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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매사 감사하는 삶…죽음 공부가 가져온 네가지 변화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백만기의 은퇴생활백서(96)

은퇴를 앞두고 인생 후반생에서 할 일을 그리다가 궁극적으로 인간은 모두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솔직히 그 이전까지는 죽음을 남의 이야기로만 치부했지 별로 고민한 적이 없었다. 나도 결국 죽는다는 것을 깨닫자 죽음 공부도 해야겠다는 생각이 났다. 인터넷에 접속하여 죽음 관련 책을 찾아보았다. 그러던 중 『인간의 죽음(On Death and Dying)』이란 책이 눈에 띄었다. 미국 정신과 의사인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 박사가 쓴 책이다.

죽음은 예상하지 못하는 순간에 찾아온다. 그렇게 궁극적으로 인간은 모두 죽음을 맞이하지만, 보통 죽음을 남의 이야기로 치부하고 별로 고민하지 않는다. [사진 pxhere]

죽음은 예상하지 못하는 순간에 찾아온다. 그렇게 궁극적으로 인간은 모두 죽음을 맞이하지만, 보통 죽음을 남의 이야기로 치부하고 별로 고민하지 않는다. [사진 pxhere]

책을 읽으며 그동안 몰랐던 내용을 알게 되었다. 한 마디로 감동적이었다. 내친김에 퀴블러 로스 박사의 자서전 외 몇 권의 책을 더 읽으며 나의 죽음학 공부가 시작되었다. 어느 날 도서관에서 『죽음의 기술(The Art of Dying)』이란 책을 빌려 보다가 좋은 책임을 알고 아예 사서 읽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런데 서점에 가보니 초판만 찍고 절판되었다. 어렵게 역자의 전화번호를 알아내 연락했는데 여유분의 책을 갖고 있지 않다고 한다.

우리나라 사람은 죽음을 터부시해서 제목에 죽음이 들어가면 책을 별로 찾지 않는 것 같다. 한번은 『더 나은 죽음(The Better End)』이란 책을 번역한 역자가 찾아온 적이 있다. 당시 세브란스병원에 입원했다가 법정까지 갔던 김모 할머니 사건이 사회에서 화제가 될 때라 마침 시의에 맞는 책이었다. 그러나 이 책 역시 제목에 죽음이 들어가서 그런지 초판을 찍는 데 그쳤다. 그 후부터 죽음을 다룬 책은 출판되는 대로 서둘러 구했다. 이렇게 해서 그나마 백여 권의 죽음학 책이 서가에 있다.

어느 날 국립암센터에 호스피스 전문과정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자원봉사자를 상대로 하는 과정이 아니고 호스피스 완화의료에 종사할 의사와 간호사를 양성하는 과정이다. 분당에서 일산까지 제법 먼 거리지만 죽음을 공부하는 데 필요한 교육이라 생각해서 수료했다. 학교 정규과정을 포함해 지금까지 받은 교육 중 가장 잘 받았다고 여기는 교육이다. 그 과정을 통해 내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던 가치가 전혀 그렇지 않다는 걸 알았다. 자연스레 인생관이 변하는 계기가 되었다.

과정을 마치고 후반생을 살아가는 데 죽음 교육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끝이 좋으면 다 좋다는 말처럼 죽음도 아름답게 마무리해야 하지만 남은 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하여도 성찰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그랬듯이 남들은 별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친구들 모임에서 죽음 공부의 필요성을 꺼내면 왜 재수 없게 그런 이야기를 하냐며 나를 타박했다. 그리고 나중에 의사에게 맡기면 되지 않냐는 말로 화제를 돌렸다.

죽음의 질이 가장 높은 국가 영국에서는 데스카페(Death Cafe)에서 차를 마시며 자연스레 자신의 경험담을 서로 주고받는다. 이런 과정을 통해 죽음을 이해하고 자신이나 가족이 임종을 맞이하였을 때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팁을 얻어 간다. 인생학교에서 이를 참고해 죽음학 강좌를 열고 데스카페와 유사한 모임도 개설했는데, 예상과 달리 별로 인기가 없었다. 죽음은 그저 생각하기조차 싫은 부정적인 단어인가 보다.

