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난징 접수한 중공 “미, 국민당 도망정부와 단절하라”

중앙선데이

입력 2021.10.09 00:21

지면보기

757호 29면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697〉

중국을 떠나는 스튜어트. 1949년 8월 2일, 난징. [사진 김명호]

중국을 떠나는 스튜어트. 1949년 8월 2일, 난징. [사진 김명호]

1949년 4월 21일 새벽, 베이징 교외에 머물던 마오쩌둥이 붓을 들었다. 각 야전군과 남방의 유격부대에 보낼 진군명령서를 일필휘지(一筆揮之)했다. “우리에게 저항하는 국민당 반동파를 단호하고, 철저하고, 깔끔히 제거해라. 전국의 인민을 해방하고 주권의 완벽한 독립을 보위해라.”

동틀 무렵, 장강(長江) 연안 500㎞에 포진해있던 중공야전군 100만여 명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장강을 도하하는 1만여 척의 나룻배와 어선이 수면을 수놓았다. 국민당 군의 장강 방어선은 중공야전군의 강공에 붕괴됐다. 4월 23일, 포구를 점령한 중공야전군이 수도 난징(南京)에 모습을 드러냈다. 국민당 군정 요원과 공직자들은 살길 찾기에 분주했다. 재주껏 뿔뿔이 흩어졌다. 국민정부는 예정했던 광둥(廣東)성 광저우(廣州)로 천도했다.

장제스, 총통 하야 선언 후 낙향

스튜어트가 중국을 떠난 후 키신저가 극비리에 베이징을 방문하기까지 22년이 걸렸다. 1971년 7월 9일, 전인대 위원장 예젠잉(葉劍英.왼쪽 둘째)과 함께 키신저를 맞이하는 황화(왼쪽 셋째). [사진 김명호]

스튜어트가 중국을 떠난 후 키신저가 극비리에 베이징을 방문하기까지 22년이 걸렸다. 1971년 7월 9일, 전인대 위원장 예젠잉(葉劍英.왼쪽 둘째)과 함께 키신저를 맞이하는 황화(왼쪽 셋째). [사진 김명호]

지난 몇 주간 중국은 복잡했다. 총통 장제스(蔣介石·장개석)는 하야를 선언하고 낙향했다. 총통 권한대행 리쭝런(李宗仁·이종인)은 베이징에서 중공과 평화회담을 벌였다. 승리를 눈앞에 둔 중공은 성의가 없었다. 미국의 주중대사 스튜어트는 평화회담이 흐지부지될 것을 예감했다. 난징이 함락됐을 경우에 대비해 국무부에 “중공 고위층과 접촉을 허락해 달라”는 전문을 보냈다. 비준을 받은 스튜어트는 중공야전군 도강 10일 전 이런 일기를 남겼다. “온종일 측근들과 대사관 이전문제 놓고 토의했다. 국민정부와 함께 광저우로 가자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나는 난징을 떠나기 싫다. 근거리에서 중공과 접촉해 중·미 양국 관계에 관한 의견을 나누고 싶다.”

4월 22일 난징 함락 전야, 국민정부 외교부장이 스튜어트를 방문했다. 미국대사관의 광저우 이전을 청했다. 스튜어트는 확답을 주지 않았다. 중공 수뇌부도 스튜어트를 잊지 않았다. 은밀히 접촉할 방법을 찾았다. 부주석 저우언라이(周恩來·주은래)에게 마오쩌둥이 톈진(天津) 군사관제위원회 외사처 주임 황화(黃華·황화)를 추천했다. 황은 옌칭(燕京)대학 재학시절 미국기자 에드거 스노를 홍군 근거지 바오안(保安)까지 안내했다. 마오와 중국 홍군의 진면목을 세계에 알린 『중국의 붉은 별』 출간 계기를 마련한 장본인이었다.

중공야전군의 장강 도강 직전 저우언라이가 황화를 불렀다. “며칠 후 난징이 해방된다. 난징에 가서 외사 업무를 관장해라. 미국대사 스튜어트가 난징을 떠나지 않았다. 옌칭대학 교우들과 스튜어트를 사적으로 접촉해라.” 황화의 회고록에 이런 구절이 있다. “난징으로 출발하기 전 저우 부주석이 다시 나를 불렀다. 스튜어트는 선교사 출신이라 말이 많다. 대화 속에 미국 정부의 대중국정책이 있을 수 있다. 사소한 내용도 빼놓지 말고 보고하라고 당부했다. 차 마실 때 기도하고, 예수 초상화 보면 부동자세로 잠시 고개 숙이라는 말도 잊지 않았다.”

