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천국, 불신 지옥’…천국행 티켓 예약했다는 그들의 착각 [백성호의 예수뎐]

중앙일보

입력 2021.10.09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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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호의 예수뎐]

“주님! 주님!” 하며 예수를 쫓았던 유대인들은 한둘이 아니었다. 그들은 대부분 예수에게 이적을 기대했다. 물을 포도주로 바꾸고, 맨발로 물 위를 걷고, 죽은 사람을 살리는 기적. 그런 기적을 두 눈으로 직접 보고 싶어 했다. 이를 통해서만 예수가 메시아라는 사실을 믿으려 했다.

예수 당시 유대인들은 끊임없이 예수에게 이적을 보여달라고 요구했다. 그래야 예수가 하느님의 아들임을 믿을 수 있다고 했다.

예수 당시 유대인들은 끊임없이 예수에게 이적을 보여달라고 요구했다. 그래야 예수가 하느님의 아들임을 믿을 수 있다고 했다.

(21)예수가 말한 천국의 문은 달랐다

그들에게는 예수의 메시지, 복음이 1순위가 아니었다. 그들에게 1순위는 이적이었다. 그러니 유대인들의 성화가 오죽했을까. 성서에는 그들을 향한 예수의 직설적인 꾸지람이 기록돼 있다.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복음 7장 21절)

깜짝 놀랄 일이다. 지금도 ‘예수 천국, 불신 지옥’을 도식적으로 믿는 이들이 많다. 심지어 “나는 이미 구원을 받았다”라고 선언하는 이들도 있다. 그들도 하나같이 “주여! 주여!” 하며 예수를 따른다. 그렇게 따르기만 하면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여긴다. 이미 자신의 이름이 박힌 천국행 티켓이 예약돼 있다고 믿는다.

예수가 제시한 천국의 문은 달랐다. 하늘나라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자라야 들어갈 수 있다고 했다.

예수가 제시한 천국의 문은 달랐다. 하늘나라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자라야 들어갈 수 있다고 했다.

정작 예수는 손을 내저었다. “주여!” “아멘!” “할렐루야!”를 소리 높여 외친다고 해서 모두 천국에 가는 건 아니라고 말했다. 2000년 전 예수에게서 그 말을 직접 들은 유대인들은 표정이 어땠을까. 그들은 배신감을 느끼지 않았을까. ‘예수 천국, 불신 지옥’의 절대 공식을 부정하는 예수에게서 낭패감을 맛보지 않았을까.

우리는 쉽게 말한다. “예수를 믿으면 천국에 간다.” 그런 우리를 향해 예수는 되묻는다. “예수를 믿는다고 할 때 ‘믿는다’의 의미가 뭔가. 네가 생각하는 ‘믿음’이란 무엇인가.” 그렇게 되묻는다. 우물쭈물하는 우리를 향해 예수는 이렇게 답을 건넨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하늘나라에) 들어간다.”

불교에도 그런 문이 있다. 깨달음의 세계로 들어가는 문이다. 이름은 ‘불이문(不二門)’이다. 그 문을 통과하려면 조건이 있다. 깨달음의 세계와 나의 세계가 둘이 아니어야 한다. 차안(此岸, 속세의 땅)과 피안(彼岸, 깨달음의 땅), 그 둘의 속성이 통해야 한다. 그래야 그 문을 통과할 수 있다. 그래서 ‘불이(不二)’의 문이다.

예수 당시에도 많은 유대인이 "주여, 주여"하면서 도식적인 신앙의 행태를 보였다. 예수는 이런 이들을 강하게 꾸짖었다.

예수 당시에도 많은 유대인이 "주여, 주여"하면서 도식적인 신앙의 행태를 보였다. 예수는 이런 이들을 강하게 꾸짖었다.

사람들은 투덜댄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이라야 하늘나라에 들어간다”라는 예수의 말 때문이다. 그 말이 천국의 문턱을 한껏 높였다고 말한다. 그래서 천국에 들어갈 사람이 대폭 줄었다고 불평한다. “그렇게 높은 기준치를 들이대면 누가 그 문턱을 넘을 수 있을까!” 하고 따진다.

그건 잘못된 이해다. 예수는 엉뚱한 곳을 향해 엉뚱한 방식으로 가고 있는 사람들에게 길을 일러줬을 뿐이다. 그쪽으로 가면 서울이 아니라 부산이라고, 그리로 가면 서울이 아니라 광주라고, 그런 식으로는 서울에 갈 수 없다고 말이다.

예수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서울로 가는 이정표까지 일러주었다. “아버지의 뜻을 행할 때 비로소 천국에 간다”라고 말이다. 그러니 예수의 지적은 천국의 문턱을 높인 게 아니라 오히려 문턱을 낮춘 셈이다. 부산으로 가고 있는 사람들을 서울로 불러, 어떻게 해야 서울로 입성할 수 있는지 계단까지 놓아주었다. 예수가 제시한 일종의 나침반이다.

