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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에 핵기술 전수…파키스탄 핵과학자 압둘 칸 박사 [1936~2021.10.10]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파키스탄에선 핵 개발의 아버지로 평가받지만 국제사회에선 핵 확산의 주범으로 낙인 찍혔던 핵 과학자 압둘 카디르 칸이 10일(현지시간) 사망했다.

파키스탄의 핵 과학자 압둘 카디르 칸(85) 박사의 2011년 5월 모습. 파키스탄 국영 TV는 그가 폐질환으로 10일(현지시간) 오전 사망했다고 보도했다. 로이터=연합뉴스

파키스탄의 핵 과학자 압둘 카디르 칸(85) 박사의 2011년 5월 모습. 파키스탄 국영 TV는 그가 폐질환으로 10일(현지시간) 오전 사망했다고 보도했다. 로이터=연합뉴스

파키스탄 국영 PTV는 칸 박사가 이날 오전 7시 4분 폐 질환으로 숨을 거뒀다고 보도했다. 그는 지난 8월 코로나19 양성 판정을 받고 군 병원 등에서 입원 치료를 받아오다가 몇 주 전 퇴원했다. 최근 들어 병세가 악화한 그는 전날 밤 호흡 곤란 등으로 수도 이슬라마바드의 KRL 병원으로 이송된 후 세상을 떠났다.

아리프알비 파키스탄 대통령은 트위터를 통해 “1982년부터 개인적인 친분이 있었던 칸 박사의 사망에 깊게 애도를 표한다”며 “파키스탄을 구하는 핵억지력을 갖추는 데 기여했으며, 그의 헌신을 잊지 않을 것”이라고 전했다.

1936년 인도 보팔에서 태어난 칸 박사는 1952년 파키스탄으로 이주한 인도 출신 이민자다. 카라치대에서 물리학을 전공하고, 네덜란드 델프트 과학기술대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벨기에 루뱅 가톨릭대에서 금속 분야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우라늄 농축 분야 전문가로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물리동력화연구소(FDO)에서 근무하던 그는 파키스탄 정부의 요청을 받고 1975년 12월 자진 귀국했다. 당시 파키스탄은 1974년 5월 적대국인 인도가 최초로 핵 실험을 단행하자 공학 연구소를 세우고 칸 박사를 책임자로 임명했다.

유럽에서의 안정적인 생활을 버리고 파키스탄으로 돌아온 칸 박사는 귀국 직후인 1976년 본격적으로 핵 개발에 착수, 1998년 5월 28일 핵폭탄 폭파 실험에 성공했다.

파키스탄을 이슬람 최초의 핵보유국으로 만든 칸 박사는 자국에서 ‘국가적 영웅’으로 칭송받았다.

1999년 3월 칸 박사(왼쪽)가 파키스탄을 이슬람 국가 최초의 핵 보유국으로 만든 공로를 인정 받아 당시 대통령인 무하마드 타라르 대통령으로부터 파키스탄 최고 시민상을 받고 있다. [EPA=연합뉴스]

1999년 3월 칸 박사(왼쪽)가 파키스탄을 이슬람 국가 최초의 핵 보유국으로 만든 공로를 인정 받아 당시 대통령인 무하마드 타라르 대통령으로부터 파키스탄 최고 시민상을 받고 있다. [EPA=연합뉴스]

그러나 칸 박사는 북한·이란·리비아 등 ‘불량 국가’에 핵 개발 기술을 전수한 핵 확산의 주범이다. 2000년대 중반 국제원자력기구(IAEA)와 미국 등 서구 사회는 파키스탄 정부가 북한에 핵무기 개발 기술을 이전했다는 의혹을 제기하며 그를 주요 인물로 지목했다.

이에 칸 박사는 2004년 2월 기자회견을 자청해 북한·이란·리비아 등 3개국에 핵 기술을 판매했다는 사실을 시인했다. 그가 전수한 기술은 천연우라늄을 가스로 바꾼 뒤 원심분리기를 이용해 핵폭탄 제조에 필수적인 고농축 우라늄 235를 추출하는 기술로 전해졌다. 자연 상태의 우라늄은 핵무기 제조가 불가능해 고농축 우라늄(HEU)을 분리해내야 한다.

그는 핵 기술 판매에 파키스탄 정부는 관여하지 않았으며 독단적으로 행동했다고 주장했지만, 국제사회는 이를 믿지 않았다.

당시 페르베즈 무샤라프 대통령은 그를 사면했고 가택연금 조치로 끝났다.

그는 2012년에는 파키스탄 구국운동(TTP)이라는 정당을 출범해 기성 정치권에 반기를 들었고, 지난해 5월에는 현지 대법원에 이동의 자유를 보장하라는 청원서를 내기도 했다. 그는 청원서에서 “나는 이동의 자유도 없고 누구와도 만날 수 없는 죄수와 같은 삶을 살아왔다”며 자신이 희생양이라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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