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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영남 "유리잔 씹어먹는 나훈아…조용필 술자리 화제 하나뿐"

중앙일보

입력

[조영남 남기고 싶은 이야기] 예스터데이〈32〉조용필과 나훈아

왼쪽부터 조용필·조영남·나훈아씨. 나훈아·조용필씨가 각각 두 살, 다섯 살 아래다. [사진 조영남]

왼쪽부터 조용필·조영남·나훈아씨. 나훈아·조용필씨가 각각 두 살, 다섯 살 아래다. [사진 조영남]

중앙SUNDAY의 회고록을 쓰면서 크게 느낀 점이 한가지 있다. 뭐냐. 사진의 중요성이다. 요즘은 휴대폰이 카메라 역할을 하기 때문에 누구에게나 사진 찍는 일은 일상이 되어버렸다. 어이없어 보이지만 젊은 여자친구들은 음식만 나오면 우선 사진부터 찍고 본다. 어딘가에 올린단다.

귀하께서 읽고 계신 소위 내 회고록에는 반드시 사진이 한두장씩 등장한다. 이젠 습관적으로 다음 주엔 또 뭘 쓸까 할 때마다 반드시 점검하는 게 있다. 주제에 맞는 사진이 존재하는가, 동시다발적으로 궁리를 하게 된다. 따라서 세월을 다 보내고 지금 뒤늦게 크게 후회하는 것 하나. ‘그때 내가 왜 사진을 안 찍어두었지?’ 하는 거다. 사실 내가 젊어서 잘나갈 땐 사진 찍는 걸 별로 대수롭게 생각하질 않았다. 선천적으로 기계와 먼 거리를 둔 탓도 있지만 사진 찍는 게 남자답지 못하다는 괴상한 관념에 대해선 맹갈이 녀석(‘아침이슬’을 작곡 노래한 김민기)의 영향이 컸다. 맹갈이는 사진 찍는 걸 결코 좋아하지 않았다. 툭 하면 웬만한 인터뷰를 거절하곤 했는데 그건 사진 찍는 걸 싫어했기 때문이다. 옆에서 그걸 보는 나는 맹갈이의 그런 태도가 너무 멋져 보였다. 상남자로 느껴졌다. 그때부터 이미 나는 사진을 무시하는 버릇이 생겼다고 본다. 그렇게 사진에 대해 시큰둥한데도 불구하고 내 서랍에는 저절로 사진이 쌓여만 가는데 구태여 내가 왜 사진의 중요성을 인정할 필요가 있었겠는가.

신인가수 시절 셋이 사진 찰칵

내가 사진을 노골적으로 무시했다는 뚜렷한 증거가 하나 있다. 뭐냐. 내가 한참 미술 전시로 잘나갈 때(미술 재판 사건이 터질 즈음) 내 미술 작업의 체계를 위해 내 그림의 주제가 변하고 하는 것들을 기억해두기 위해 난생처음 카메라를 구입하기로 마음먹었다.

내 성격은 의외로 좀스러워서 물건 하나 살 때는 신중에 신중을 기한다. 이것저것 다 따져보다 결국 독일제 라이카가 최고라는 결과가 나왔다. 라이카 중에서도 나는 기능보다 기계의 디자인을 더 따진다. 라이카 카메라에서 일반인을 위한 통바디(카메라 몸체가 여러 부품이 아니라 한 통으로 깎아냈다는 것), 게다가 가죽 케이스가 또 멋졌다. 그래서 500만원을 주고 샀다. 누가 믿겠는가. 그래서 라이카 카메라로 그림을 찍었느냐. 구입한 그날 서너장 찍고 지금까지 10년 가까이 한 번도 사진을 찍은 적 없이 그냥 서랍에 고이 모셔두고 있다. 내가 생각해도 웃기는 짜장면이다.

서두가 길어졌다. 이런 와중에 내가 중학교 때 야릇한 마음을 품었던 여학생 흑백사진을 한장 남겨 그걸 미술작품화시켜 내 방 벽에 수십 년 쭉 걸어놨다는 얘기를 내 중앙SUNDAY 연재 13회에 남겨놓은 바 있다.

그런데 최근 그와 비슷한 내용의 천연색 사진 한장이 또 발견되었다. 다름 아니라 내가 글쎄 조용필과 나훈아와 함께 찍혀 있는 사진이다. 언제 어떻게 무슨 이유로 셋이 함께 모였는지, 무슨 프로그램인지 무슨 신문사인지 방송 때문이었는지 혹은 그냥 무슨 인터뷰 때문이었는지 그런 걸 도무지 모르겠다. 딱 한 가지 분명한 건 여의도에 있던 MBC 방송국 옆 뜰에 딸려 있던 작은 공터였다는 장소에 관한 기억뿐이다.

