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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레반 관대, 美가 싫다”…밖에선 모르는 아프간 ‘숨은 진실’

중앙일보

입력

지난 8월 아프간을 탈출한 사람들이 프랑스로 가는 프랑스 수송기에 탑승하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 8월 아프간을 탈출한 사람들이 프랑스로 가는 프랑스 수송기에 탑승하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 8월30일 미군의 마지막 수송기가 아프가니스탄(아프간) 수도 카불의 국제공항에서 떠난 지 40여 일이 지났다. 세계인의 뇌리에는 당시 아프간인들이 조국을 탈출하기 위해 미국과 동맹국 수송기에 절박하게 매달리던 장면이 생생히 각인됐다. 현재 아프간에 남겨진 이들은 미국을 그리워하며 탈레반을 증오하고 있을까.

6일(현지시간) 워싱턴포스트(WP)는 이 같은 의문에 대해 “아니다”고 보도했다. WP는 아프간 시골마을 주민들을 밀착 취재한 뒤 “이들에게 미국은 그저 갈등과 잔혹함·죽음의 상징일 뿐”이라며 “국제사회와 수도 카불 등 대도시에 거주한 일부 아프간인들이 ‘미국이 아프간에 여성 권리 신장과 언론의 자유, 교육의 진보를 가져왔다’고 생각한 것과 엄청난 차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미국에 대한 이 같은 인식차가 탈레반이 어떻게 아프간을 신속하게 장악했는지 설명할 수 있는 하나의 단서”라고 덧붙였다.

“탈레반이 보호할 때 미군이 죽였다”

미군에 대한 반감은 20년이라는 긴 전쟁 동안 인명과 재산 피해가 반복되면서 커졌다. 수도 카불 인근의 농촌마을 신자이(Sinzai)에는 과수원과 무너진 건물터, 부서진 자동차 등 곳곳에 흰색 깃발이 꽂혀 있다. 미군 공습으로 사망자가 발생한 지점을 표시해둔 것이다. 이곳 주민 자비울라 하이데리(30)는 “여기 모든 사람이 미국을 싫어한다”고 잘라 말했다. 그의 가게는 2019년 미군 공습 때 산산이 부서졌다. 당시 공습으로 하이데리의 상점뿐 아니라 16개의 가게가 불탔고 민간인 12명이 죽었다. 하이데리는 “미군은 민간인을 살해하고 잔학 행위를 저질렀다”고 말했다.

아프가니스탄 농촌마을 신자이에는 미군공습으로 사망자가 발생한 지점에 흰 깃발을 꽂아놨다. [인터넷 캡처]

아프가니스탄 농촌마을 신자이에는 미군공습으로 사망자가 발생한 지점에 흰 깃발을 꽂아놨다. [인터넷 캡처]

2012~2013년에는 와르닥(Wardak)에서 미군 육군 특수부대인 A팀이 최소 18명의 아프간 민간인을 살해했다는 혐의가 제기됐다. 2009년에는 미군 병사가 이슬람 경전인 코란을 불태웠다는 주장도 나왔다. 미군은 이에 대해 부인했지만 와르닥 주민들의 반감은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인근 네르크(Nerkh)는 탈레반과 미군의 지원을 받는 정부군이 나눠 통제했었다. 당시 마을 주민들은 평범한 선택을 할 때도 항상 생사의 기로에 서야했다. 한 주민은 “면도를 하면 탈레반이, 수염을 기르면 정부군이 날 죽이려 했다”고 말했다.

유엔 데이터를 분석한 런던의 비영리단체 AOAV에 따르면 2016~2020년 아프간에서 공습으로 2122명의 민간인이 사망하고 1855명이 부상당했다. 공습으로 가게를 잃은 모하메드 칸(32)은 “미군은 현대적인 비행기와 드론을 동원해 무차별 폭격을 했다. 탈레반이 우리를 보호하는 동안 미국이 죽였다”고 말했다.

