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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상 묘소 옮기고 靑 점괘 보고…대선전 그들의 '내밀한 조언'

중앙일보

입력

2007년 대선 당시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 캠프에선 “이명박은 ‘금(金)’이 네 개인 다이아몬드 사주”라는 이야기가 공공연히 나돌았다. 가장 단단한 광석인 다이아몬드처럼 강한 기세로 대선에서 무난히 이길 거란 주장이었다. 이때 무소속으로 대선에 출마했던 이회창 전 총재 측에선 “돼지가 뱀을 잡아먹는다”는 역술가들의 전언을 곱씹었다. 돼지띠(1935년생)인 이 전 총재가 뱀띠인 이명박(1941년생)ㆍ정동영(민주당·1953년생) 후보를 이길 거란 주장이었다.

대선 후보들이 유세차량에 오르며 지지자들의 환호에 답하고 있다.

대선 후보들이 유세차량에 오르며 지지자들의 환호에 답하고 있다.

예로부터 정치판에서 사주나 점괘 등의 역술 요소는 자주 등장해왔다. 21세기란 말조차 구문인 2021년 현재도 마찬가지다. 최근 야권에선 윤석열 전 검찰총장으로부터 촉발된 ‘미신 논란’이 연일 대선판을 달구고 있다. 1일 국민의힘 대선 경선 토론회에서 윤 전 총장의 손바닥에 적힌 ‘왕(王)’자가 포착된 게 시발점이다. 윤 전 총장이 김종인 전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을 만나는 자리에 역술가와 동행했다는 소문이 돌면서 정치권 안팎에서 “윤 전 총장이 무속을 믿는 것 아니냐”는 논란이 일었다.

급기야 6일 토론회에선 ‘항문침 전문가’로 알려진 이병환씨 대동설, ‘역술인 천공스승 멘토설’ 등을 둘러싸고 경쟁 주자인 유승민 전 의원과 윤 전 총장 사이에 거친 설전도 벌어졌다. 윤 전 총장 측은 7일 이씨에 대해선 거듭 “모르는 사람”이라고 일축했지만, ‘천공스승’에 대해선 “강의를 봤다. 미신이나 무속과 연결시키는 건 상당히 거리가 먼 얘기”라고 해명했다.

큰 결정이나 신상 변화를 앞두고 점이나 사주를 보는 일은 흔한 풍경이다. 그러나 ‘대운’을 노리는 정치권에선 풍수나 역술에 대한 관심이 유별나다. 대선을 앞두고 정치권에선 이름이 알려진 역술가를 만나거나 풍수를 따져서 캠프 사무실을 정하는 등의 ‘내밀한 조언’이 오간다. 국민의힘 관계자는 “대선을 앞두고 어느 후보가 사주 한 번 안 봤겠느냐. 공개가 되지 않을 뿐”이라고 귀띔했다.

국민의힘 대선주자 윤석열 전 검찰총장이 TV토론회 당시 손바닥 한가운데에 ‘왕(王)’자를 그려놓은 장면이 카메라에 포착됐다. MBN 유튜브 캡처

국민의힘 대선주자 윤석열 전 검찰총장이 TV토론회 당시 손바닥 한가운데에 ‘왕(王)’자를 그려놓은 장면이 카메라에 포착됐다. MBN 유튜브 캡처

김대중(DJ) 전 대통령이 세 차례 대선에서 패한 뒤 부모의 묫자리를 옮겨 ‘대선 4수’에 성공했다는 일화는 널리 알려져 있다. DJ는 7ㆍ13ㆍ14대 대선에서 낙선한 뒤 네 번째 대선 도전을 앞둔 1995년, 전남 신안군 하의도에 있는 부친 묘와 경기도 포천 천주교공원묘지에 있던 모친 묘를 경기도 용인시 묘봉리산에 합장했다. 당시 풍수를 본 지관으로 알려진 육관 손석우씨는 언론 인터뷰에서 해당 묘소를 “하늘에서 신선이 내려오는 천선하강형(天仙下降形) 명당”이라고 소개했다.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 역시 2004년과 2007년, 2010년 등 세 번에 걸쳐 부모와 직계 조상의 묘를 이장했다. 2002년 대선 낙선 후인 2004년 부친 묘소를 이장한 충남 예산군 녹문리 선영은 ‘제왕이 태어날 지세’ ‘선비가 앉아서 책을 보는 지세’ 등의 명당으로 알려진 곳이다. 2002년 대선을 앞두고 당시 한화갑 민주당 대표도 선친의 묘소를 ‘명당’으로 이장했다. 대선을 앞둔 시기는 아니었지만, 2019년 1월 유홍준 당시 광화문대통령시대위원회 자문위원이 '대통령 집무실 광화문 이전 무산'을 발표하면서 “풍수상의 불길함을 생각할 때 옮겨야 하는데…”라고 했다가 당시 야권으로부터 “우주탐사를 하는 첨단과학의 시대에 잠꼬대 같은 소리”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청와대에 입성한 후 역술인의 점괘를 보고받은 경우도 있다. 2019년 이재정 민주당 의원은 “이명박ㆍ박근혜 전 대통령 재임 기간 청와대가 정보 경찰로부터 역술인 점괘를 보고받았다”고 주장했다. 당시 이 의원실에 따르면 청와대는 2010·2013·2014년 세 차례에 걸쳐 ‘역술인 새해 국운 전망’ 보고서를 경찰로부터 보고받았다.

2013년 말 작성된 보고서에는 박 전 대통령에 대해 “대통령께 ‘언 땅에 꽃을 피우는 사주’와 대운이 오면서 국운에 영향을 미칠 것”, “대운이 2014년부터 점차 강해질 것”이라는 내용이 담겼다. 특히 국정분야별로 “대통령님(金)과 일본 아베(火)는 상극이지만 중국 시진핑(土)은 상생”(2013년)이라며 주변국과의 관계를 사주 풀이한 내용이 공개되기도 했다.

정치권에선“이성적으로 보여야 할 대선 후보가 미신과 관련된 논란에 휩싸이는 건 바람직하지 못하다”는 비판이 나온다. 최창렬 용인대 교양학부 교수는 “일반인이 점을 보는 건 문제 될 사안도 아니고, 정치인들도 대선을 앞두고 알음알음 역술가를 찾는다”면서도 “국정을 운영하겠다는 대선 후보가 공개적으로 역술과 관련된 얘기를 주고받게 되면 국민에게도 신뢰를 주기 어렵다”고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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