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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통신사의 선린외교 배워, 한·일 교류 물꼬 터야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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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7호 27면

전 아사히신문 기자의 ‘일본 뚫어보기’

2018년 5월 부산 중구 용두산공원과 광복로 일대에서 재현된 조선통신사 행렬. 송봉근 기자

2018년 5월 부산 중구 용두산공원과 광복로 일대에서 재현된 조선통신사 행렬. 송봉근 기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일본 군함도에 관해선 여러 가지 논란이 제기됐다. 당초 일본의 약속과는 달리 한국인 강제동원 피해 사실을 알리는 내용이 제대로 전시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군함도처럼 큰 관심을 끌지는 못했지만 한·일 공동으로 등재된 문화재가 있다. 2017년 세계기록유산이 된 조선통신사에 관한 기록이다. 한·일 평화구축과 문화교류의 소중한 기록물로 평가받았다. 조선통신사는 1607년부터 1811년까지 일본 에도 막부의 초청으로 12회에 걸쳐서 조선에서 일본으로 파견됐던 외교사절단이다.

지난달 부산에서 한·일 온·오프라인 토크콘서트 ‘너에게 닿기를’(부산시 주최, 부산문화재단 주관)이 열려 나도 참석했다. 부산문화재단은 조선통신사의 세계기록유산 등재에 중심적인 역할을 한 단체다. 토크콘서트는 문학, 영화, 연극 등 분야의 한·일 관계자가 모여 조선통신사에 대해 배우면서 앞으로의 한·일 문화교류에 대해 생각하자는 취지로 열렸다.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저자인 유홍준 명지대 석좌교수의 기조강연 중 인상적이었던 건 “한국사가 한반도에서 일어난 사건 사고의 역사로만 인식돼서는 안 된다”는 부분이다. 임진왜란, 정유재란과 일제 강점기 사이엔 한·일 간에 조선통신사라는 우호적인 역사도 있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고 새로 들어선 도쿠가와 막부가 조선에 국교 재개를 요청하면서 조선통신사가 일본을 방문하게 된 것이다. 관계가 험악한 시기가 있으면 또 관계를 회복하려는 시기도 있는 법이다.

조선통신사, 유네스코 기록문화재 등재

일본 개봉을 앞둔 영화 ‘자산어보’의 장면들. [사진 메가박스중앙]

일본 개봉을 앞둔 영화 ‘자산어보’의 장면들. [사진 메가박스중앙]

이는 역사 인식의 문제뿐 아니라 평소의 뉴스에서도 마찬가지다. 위안부나 징용 문제 등 갈등은 많이 보도되지만 한·일 문화교류에 대해서는 잘 다루어지지 않는다. 자극적인 뉴스가 주목받기 쉽기 때문이다. 그런데 보도를 통해 실제 이상으로 ‘혐한’과 ‘반일’이 크게 느껴져 서로 오해가 생기고 있다.

지난여름에 코로나19로 인해 해외여행을 못 가는 일본 학생들을 대상으로 온라인 수학여행을 실시했다. 온라인으로 서울과 부산의 여행을 체험하는 기획으로 총 1500명이 참가했는데 나는 현지 리포터 역할로 참여한 관계로 여행 후 학생들의 소감을 읽을 기회가 있었다. 그중엔 “지금까지 한국은 반일이라고 생각했고, 한국에 대한 이미지도 좋지 않았지만 이번 여행을 통해 한국에도 좋은 점이 많다고 느꼈다. 언젠가 한국에 가서 직접 그걸 느끼고 싶고 국제교류가 활발해졌으면 좋겠다”는 소감도 있었다. 한국에 가 본 적이 없는 중학생의 말이다. 이 학생이 한국에 대한 부정적 시각을 갖게 된 데는 일본 언론의 책임이 큰 것 같다.

한·일 토크콘서트에 참석한 필자 나리카와 아야(오른쪽). [사진 부산문화재단]

한·일 토크콘서트에 참석한 필자 나리카와 아야(오른쪽). [사진 부산문화재단]

예상보다 훨씬 많은 일본 학생이 한국에 관심이 많았고 한국에 대해 아는 것도 많다는 점에 놀랐다. 개인적으로 참가한 학생도 있지만 학교 단위로 단체로 참가한 경우가 많아 한국에 관심 없는 학생도 많을 거라고 예상했다. 그런데 소감을 아예 한국어로 쓴 중학생도 있었고 K-POP이나 한국드라마, 한국음식 등을 계기로 한국에 관심을 갖게 됐다는 학생이 대부분이었다. 이렇게 일본 젊은 세대는 한국에 대해 우호적인 생각을 갖고 있다고 양국 정치인이나 한국의 중고생들에게 보여 주고 싶을 정도였다.

내가 중고생이었던 건 20년 이상 전이지만 그 당시 친구들 사이에서 한국에 대한 대화를 나눈 기억이 없다. 친구들이 한국에 대해 아는 건 ‘김치’ 정도였을지도 모른다. K-POP도 한국드라마도 본격적으로 일본에 들어온 건 2000년대 내가 대학생이 되고 나서였다. 20년 후 지금 중고생들이 사회의 중심에서 활약하는 세대가 되면 한·일 관계도 자연스럽게 나아지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느꼈다.