한편 그때 가서 생각하면 되지 뭐 지금부터 죽음을 준비해야 하냐며 대범하게 여기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죽음은 예상하지 못하는 순간에 찾아온다. 그리고 막상 죽음을 통고받으면 대부분 사람은 어느 교수의 표현처럼 발랑 뒤로 넘어진다. 그리고 어쩔 줄 몰라 연명 의료에 집착하다 황망하게 떠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겨우살이나 해외여행은 미리 준비하면서 그보다 중요한 죽음 준비는 왜 안 하는지 궁금하다.

죽음은 신이 인간에게 주신 선물일지도 모른다. 죽음을 공부하고 나면, 주어진 시간의 소중함을 깨닫고 욕심을 부리기 보단 자신이 잘할 수 있는 분야에 집중하게 된다. [사진pxfuel]

죽음은 신이 인간에게 주신 선물일지도 모른다. 죽음을 공부하고 나면, 주어진 시간의 소중함을 깨닫고 욕심을 부리기 보단 자신이 잘할 수 있는 분야에 집중하게 된다. [사진pxfuel]

죽음을 공부하면 어떤 변화가 있을까? 나의 경우에는 첫째,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나 공포심이 많이 사라졌다. 어쩌면 죽음은 신이 인간에게 주신 선물일지도 모른다. 만약 사람이 죽지 않는다고 가정하면 얼마나 끔찍하겠는가. 혼자 200살까지 산다고 상상해보라. 오래 살더라도 친구나 가족 또는 주위 사람과 같이 있어야지 혼자 세상에 남겨진다고 생각하면 그것도 바람직한 삶은 아니다.

둘째, 일상의 중요함을 깨닫게 되었다. 우리는 그저 아무 생각 없이 밥을 먹거나 숨을 쉬는데 막바지에 있는 사람에게는 그만큼 절실한 바람도 없다. 행복을 생각할 때마다 떠오르는 분이 있다. 피아니스트 알리스 헤르츠좀머는 독일 아우슈비츠에서 어머니와 남편을 잃고 늘그막에는 아들까지 잃었는데도 매사 감사하는 삶을 살았다. “전쟁을 겪고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도 삶은 배울 것, 즐길 것, 가득한 아름다운 선물이야.“ “침대에 누워 창밖 나무만 봐도, 아침 새소리만 들어도 행복해.”

셋째, 주어진 시간이 많지 않음을 느끼게 되며 이러저러한 여러 가지 일에 매달리기보다 좀 더 중요한 핵심에 치중하게 된다. 시간이 많다면 모르되 그렇지 않으니 욕심을 자제하고 내가 잘할 수 있는 분야에 집중하고 있다. 인간관계도 마찬가지다. 그저 아무 의미 없이 만나는 친목 모임보다 관심사가 같은 연구 모임이나 구체적인 목적이 있는 봉사 모임에 참여하기를 권하고 싶다.

넷째, 임종이 다가오면 무의미한 연명 의료에 매달리지 않고 담담하게 죽음을 맞이할 생각이다. 의학의 발달로 기대수명이 늘어났어도 건강수명은 여전히 제자리걸음에 머물고 있다. 그만큼 골골하며 살아야 한다는 얘기다. 얼마 전 노환으로 걷기가 어려워진 노교수가 오래 사는 것이 반드시 좋은 것만은 아니란 얘기를 전한다. 스스로 일상생활을 하지 못하고 남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면, 그것도 고통 속에서 견디어야 한다면 환자의 자존감이 어떠하겠는가.

최근 호주 국적의 교포 한 사람이 스위스로 넘어가 안락사로 세상을 등졌다. 치료를 계속하더라도 좋아지지 않는 비가역적인 상황에 있는 말기 암 환자다. 아마 우리나라 사람으로서는 세 번째로 안락사를 택한 환자가 아닌가 생각된다. 그가 오래전 어느 매체에 자신의 근황을 밝히며 그동안의 과정을 이야기하자 여러 사람이 그를 진심으로 위로했다.

어느 날 그가 스위스 안락사 단체로부터 안락사 승인을 득했다는 사실을 알렸다. 그리고 일정에 따라 떠나야 할 시간이 다가왔다. 그는 그동안 관심에 감사하다는 인사를 전하고 스위스로 향했다. 그 후 동행한 지인이 전하는 말에 의하면 전날에 가족 및 지인들과 고급스러운 만찬을 하고 개별 만남을 통해 마지막 당부하는 말을 나누었다. 그리고 당일 가족의 손을 잡고 평안하게 죽음을 맞이했다. 나의 죽음도 그러하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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