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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매 비하 논란된 尹…원조 日은 '치매' 단어 버렸다, 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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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 이제석 광고연구소ⓒ www.jeski.org

자료: 이제석 광고연구소ⓒ www.jeski.org

“그거(청약통장) 모르면 거의 치매 환자” (9월 29일 유튜브 채널 ‘석열이형TV’ 중)

국민의힘 대선주자 윤석열 전 검찰총장이 지난달 23일 경선 TV토론회 때 “집이 없어서 주택청약통장을 만들어보지 못했다”고 말한 것을 해명하면서 치매를 언급했다. 혹 떼려다 혹 붙인 격으로 윤 전 총장의 해명은 치매 환자 비하 논란을 불렀다. 치매 환자를 무식한 사람의 대명사로 사용했기 때문이다. 박상혁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지난달 30일 자신의 페이스북에서 “내 어머니가 치매 환자다”라며 “(청약통장을) 모르면 모른다고 하지 치매 앓고 있는 분들이 뭐가 문제냐”고 따졌다. 결국 윤석열 캠프에선 “적절한 비유가 아니었다”며 사과하고 해당 영상을 삭제했다.

국민의힘 대선 예비후보인 윤석열 전 검찰총장이 지난달 30일 서울 종로구 대한불교조계종을 예방해 합장인사하고 있다. 뉴스1

국민의힘 대선 예비후보인 윤석열 전 검찰총장이 지난달 30일 서울 종로구 대한불교조계종을 예방해 합장인사하고 있다. 뉴스1

치매 환자와 그를 돌보는 가족들이 ‘치매’라는 병명 때문에 말 못 할 고통을 받는 건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치매는 '어리석다'는 뜻의 한자 치(癡)와 매(呆)의 합성어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일상생활에서 기억을 잘 못 하는 사람에게 “너 치매 걸렸냐”고 자주 묻는다.

치매란 병명은 일본의 정신의학자 쿠레 슈우조가 1908년 처음 제안했다. 라틴어가 어원인 병명 디멘시아(Dementia)를 일본어식으로 번역했다. 이후 일제가 조선, 대만, 중국 등을 침략하면서 전파됐다.

그런데 일본 후생노동성은 2004년 "치매라는 용어가 경멸감과 부정적인 시각을 준다"는 지적을 받아들여 병명을 ‘인지증(認知症)’으로 고쳤다. 대만은 ‘실지증(失知症)’, 홍콩과 중국은 ‘뇌퇴화증(腦退化症)’으로 바꿔 부르고 있다. 한국만 일제에 의해 전래한 용어를 아직도 쓰고 있다.

국민 45% “치매 용어 뭐가 문제?”…무관심에 개정 번번이 무산

부정적인 뜻을 내포한 병명을 바꾸는 움직임은 국내에도 여러 사례가 있다. 문둥병, 나병은 2000년부터 전염병예방법에서 한센병으로 바뀌었다. 정신이 갈라지고 찢어졌다는 뜻의 정신분열증은 2011년부터 조현병(調絃病)으로 개정됐다. 조현은 현악기의 줄을 고른다는 뜻인데 개정 과정에서 병명이 너무 어렵단 지적이 나왔지만, "그렇기 때문에 낙인 효과가 줄어든다"는 반론이 관철됐다. ‘지랄병’이라고도 불린 간질은 2014년 국회에서 뇌전증(腦電症)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치매'라는 용어를 바꾸자는 법안은 18대 국회인 2011년 성윤환 새누리당 전 의원이 처음 제안했다. 성 전 의원은 치매를 인지장애증으로 고치자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 법안은 국회 보건복지위에서 한 번도 논의되지 못한 채 임기만료로 폐기됐다. 이후 10년간 치매 용어를 고치려는 법안은 꾸준히 발의됐지만 모두 관심을 받지 못했다.

치매란 용어에 이미 익숙해진 국민들이 문제를 크게 인식하지 못한다는 것이 큰 이유다. 보건복지부가 2014년 실시한 ‘치매 용어에 대한 대국민 인식조사’ 결과 응답자의 52.3%가 “유지하든지 바꾸든지 상관없다”고 답했다. 올해 7년 만에 다시 조사했는데 “상관없다”는 응답자는 45%로 그다지 줄지 않았다. 치매 용어를 유지해야 하는 이유로는 “현재 용어가 익숙해서”, “바꾸면 혼란을 초래할 수 있어서” 등이 나왔다.

21대 국회에선 김두관 민주당 의원이 지난 1월 치매를 ‘인지저하증’으로, 이종성 국민의힘 의원은 지난 1일 ‘인지흐림증’으로 고치자는 법안을 냈고 국회 보건복지위에 아직 논의되지 못한 채 계류 중이다. 이 의원이 제안한 인지흐림증은 보건복지부가 후원한 ‘2021 치매 병명 개정 공모전’에서 대상을 받은 병명이다. 이 의원은 8일 중앙일보와의 통화에서 “그동안 다른 질병으로 혼동될 우려 등 때문에 개정이 번번이 무산돼 왔다”며 “국민들이 관심을 갖도록 병명 개정의 필요성을 충분히 알려서 사회적 합의를 만들어내겠다”고 말했다.

문재인 대통령이 2019년 5월 7일 오전 금천구 치매안심센터에서 치매 어르신 및 가족들과 카네이션을 만들며 대화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문재인 대통령이 2019년 5월 7일 오전 금천구 치매안심센터에서 치매 어르신 및 가족들과 카네이션을 만들며 대화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문재인 대통령도 최근 치매 병명을 개정하려는 움직임에 힘을 실어주는 발언을 했다. 박수현 청와대 국민소통수석은 지난달 26일 자신의 페이스북에서 “9월 21일 ‘치매극복의 날’에 문 대통령이 참모 회의 중 정부의 ‘치매국가책임제’ 시행 4주년을 평가하면서 ‘이제 치매라는 용어도 새롭게 검토할 때가 됐다’고 말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치매 용어를 바꾸는 것만으로 인식 개선이 되지는 않을 것이라고 지적한다. 보건복지부 김지연 치매정책과장은 “치매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과 부정적 편견을 해소하려면 다양한 인식개선 활동과 교육, 홍보 등을 통해 치매친화적 환경을 먼저 조성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김기웅 분당서울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전 중앙치매센터장)는 “병명을 바꾸는 게 효과를 내려면 치매 환자와 그 가족을 잘 관리할 수 있는 실질적인 시스템 마련이 동반돼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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