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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갑자기 인지능력 장애 닥친다면…나도 후견인 둘까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김성우의 그럴 法한 이야기(27)

A(남·73) 씨는 25년간 다니던 대기업을 나와 20여년 전 자신의 사업체를 세워 알차게 일구어 왔다. 큰아들이 회사에서 경영 수업을 받고 있기는 하지만 A씨는 아직도 회장으로서 중요한 사항은 빠짐없이 직접 보고받고 결정하고 있다. 골프 비거리가 꽤 줄었을 뿐 한 주에 한두 번 라운딩하거나 한 달에 한두 번 친구들과 근교 산에 다니는 데에는 체력적으로나 경제적으로 큰 어려움이 없다. 자녀들도 모두 결혼하고 독립했다. 처가 3년 전 유방암으로 일찍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일상생활이 조금 불편하고 때로 외롭다고 느껴지는 것 외에는 남부러울 것도 걱정할 것도 그다지 없다. 그런데 나이가 들수록 친구들이 하나둘 현업에서 은퇴하고, 점점 모임에 나오지 못하는 숫자도 늘고 있다. 한 친구는 지난해 갑자기 뇌출혈로 쓰러져 아직도 의식이 돌아오지 않고 있는데, 아무런 대비가 안 되어 있다 보니 부인과 자녀들이 병원 치료비와 요양 원비의 지급이나 보험금 수령, 남아 있는 재산 처리 문제로 애를 먹고 있다. 다른 한 친구는 벌써 치매가 상당히 진행돼 일상생활조차 거의 힘들게 되었는데, 그 와중에 자식들 사이에 아버지 재산을 두고 진흙탕 싸움을 벌이느라 정작 아버지를 잘 돌보지 않는다고 한다.

A씨는 건강검진을 받아 보면 자잘한 성인병 외에 크게 아픈 곳은 없지만, 요즘 들어 부쩍 기력과 기억력이 떨어지는 것을 느낀다. A 씨는 주위 친구들을 보면서 치매나 뇌출혈, 불의의 사고로 인한 인지능력 장애가 남의 이야기만은 아니라고 느낀다. 자신에게도 언제 찾아올지 알 수 없으며, 만일 자신에게도 그런 상황이 오면 어떻게 될지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불의의 사고에 대비해 보험을 미리 들어 두듯이, 이와 같은 인지능력 장애에 대비하는 방법은 없을까?

성년후견제도는 질병, 노령 등으로 인한 정신적 제약으로 자신의 사무를 스스로 처리할 능력이 없거나 모자란 사람을 후견인이 돕는 제도다. [사진 pixabay]

성년후견제도는 질병, 노령 등으로 인한 정신적 제약으로 자신의 사무를 스스로 처리할 능력이 없거나 모자란 사람을 후견인이 돕는 제도다. [사진 pixabay]

먼저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2013년 7월부터 우리나라에 도입된 성년후견(成年後見)제도다. 성년후견제도는 질병, 노령, 장애 등으로 인한 정신적 제약 때문에 스스로 자신의 사무를 처리할 능력이 없거나 부족하게 된 사람을 다른 사람(후견인)이 돕는 제도다. 정신적 문제의 원인으로는 치매나 뇌출혈 등 뇌 병변이 가장 많고, 조현병과 같은 정신병이나 발달 장애도 있다. 도움을 주는 사무에는 재산에 관한 것도 있지만, 거주지나 치료 방법을 결정하고, 어떤 사람과 만날지, 어떤 복지서비스를 받을지 와 같은 신변에 관한 것도 있다. 후견에는 그 정신적 문제의 정도에 따라 혼자 서는 거의 사무를 처리하지 못할 정도로 중한 경우에 시작되는 좁은 의미의 ‘성년후견’과 일정한 몇몇 사무에 한해 후견인의 도움을 받아 스스로 처리할 수 있는 ‘한정후견’으로 나뉘고, 특정한 사무에 대해 지원을 받는 ‘특정 후견’도 있다. 가족들 사이에 가장 정서적으로 피후견인과 가깝고 피후견인을 잘 돌볼 수 있는 사람, 보통은 가족 중에서 합의로 추천된 사람이 후견인이 되는 것이 일반적이고 바람직하기도 하지만, 가족들이 서로 후견인이 되겠다거나 되지 않겠다고 싸우고 있는 경우에는 변호사나 법무사, 사회복지사와 같은 전문가가 선임되기도 한다.