국회의원 시절의 이주일(2002년 별세)씨. 1992년 국회의원에 당선돼 의정활동을 했다. [중앙포토]

국회의원 시절의 이주일(2002년 별세)씨. 1992년 국회의원에 당선돼 의정활동을 했다. [중앙포토]

하나 더 분명한 건 내가 막 가수가 된 소위 신인가수 시절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니까 패티김 이미자와 찍은 사진보다 표정이 더 서먹해 보인다. 자동적으로 그럼 내가 가수 초창기엔 용필이와 친했던가, 훈아와도 친교가 있었던가 묻게 되는 사진이다. 그러는 한편 아하! 내가 소싯적엔 조용필과 노래도 함께 하고 나훈아와도 친했구나 하는 자랑스런 생각도 들게 된다. 그런 생각을 일깨워주는 게 사진 한장의 역할이다. 사진이 움직일 수 없는 증거가 되는 것이다. 행여 용필이나 훈아가 영남이와 사진 찍은 걸 후회하거나 수치스럽게 여기거나 그런 건 나도 모른다. 하여간 나한테는 매우 진기한 사진으로 남아 있고 자랑스런 사진이 되어버렸다.

훈아는 몰라도 용필이와 나는 두 가지 이유로 가까웠다. 첫째는 천하에 웃기는 이주일 형과 친하다는 거였고 둘째는 술이다. 용필이와 영남이는 우리들의 두목 격인 이주일 형이 특별히 아끼는 동생들이었고 우리 셋인 술을 없어서 못 마시던 시절이었다. 술 방면에선 주일이 형이나 나나 한술하는 편이었는데 용필한테는 꼬리를 내려야만 했다. 용필이는 지독한 애주가였다. 덩치도 쬐깐한 녀석이 술을 퍼먹을 땐 무슨 산적두령 같았다.

우리의 친교가 그리 오래 못 간 건 또 두 가지의 이유 때문이다. 지금 내 쪽에서 볼 때 말이다. 첫째는 술 먹는 실력에서 용필이와 도저히 상대가 될 수 없었고 둘째는 얘기에서 달렸다. 나는 가령 이것저것 너저분한 것에도 관심이 있다. 매우 정상인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용필이는 달랐다. 용필이는 딱 한 가지에 관한 것만 얘기하는 것이었다. 음악에 관한 얘기다. 초저녁부터 늦은 밤까지 그게 가능했다. 내 희미한 기억엔 무슨 ‘정’ 어쩌구 하는 노래였는데 막 녹음을 마친 노래라며 잔뜩 들떠서 나한테 들려주며 설명했는데 나는 속으로 죽을 지경이었다. 테이프를 껐다 다시 틀었다 하면서 어느 부분에선 미디움으로 부르고 어느 부분에선 클라이맥스로, 또 어느 악기소리와 함께 길게 늘어뜨리고, 아이고! 한도 끝도 없이 신나서 나한테 설명해주는 것이다. 나는 일찍이 음악대학에서 개인 레슨을 받으며 이런 부분은 이렇게 부르고 또 어떤 부분에선 저렇게 불러야 한다는 음악분석이 싫어서 학교를 때려치려는 참인데 그 분야에서의 용필이는 사뭇 달랐다. 밤새 음악 얘기만 하자는 투였다. 그럴 바엔 그때 나더러 “형! 우리 이런 노래 듀엣으로 함께 부르는 게 어때” 했으면 오죽 좋았으련만. 썩을 녀석!

그나마 훈아와의 추억은 하얏트 호텔 아래 골목에 있던 걔네 사무실(사무실인지 주거지인지 불분명하다. 커다란 테이블이 있었던 것으로 봐 사무실로 불렸던 것 같다)을 찾아갔던 일이 있다. 와! 노래하는 가수가 이렇게 큰 사무실을 무슨 용도로 쓰는 건가. 나는 이날 이때까지 가수생활하면서 훈아처럼 그런 큰 사무실을 가져본 적이 없다.

우리 때는(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을 말한다) 방송국도 몇 개 안 되고 레코딩 녹음실도 어디 어디 뻔해서 우린 서로 마주칠 수밖엔 없던 옹색하던 때였다. 그 시절 나는 소위 쎄시봉파로 분리되어 나가면서 용필이와 훈아와의 관계는 멀어져갈 수밖에 없었다.

피아노 반주하며 나훈아와 듀엣도

그 후 세월이 흘러 이주일 형은 별로 어울리지 않는 정치계로 빠지고 용필이와 나 사이도 그저 그런 사이로 빠지고 훈아는 어디 외국이라도 갔는지 그냥 가물가물해졌다.

그러던 어느 날 사업을 번잡스럽게 잘하는 후배 하나가 대뜸 나한테 “형! 나훈아 알지” 하는 거였다.