“보상도, 책임지는 사람도 없었다”

피해는 컸지만 미국과 국제사회의 원조는 농촌마을까지 닿지 못했다. 수도 카불에서 자동차로 2시간이 채 걸리지 않는 신자이와 인근 마을의 민가에는 미군 주둔 시기에도 전기와 수도가 공급되지 않았다. 유일한 전기는 태양열을 이용한 동력이고, TV는 마을 전체에 한 대도 없다.

지난해 발간된 미 의회 보고서에 따르면 재건 비용 1430억 달러(약 168조원) 중 190억 달러(약 22조3250억원)는 행방이 묘연하다. 미국 정부의 자체 감시기관은 아프간에서 수도 카불 외 지역에 대한 재건 노력은 불안정했고, 관리들의 부패와 비효율로 인해 번번이 좌절됐다고 인정했다.

재산을 잃고 가족과 친척이 죽었지만 미군이나 정부로부터 어떤 보상도 받지 못한 아프간인들은 속속 탈레반 지지로 돌아섰다. 하이데리는 “2019년 미국 공습 때 도청 사무실로 찾아가 민원을 제기하고 피해 보상을 요구했지만 아무런 답변도 듣지 못했다”고 분통을 터트렸다. 마울라비 샤피쿨라 자키르(33)는 “공습으로 인한 반복적인 피해,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태도에 화가 나서 탈레반에 가담했다”고 말했다.

아슈라프 가니 전 아프간 대통령. 그는 탈레반이 카불을 점령하자 곧바로 해외로 도주해 질타를 받았다. 연합뉴스

아슈라프 가니 전 아프간 대통령. 그는 탈레반이 카불을 점령하자 곧바로 해외로 도주해 질타를 받았다. 연합뉴스

“샤리아법? 문제될 것 없다”

탈레반은 여성 인권 탄압과 샤리아법(이슬람 종교법)을 내세운 공포정치로 국제 사회의 지탄을 받아왔다. WP는 “농촌마을은 도시에 비해 교육 수준이 낮고 보수적이라 이에 대한 반감이 적다”고 설명했다. 신자이의 이맘(이슬람교단 조직의 지도자 중 한 직책)인 모하메드 오마르는 “신성한 것이므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했다.

탈레반은 재집권 후 마을의 농장이나 가게 수익의 10%를 세금으로 떼가고 있다. 하지만 주민들은 “탈레반이 생각보다 관대하다”고 평가한다. 마을 사람들이 집에서 스마트폰으로 음악을 듣거나 영화를 보는 것을 허용했다는 것이다. 또 마을을 순찰하면서 무력을 사용하기보다는 율법에 대해 길게 설교를 하는 식이라고 말했다. 오마르는 “(탈레반 집권으로) 평화와 안전이 찾아왔고 죽음이 사라졌다”고 말했다.

부르카를 입은 아프간 여인들. 중앙포토

부르카를 입은 아프간 여인들. 중앙포토

이들은 탈레반보다 도시 엘리트들에 대한 혐오가 컸다. 미국과 국제기구의 원조를 그들이 모두 가로챘다고 생각해서다. 하이데리는 “2019년 공습이 있은지 2년이 지났지만 우리는 여전히 재건하지 못했고 가족을 먹여살리기 어렵다”며 “우리를 도와야 할 돈이 카불의 음흉한 관리들과 부패한 정치인들 주머니로 들어갔다”고 말했다. 카불 공항에서 필사의 탈출을 감행한 이들에 대해서도 적개심을 나타냈다. 하이데리는 “그들은 미국의 원조를 가로채 자기 배만 채웠고, 탈레반이 들어오자 호화로운 해외생활을 즐기러 도망친 것”이라고 했다.

탈레반이 재장악한 아프간을 떠나기 위해 카불 국제공항에서 미군수송기를 기다리는 사람들. 연합뉴스

탈레반이 재장악한 아프간을 떠나기 위해 카불 국제공항에서 미군수송기를 기다리는 사람들. 연합뉴스

WP는 “미국은 아프간에서 정의를 세우지 못했고, 그로 인해 탈레반이 기회를 잡게 됐다”면서 “오히려 현재 탈레반의 집권을 위협하는 건 (미군이 아닌) 굶주림과 경제난”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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