있나. 남쪽 몽둥이가 음식을 먹고 돈을 내지 않는 등 평소 북쪽 몽둥이를 때리고 괴롭히는 거로 그려진다.

2015년 중국의 각종 동영상 사이트에서 방영되기 시작한 애니메이션 ‘그 토끼’. 맨 앞의 토끼는 중국을 가리킨다. 맨 뒤에 철모를 쓴 몽둥이가 한국, 인민모를 쓴 몽둥이가 북한으로 서로 싸움을 하고 있다. [중국 바이두 캡처]

2015년 중국의 각종 동영상 사이트에서 방영되기 시작한 애니메이션 ‘그 토끼’. 맨 앞의 토끼는 중국을 가리킨다. 맨 뒤에 철모를 쓴 몽둥이가 한국, 인민모를 쓴 몽둥이가 북한으로 서로 싸움을 하고 있다. [중국 바이두 캡처]

북한이 한국을 공격한 이유는 이승만 괴뢰정권이 백성을 착취했기 때문으로 설명한다. 그러자 남쪽 몽둥이가 독수리인 미국에 도움을 청하고 북쪽 몽둥이는 토끼인 중국에 지원을 요청한다. 토끼는 장진호 전투 등에서 많은 전사자가 발생했으나 최종적으로 승리했다고 주장한다. 싸움의 구도를 볼 때 한국과 미국이 악당 역할이다. 자연히 북한을 도운 중국은 불의를 심판하는 정의의 편에 서 있다. 이게 뜻하는 바는 크다.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이 왜 “항미원조 전쟁의 승리는 정의의 승리”라고 말하는지 그 이유를 유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중국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애니메이션 ‘그 토끼’를 그린 린차오. 인터넷 공간에선 역광비행(逆光飛行)이라는 이름을 쓴다. [중국 바이두 캡처]

중국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애니메이션 ‘그 토끼’를 그린 린차오. 인터넷 공간에선 역광비행(逆光飛行)이라는 이름을 쓴다. [중국 바이두 캡처]

중국 네티즌이 지난해 방탄소년단(BTS)의 밴 플리트 수상 소감에 대해 “왜 중국 참전 군인에 대해 감사의 표현을 하지 않느냐”며 따진 것도 바로 이런 ‘그 토끼’의 영향으로 한국전쟁에 대해 잘못된 인식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놀라운 건 한국전쟁에 대한 이런 비뚤어진 인식을 중국 정부가 조장한다는 점이다. 중국의 애국심 고취야 누가 뭐라고 할 수 있겠나. 그러나 그게 사실에 기초해야지 팩트를 왜곡해 이뤄지는 것이라면 한낱 역사 날조에 불과한 게 아니고 또 뭔가.

한국전쟁에 대한 중국의 비뚤어진 시각은 어떻게 만들어지나 #2015년 출시된 애국주의 애니메이션 ‘그 토끼’가 커다란 역할 #선량한 토끼는 중국, 한국은 생명이 없는 몽둥이로 그려져 #중국이 불의를 심판하기에 ‘항미원조’ 전쟁은 정의의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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