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속·경제·추리소설·에세이…다시 읽는 이병주

중앙선데이

입력 2021.10.09 0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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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7호 20면

이병주 문학선집 낙엽 등 12권

이병주 문학선집 낙엽 등 12권

이병주 문학선집
낙엽 등 12권
이병주 지음
바이북스

1920년 무렵에 태어나 전문학교 이상의 고등교육을 받았으며, 이 가운데 4000여 명이 학병으로 일본군에 입대하여 지옥의 전장을 체험한 세대가 있다. 이 세대의 작가를 문학사에서는 ‘학병 세대 작가’라 일컫는다. 소설가 이병주(1921~1992)가 대표적이다.

탄생 100주년을 맞아 이병주의 삶과 문학을 기리는 행사가 팬데믹 상황을 뚫고 곳곳에서 열렸다. 예정된 행사도 여럿 남아 있다. 본격적인 비평서인 『이병주 평전』이 출간을 앞두고 있다는 말도 들린다. 이번 ‘이병주 문학선집’의 간행도 그 기념행사의 하나이다.

이병주 문학선집은 장편 6편(9권), 중단편 6편을 수록한 중단편선집 1권, 에세이집 2권 하여 모두 12권이다. 이병주 문학을 대표하는 역사 소재 소설들이 아니라 대중적이라는 이유로 상대적으로 낮게 평가되어 온 작품이 대부분이다. 독자들은 이 선집을 통해 지금까지 잘 몰랐던, ‘대중적’이라는 부정적 평가 틀에 갇혀 주목받지 못한 이병주의 작품들을 만날 수 있다. 이로써 이병주 문학과의 새로운 만남이 가능해졌다.

이병주는 이단아 였다. 늦깎이로 등단해 타계 직전까지 200자 원고지로 하루 30장씩 초인적인 필력을 과시했다. 1986년 서재에서의 이병주. [중앙포토]

이병주는 이단아 였다. 늦깎이로 등단해 타계 직전까지 200자 원고지로 하루 30장씩 초인적인 필력을 과시했다. 1986년 서재에서의 이병주. [중앙포토]

이 선집에 실린 작품들에도 역사 소재 소설의 중심에 놓인 ‘학병 관련 체험’이 들어 있다. 이병주는 학병과 관련하여, 일본 군인이 된 자신을 ‘용병’ ‘노예’ ‘짐승’ 등의 과격한 말로써 부정하는 윤리적 자기 처벌자를 주로 다루었는데 이 선집에 실린 몇 작품에서는 학병 거부자의 체험을 그렸다. 특히 장편소설 『꽃의 이름의 물었더니』는 학병 거부자의 굳고 곧은 민족의식, 주체의식, 낭만적 사랑의 관념이 학병 거부의 도피행이라는 중심 서사와 잘 어울려 빈틈없는 한 세계를 이루었다. 학병 지원에 대한 작가의 절대적 부정의식이 이런 세계를 상상하도록 이끌었을 것이다. 이로써 학병 문제를 매개로 이민족 지배권력과 식민지 백성의 관계, 나아가서는 국가권력과 백성의 관계를 근본 윤리의 차원에서 문제 삼는 문학이 솟아올랐다.

이병주는 역사 소재를 다루는 데 남다른 재능을 보였지만, 당대 현실을 심부를 탐구하여 그리는 데도 뛰어난 작가였다. 1970년대 중반 서울 변두리 서민 주거지의 한 집에 모여 사는 인물들의 생활을 그린 남루하지만 따뜻하고 밝은 풍속소설인 『낙엽』, 우리 소설에서는 드물게 사업가의 세계를 파고든 경제소설인 『무지개 사냥』(1·2권) 등이 이를 증명한다.

이번 선집을 통해 우리는 빼어난 추리소설가 이병주를 새삼 알게 되었다. 영화배우 최은희의 실종 사건에서 착상된 『미완의 극』(1·2권)이 바로 그 작품인데, 어떤 사건의 뒤에 숨은 범인을 찾아 나아가는 통상의 추리소설과는 다르다. 이병주적 추리소설은, 한편으로는 숨은 범인 찾기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돈의 욕망, 사랑의 욕망, 지배 욕망 등을 좇아 사는 사람들의 복잡한 관계와 미로처럼 뒤엉켜 갈피 잡기 어려운 등장인물 저마다의 내면을 추리의 기법으로 추적하여 밝히기이다. 이 점에서 『미완의 극』은 새로운 형식의 추리소설이다. 사람들의 시선 밖에 있던 이병주 문학의 한 성취를 보이는 것이니 이 선집의 발견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이병주의 소설에는, 떼어 내면 그대로 한 편의 에세이가 될 말이나 글이 곳곳에 들어 있다. 그의 소설은 저마다 섬세하고 깊고 합리적인 분석, 성찰, 평가를 수행하는 작가 특유의 지적 언어가 엮어 짠 에세이들로 장관을 이룬다.

그는 뛰어난 에세이스트였다. 지금까지 나온 단행본만 세어 30권이 넘을 정도로 엄청난 분량의 에세이를 남겼는데, 그 가운데 두 권이 이 선집에 들었다. 『산을 생각한다』는 한국 산행(山行) 수필의 앞머리에 설 만하고, 『자아와 세계의 만남』은 루쉰과 도스토옙스키 문학 비평서로 독보의 수준을 자랑한다.

발표되지 않은 원고까지 빠짐없이 찾아 실은 ‘이병주 전집’의 간행은 여전히 먼 과제이다. 이번 이병주 문학선집의 발간이 제대로 된 전집 간행으로 이어지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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