‘예수의 나침반’을 행동 강령으로만 받아들이는 사람도 있다. 성서 속 예수의 메시지는 맹목적인 행동 강령이 아니다. 무작정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데만 치중하다가 자칫하면 율법주의자가 되고 만다. 예수 당시의 바리새인들도 그랬다. 그들도 구약에 있는 ‘하느님의 뜻’을 문자적으로 행하다가 형식주의자가 되고 말았다.

유대인들이 이스라엘 예루살렘의 통곡의 벽 앞에서 두 손을 댄 채 기도하고 있다.

유대인들이 이스라엘 예루살렘의 통곡의 벽 앞에서 두 손을 댄 채 기도하고 있다.

율법이야말로 천국의 열쇠라고 믿는 유대인들을 향해 예수는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있는 것"이라며 파격적인 선언을 했다.

율법이야말로 천국의 열쇠라고 믿는 유대인들을 향해 예수는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있는 것"이라며 파격적인 선언을 했다.

그럼 예수는 왜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행하라”라고 했을까. 거기에는 이치가 녹아 있다. 불이문을 통과하는 방법과도 통한다. 우리는 땅에 있고, 아버지는 하늘에 있다. 그래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다. 하늘의 속성과 아버지의 속성은 통한다. 하늘이 곧 아버지이므로. 그래서 ‘아버지의 뜻’에는 하늘의 속성이 담겨 있다.

그런 ‘아버지의 뜻’을 우리가 실행하면 어찌 될까. 땅에 선 우리가 하늘의 뜻을 실행하면 어찌 될까. 그렇다. 속성이 바뀌기 시작한다. 땅의 속성이 하늘의 속성으로 바뀌기 시작한다. 우리의 속성이 아버지의 속성을 닮아간다. 이를 통해 간격이 좁아진다. 아버지와 나, 그 사이의 간격이 좁아진다. ‘나의 속성’이 ‘아버지의 속성’과 갈수록 닮아간다. 그렇게 나와 아버지가 서로 통하게 된다.

그래서 예수는 말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하늘나라에) 들어간다.”

〈22회에서 계속됩니다. 매주 토요일 연재〉

짧은 생각
2000년 전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땅에 ‘예수’라는 이름의 젊은이가 나타났습니다.
예수는 당시 유대인들이 ‘절대 금기’로 여기던 땅을 건드렸습니다.

그게 뭘까요.
다름 아닌 율법입니다.

유대교는 선교 활동을 하지 않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해외로 선교사를 보내지도 않고,
유대교를 믿으라고 권하지도 않습니다.

이유가 있습니다.
하느님이 구원을 약속한 민족은 유대인뿐입니다.
유대교의 구원은 배타적입니다.
유대인이 하느님이 주신 율법을 지키면,
그 대가로 구원이 약속돼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유대인은 자신들을 ‘선택 받은 민족’이라고 생각합니다.
2000년 전에도 유대인에게는 그러한 ‘금기의 영역’이 있었습니다.

예수는 그걸 건드렸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이 율법 중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겼던 게
안식일을 지키는 일이었습니다.
그걸 지켜야만 유대인에게 약속된 구원이 온다고 믿었습니다.

예수는 ‘금기의 땅’을 건드렸습니다.
심지어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다.”

고대 유대 사회에서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 사람은 사형에 처했습니다.
그러니 예수의 이 말이 얼마나 파격적이고 혁명적인 말이었겠습니까.
당시 유대 사회를 지탱하던 가장 핵심적인 기둥을 때렸으니까요.

유대인은 결국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아 숨지게 했습니다.
안식일에 대한 예수의 파격적 선언은
십자가 처형의 주요한 이유 중 하나였습니다.

예수는 유대인이었습니다.
안식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예수가 몰랐을리 없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는 왜 ‘안식일’이 아니라 ‘사람’에 방점을 찍었을까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그게 하늘의 이치에 맞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종종 “예수 천국, 불신 지옥”을 외치는 사람들을 봅니다.
그런 사람들을 볼 때마다 저는 2000년 전의 유대인들이 떠오릅니다.
그게 ‘율법 천국, 불신 지옥’과 과연 무엇이 다른 걸까요.

예수님은 달리 말했습니다.
주여, 주여 외친다고 천국에 가는 게 아니라고 했습니다.
대신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이라야 하늘나라에 간다고 했습니다.

취재를 하면서 종종 그리스도교의 영성가들을 만납니다.
그들의 기도는 하나 같이 똑같았습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묻는 기도였습니다.
내 뜻을 아버지가 들어주길 요구하는 기도가 아니라,
내 뜻을 부수고 아버지의 뜻을 듣고자 하는 기도였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들은 알기 때문입니다.
무엇이 천국의 문을 넘게 하는지 말입니다.

예수님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이라야 하늘나라에 간다”고
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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