“그럼 알지” 하니까 “잘 됐어. 그럼 우리 함께 골프를 치는 거야” 해서 훈아도 나도 잘 아는 유명 PD 출신 친구와 함께 골프를 치게 됐다. 그때도 사진 한 장을 박아 놓는 건데 그걸 못했다. 하여간 그때 내 기억 중에선 훈아가 골프를 압도적으로 잘 친다는 것이다. 노래보다 골프를 더 잘 치는 듯했다. 골프를 끝내고 샤워까지 마치고 자연스럽게 저녁 먹는 자리가 술판으로 변했다. 술판에서도 역시 훈아가 압권이었다. 일개 PD에서 방송국 사장까지 올라간 내 친구는 그때 유행했던 술 따르는 기술, 가령 술잔을 나란히 놓는 기술이 마술처럼 교묘해서 예술의 경지에 이르렀다. 국제 방송대회에 나가면 술 따르는 기술로 인기 만점이었다는 것이다. 그때 나도 술 취한 상태에서 충격적인 얘기를 들었다. 훈아가 흥에 겨워하는 소리.

“내는 유리잔을 그냥 씹어먹을 줄 안데이.”

“뭐? 유리잔을 이빨로 깨물어 먹을 수 있다고?”

“그럼 깨물어 먹을 수 있지.” 그때 나는 훈아 녀석이 매우 독한 놈이라는 걸 알게 된다. 그런 일이 있고 한참 있다 종로 인사동 미술재료를 파는 화구점에서 우연히 마주치면서 ‘아! 훈아도 나처럼 그림 그리는 걸 좋아하는구나’ 여기게 됐다. 붓글씨를 쓴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이쯤에서 불현듯 생각난 게 있다. 나는 지금 중앙SUNDAY 애독자님들께 보여드릴 게 있다. 수고스럽지만 잠시 신문을 내려놓으시고 여러분의 휴대폰을 열어서 유튜브를 보시라. ‘자니 윤 쇼’에 게스트로 출연한 젊은 시절 나훈아의 모습을. 거기서 보면 나훈아의 말솜씨가 실제 주인공인 자니 윤 형이나 조영남보다 훨씬 윗길이다. 너스레 떠는 것도 압권이다. TV 흑백시대에 가수로 데뷔해서 성공했지 컬러 TV 때 데뷔했으면 조영남이나 나훈아의 얼굴로는 어림도 없었을 것이라는 둥, 후라이보이 곽규석 ‘쇼쇼쇼’ 사회자가 자기를 나훈아 양으로 여자처럼 소개를 해서 웃음바다가 됐었다는 둥…. 그리고 이어서 그와 나는 피아노를 치면서 나훈아 작사 작곡의 ‘사랑’을 듀엣으로 부른다. 끝부분에는 자니 형까지 앞으로 나와 중창으로 멋지게 마무리된다. 자니 윤 대신 그때 조용필이 등장했으면 조용필 나훈아 조영남 쇼가 되는 건데, 마치 패티김 이미자 조영남 트리오처럼 말이다. 그게 못내 아쉽다.

지금 나는 형으로서 말한다.

야! 조용필! 네가 만든 신곡 ‘바운스’를 부를 때 내가 널 얼마나 샘냈는지 아냐? 어찌해서 중늙은이인 네가 요즘 젊은 아이들처럼 노래를 그다지도 젊게 부를 수 있는 거냐. 그토록 맨날 음향기계를 가지고 놀더니만 결국 해냈구나! 용하다 용필아.

야! 나훈아. 네가 자작노래 ‘테스형!’ 하면서 나오는데 나는 그냥 “졌다 훈아 형” 했다. 내가 오래전부터 너의 실력을 알고는 있었다. 그러나 이번엔 핵폭탄이었다. 어쩜 그렇게 시의적절하게 우리나라의 아귀다툼하는 모습을 그토록 리얼하게 그려낼 수가 있었느냐 말이다.

그러나 나이가 제일 많이 먹은 영남이 형은 믿는다. 윗선(정치계)에서 그렇게 치고받고 싸우는 모습(애국심 경쟁)이 바로 우리를 세계 강국으로 만들고 우리의 직계 후배 방탄소년단이 세계를 우리의 앞뜰마당처럼 뛰어놀게 만든 거다. 오징어 게임도 그래서 나온 것 아닐까.

자! 나가자 패튼 탱크 군단처럼! 용필이 훈아 영남이 이렇게 3인이 뉴방탄 노인단이란 이름으로 출전해 ‘바운스 게임’ ‘테스 게임’ ‘장터 게임’ 같은 걸 펼치자꾸나. 다가오는 넘버원 오징어 게임을 위해서.

P. S. 모든 꿈이 꼭 안 이루어진다는 보장은 없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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