유홍준 교수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는 일본어로도 번역출판돼서 한국에 관심 있는 일본사람 중에 그 책을 읽었다는 사람도 적지 않다. 나도 읽었다. 유 교수가 강연 때 조선통신사의 제술관으로 일본에 다녀온 신유한의 기행문 『해유록』에 대해 설명하는 걸 들으면서 유 교수야말로 현대의 조선통신사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신유한은 일본 여행길에서 얻어들은 일본의 관직제도, 세법, 군사제도, 경제 상황, 생활풍습 그리고 직접 보고 체험한 일본의 풍광, 문인들과의 교류 경험 등을 생생하게 기록했다고 한다.

200년 전 당시 조선통신사를 태운 통신사선을 그대로 재현한 선박. 송봉근 기자

200년 전 당시 조선통신사를 태운 통신사선을 그대로 재현한 선박. 송봉근 기자

유 교수도 한국의 지방뿐만 아니라 일본이나 중국에 대해서도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를 통해 여러 각도로 전달해 왔다. 유 교수가 소개한 『해유록』 내용 중에는 “일본 음식 차림은 매우 간소하다. 다 먹으면 덜어서 먹기 때문에 남기는 일이 없다”라고 쓴 부분이 있다. 나는 이 말을 듣고 ‘옛날에도 그랬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웃었다.

온라인 수학여행 참가 학생 중에 소감과 함께 한국과 일본의 음식문화 차이를 쓴 학생이 있었다. 그는 “일본은 음식을 남기지 않는 것이 매너지만 한국에서는 안 남기면 ‘부족하다’는 뜻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남기는 것이 매너”라고 했다. 한국에서도 최근엔 남기지 않는 매너로 바뀌고 있지만 신유한과 비슷한 글을 보고 반가웠다.

조선통신사는 일본 에도 막부 초청으로 12회에 걸쳐 조선에서 일본으로 파견됐던 외교사절단이다. 사진은 조선통신사행렬도. [사진 부산광역시립박물관]

조선통신사는 일본 에도 막부 초청으로 12회에 걸쳐 조선에서 일본으로 파견됐던 외교사절단이다. 사진은 조선통신사행렬도. [사진 부산광역시립박물관]

유 교수는 신유한의 『해유록』 이 박지원의 중국 기행문 『열하일기』의 일본편 같은 것이라고 설명했다. 나는 일본에 있을 때 한국 책을 읽는 독서회에서 『열하일기』를 읽은 적이 있다. 박지원의 자유롭고 호기심이 느껴지는 글을 즐겁게 읽었는데 한국사를 알아가면서 그 책이 담고 있는 실학의 의미를 조금씩 이해하게 됐다.

최근 영화 ‘자산어보’의 일본 개봉을 앞두고 이준익 감독과 인터뷰하기 위해 작품을 여러 번 봤다. 해양 생물학 서적 『자산어보』의 저자이며 영화의 주인공인 정약전(설경구)은 천주교 박해 사건 ‘신유박해’로 흑산도에 유배됐다. 나는 처음에 정약전은 돈독한 천주교 신자로 생각하고 봤는데 이런 대사가 나왔다. “성리학과 서학이 함께 가야 할 벗.” 이준익 감독은 정약전을 성리학을 부정하지도 않고 천주교를 맹목적으로 믿는 것도 아닌 인물로 그렸다. 유배는 ‘벌’이지만 영화에서 정약전이 흑산도에서 해양 생물에 접하면서 즐거워하는 표정은 ‘실학’의 즐거움으로 보였다.

유홍준 “통신사는 신뢰 통한다는 뜻”

유홍준 교수, 신유한, 박지원, 정약전……. 자신에게 새로운 문화, 사회, 종교 등을 접할 때의 태도를 보면 모두 열려 있는 지식인인 것 같다. 색안경을 끼지 않고 현장에서 보고 들은 것과 체험한 것을 솔직하게 기록했다.

토크콘서트에 참석한 정재은 감독은 나카야마 미호와 김재욱이 주연한 한·일 합작영화 ‘나비잠’에 대해 이야기했다. “어려운 합작에 왜 도전하는가”라는 질문에 정 감독은 “자신의 확장”이라는 말을 써서 답했다. 일본 배우와 스태프와 함께 작업하고 일본 제작 환경과 배급시스템 등 새로운 일을 경험함으로써 자신을 확장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나 또한 인생의 가장 큰 즐거움은 자신의 성장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크게 공감했다.

유 교수에 의하면 조선통신사의 ‘통신사’라는 이름은 ‘신뢰가 통한다’는 뜻이라고 한다. “과거의 잘못에 대한 일본의 솔직한 인정과 조선인 포로의 송환 이후에 이루어진 선린외교였다”고 한다. 임진왜란, 정유재란 후의 이야기지만 지금 배울 만한 부분인 것 같다.

일본에서 기시다 후미오 총리가 취임하고 한·일 관계가 앞으로 어떻게 변할지 주목하는 사람도 있다. 개인적으로는 당장엔 큰 기대를 하기는 힘들다고 보지만, 오히려 현대의 조선통신사와 같은 젊은 세대가 점점 늘어나는 것에 희망을 걸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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