중국에 주둔하던 미군 장교들은 중국 검술을 즐겼다. 1946년 가을 베이징. [사진 김명호]

중국에 주둔하던 미군 장교들은 중국 검술을 즐겼다. 1946년 가을 베이징. [사진 김명호]

난징에 온 황화는 국민당 정부 외교부 청사를 접수했다. 난징의 외국인들은 중공이라면 치를 떨었다. 프랑스혁명 시절 자코뱅당보다 더 지독하다는 생각이 강했다. 황은 스튜어트 측에서 연락 오기를 기다렸다. 5월 6일 스튜어트가 개인비서 푸징풔(傅涇波·부경파)를 통해 황과의 만남을 시도했다. 옌칭대학 출신들에게 푸는 스튜어트의 분신이나 다름없었다. 황을 만나자 스튜어트 옹호에 열중했다. “대사는 1년 전부터 지난날 국민당에 대한 인식이 착오였음을 인정했다. 미국은 이미 장제스 지원을 중단했다. 난징을 떠나지 않은 이유는 중국공산당과 접촉을 희망했기 때문이다. 국무장관 애치슨도 동의했다.”

보고를 받은 마오쩌둥이 난징시 위원회에 전문을 보냈다. “황화와 스튜어트의 만남을 허락한다. 미국 정부의 의향과 목적을 세밀히 관찰해라. 스튜어트와 주고받은 약속은 지킬 이유가 없다. 쌍방은 외교관계를 맺은 적이 없다. 스튜어트의 태도가 우호적이면 황화도 우호적인 태도를 취하되 과한 표현은 자제해라. 푸징풔가 스튜어트와의 만남을 요구하면 언제건 응해라.”

마오쩌둥의 지시를 접한 황화는 5월 13일 밤 개인 자격으로 스튜어트를 방문했다. 1995년 11월, 이런 구술을 남겼다. “스튜어트는 신중국과 새로운 관계 맺기를 원했다. 민주인사들을 과감히 흡수하라는 조언도 빠뜨리지 않았다. 나는 칭다오(靑島)에 정박 중인 미 해군 함대와 해병대 철수를 요구했다. 2주 후, 미국함대가 칭다오를 떠났다.”

스튜어트는 1개월간 황화와 다섯 번 만났다. 한번은 황화가 이런 제안을 했다. “새로운 관계를 수립하려면 미국이 할 일이 있다. 국민당 원조를 정지하고 광저우에 차린 국민당 도망정부와 관계를 단절해라.” 스튜어트는 폭소를 터뜨렸다. “도망정부라는 말은 처음 들어본다. 내가 난징을 떠나지 않은 것이 국민당에 대한 미국의 입장이다. 국민당 정부가 광저우에서 다른 곳으로 이동해도 동행할 생각이 없다.”

미국 전략기지, 중국서 일본으로

2008년 11월 17일, 60년 만에 고향 항저우로 돌아온 스튜어트의 골회(骨灰) 안장식에서 헌화하는 옌칭대학 졸업생. [사진 김명호]

2008년 11월 17일, 60년 만에 고향 항저우로 돌아온 스튜어트의 골회(骨灰) 안장식에서 헌화하는 옌칭대학 졸업생. [사진 김명호]

황화는 스튜어트의 요구라면 다 들어줬다. 3야전군이 점령한 상하이 방문 요청도 수락했다. 경호원까지 대동한 스튜어트는 상하이 영사관 잔류인원과 미국 교민들의 안전을 보장받았다. 자신이 생기자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를 만나고 싶었다.

황에게 이유를 설명했다. "내전 기간에 쌓인 적의(敵意)를 해소시키는 것이 목적이다. 신중국이 소련에 기대면 독립을 유지하기 힘들다. 중국의 경제회복과 발전을 위해 20억 달러를 저금리로 지원하겠다. 옌칭대학 개교기념일 참석을 이유로 베이징에 가서 마오와 저우를 만나고 싶다.” 6월 29일 황이 정식으로 통보했다. "마오 주석과 저우 부주석도 선생의 방문을 환영한다.” 중공의 초청을 받은 스튜어트는 국무장관 애치슨에게 허락을 청했다. 국무부는 스튜어트의 요청을 거부했다. 이유가 있었다. 국민당 정부가 무너지자 동아시아의 전략 중점기지를 중국에서 일본으로 바꿨기 때문이다.

베이징행이 좌절된 스튜어트는 광저우로 가라는 국무부의 지시를 따르지 않았다. 귀국을 자청했다. 귀국 도중 오키나와에서 성명을 발표했다. "상무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중공을 승인해야 한다.” 국무부는 발끈했다. 워싱턴으로 돌아온 스튜어트에게 강연, 미·중 관계 언급, 기자회견, 세 가지를 불허했다.  〈계속〉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

Innovation Lab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