그런데 이런 내용은 본인이 정신적 제약 상태, 즉 인지능력을 잃은 후에 후견을 시작할 것인지, 시작한다면 어떤 유형의 후견으로 할 것인지, 후견인은 누구로 하고 그 권한의 범위를 어떻게 할지를 모두 법원이 정하는 경우(‘법정후견’)에 주로 해당하는 이야기이다. 법원이 여러 사정을 모두 참작해 잘 정하기는 하겠지만, 법원이 모든 것을 정하게 되면 본인이 원했던 사람이 후견인이 되지 않을 수도 있고, 후견인의 후견업무가 본인의 의사 또는 추정적 의사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갈 수 있으며, 무엇보다 가족들 사이에 다툼이라도 생기게 되면 자신의 신상과 재산의 문제에 가족이 아닌 제삼자가 개입하게 될 우려가 있다.

따라서 후견을 받아야 할 피후견인에게 정신적인 문제가 생기기 전에 후견인을 누구로 할지, 후견인이 어떤 권한을 줄지에 대해 후견인이 될 사람과의 계약을 통해 미리 정해둘 수도 있는데, 이것을 ‘임의후견’이라고 한다. 즉, 아직 본인에게 정신적 문제가 생기기 전이라면 가장 믿을만하고 신뢰할 만한 사람을 후견인으로 미리 정해두고 후견인에게 어떤 권한을 줄지에 대해 ‘후견계약’을 체결해 두는 것이다. 이러한 계약은 공정증서로 작성되고, 법원의 후견등기부에 미리 등기해 두게 된다. 시간이 흘러 치매나 뇌출혈과 같은 이유로 실제로 인지능력을 잃는 상태가 되면, 후견인으로 될 사람이 가정법원으로부터 자신을 감독할 사람(‘임의후견감독인’)을 선임 받은 후, 계약에서 정한 대로 후견업무를 시작하게 된다.

100세 시대에 자신의 삶을 존엄하고 아름답게 정리해야 한다는 생각, 그리고 자신의 노후와 사후를 스스로 결정하여야 한다는 인식이 확대하고 있다. [사진 pixabay]

100세 시대에 자신의 삶을 존엄하고 아름답게 정리해야 한다는 생각, 그리고 자신의 노후와 사후를 스스로 결정하여야 한다는 인식이 확대하고 있다. [사진 pixabay]

언뜻 보면 절차가 복잡하고 비용이 많이 들 것처럼 보이지만, 후견계약의 기본 양식은 인터넷 등에서 쉽게 구할 수 있다. 공정증서 작성이나 등기도 그리 어렵거나 비용이 많이 드는 절차는 아니다. 임의후견은 무엇보다 혹시 자신이 정신적인 어려움을 겪게 되더라도 자기 뜻에 따라 신변과 재산이 보호되고 관리될 수 있다는 무시 못 할 장점이 있다. 후견계약을 공정증서로 작성하는 김에 임의후견인이 될 사람을 유언집행자로 하는 유언공정증서를 함께 작성하여 두면 사무처리의 연속성이라는 측면에서 도움이 될 수도 있다.

가정법원에서 관련 재판을 오랫동안 진행하면서 이미 정신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어 후견계약을 체결할 수 있는 정신적 상태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가족 등 주위 이해관계인에 의해 마치 본인의 진정한 의사인 양 가장해 계약을 체결함으로써 제도를 남용하는 경우를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다. 이처럼 후견계약 체결 당시 본인이 정신적 능력이 있고 진정한 의사에 기한 것인지 아닌지에 대해 가정법원이 심사하게 되므로, 불필요한 분쟁 방지를 위해서는 가급적 계약 전후로 치매를 포함한 건강검진을 받아 자료를 미리 준비해 두는 것이 좋다.

두 번째 방안은 자신의 인지능력 장애에 대비해 미리 특정인에게 특정한 행위에 대한 대리권을 주는 위임계약을 체결해 두는 것이다. 법률상 본인이 능력을 상실해도 대리권이나 위임계약의 효력은 유지되기 때문에, 자신이 인지능력을 상실할 것을 조건으로 대리권을 수여하거나 사무처리에 대해 권한과 의무를 부여하는 방법으로도 자신의 인지능력 상실에 대비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이러한 계약은 임의후견과 달리 수임인이 적정하게 사무를 처리하지 않고 권한남용을 하는 경우 통제방법이 없고, 신상에 관한 사항까지 권한을 가지지 못할 수 있다는 단점이 있다.

요즘 들어 임의후견, 유언대용 신탁, 사전연명 의료의향서를 포함한 사전의료지시서(환자가 자발적 의사 표현을 할 수 있는 상태에서 작성하는 의료에 대한 지시서), 장기기증등록 등이 주목받는 이유는 100세 시대에 자신의 삶을 존엄하고 아름답게 정리해야 한다는 생각, 그리고 자신의 노후와 사후를 스스로 결정하여야 한다는 인식이 확대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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