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장훈 칼럼

부족 전쟁의 정치, 냉담층이 멈춰세워야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1면

장훈 본사 칼럼니스트·중앙대 교수

장훈 본사 칼럼니스트·중앙대 교수

이 글의 제목을 접하는 순간, 정치에 냉담한 독자들은 아마도 페이지를 넘겨 버릴 수도 있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자는 오늘 정치 냉담층만이 우리 정치를 구할 수 있다는 역설적인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거듭된 실망으로 냉담한 태도를 갖게 되었지만, 이들 냉담층의 역할을 통해서만 여야 정당이 벌이는 원시적인 싸움, 부족전쟁을 완화시킬 수 있다고 믿는다.

이야기를 세 단락으로 나누어 이어가 보자. 첫째, 내년 대선을 겨냥하여 벌어지고 있는 여야 정당간의 살벌한 전쟁은 우리 민주정치가 30여 년 전 출발점에서 세웠던 타협과 공존의 정신을 송두리째 잃어버렸음을 가리킨다. 둘째, 타협과 공존이 사라진 곳에 남은 것은 오로지 권력을 독점하기 위한 처절한 싸움으로서의 부족 전쟁뿐이다. 셋째, 이른바 ‘더불어족’과 ‘힘족’이 벌이는 부족전쟁을 멈춰 세울 수 있는 이들은 중간에 서 있는 정치 냉담층이다. 이들이 냉소와 외면을 떨쳐버리고 정치에 개입할 때에만 양극화된 부족전쟁을 멈춰 세울 수 있다.

YS·DJ, 의회 토대로 타협과 공존
그 뒤로는 정치보복 진흙탕 싸움
‘더불어족’ ‘힘족’ 권력투쟁 몰두
냉담층이 이분법 정치 완화해야

먼저 한국 민주주의가 타협의 정신에서부터 출발하였던 뿌리를 되돌아보자. 1987년 봄, 시민들이 민주화를 요구하는 거대한 물결을 일으켰을 때 민주화 운동을 이끌던 김대중, 김영삼 두 지도자는 군부세력의 절충안인 6·29 선언을 수용하였다. 민주화 세력 내부에서 격렬한 반대가 있었지만 양 김씨는 군부세력과 협상을 통해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하고 경제, 사회질서를 바로잡는 민주화로 나아간다는 데 합의하였다.

민주화의 대의를 위해 자신에게 사형선고를 내렸었고 수년간 해외 망명길로 내몰았던 군부세력과도 타협했던 리더가 김대중이라는 인물이었다. 김영삼 전 대통령 역시 단식투쟁, 의원직 제명 등의 험난한 길을 걸어왔지만 협약의 민주화를 함께 이끌었다. 각각 20대와 30대의 나이에 국회의원으로 정치를 시작한 이들은 근본적으로 의회민주주의자였다. 이들은 그동안 저항과 극복의 대상이었던 정치군인들과도 협상을 하는 타협의 민주 원칙을 온 몸으로 실천한 거인들이었다.

비록 불완전한 민주화와 내분으로 인해 1987년이 아니라 1992년이 되어서야 차례로 대통령직에 오른 김영삼, 김대중 시대에 굴곡이 없지는 않았다. 그래도 그때는 우리가 어쨌든 꾸준히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느낌을 누렸던 시대였다.

두 번째 이야기. 2002년 양김 시대가 저물면서 민주화의 주춧돌이었던 타협과 공존의 정신도 급격히 메말라갔다. 엉성한 논리로 현직 대통령에 대한 탄핵이 처음 시도된 것이 2004년이었다. 이후 정치보복과 법치, 진실과 거짓, 정의와 권력은 서로 엉망으로 뒤엉킨 채 우리 정치를 진흙탕 속으로 끌고 들어갔다.

이제 우리 정치에 남은 것은 양대 진영을 중심으로 한 정치 부족간의 권력전쟁뿐이다. 민주적 경쟁과는 거리가 먼 원시 부족 전쟁이 대선을 짓누르고 있다. ①선거는 우리와 저들의 전쟁이고 승부에 따라 권력을 쥐거나 죽게 되는 경기라는 믿음 ② 부족 내부의 결속은 엄중하며 한 치의 일탈이나 희미함은 용납되지 않는다. ③상대 부족은 없어져야 할 적폐이며 따라서 공격의 대상일 뿐이다.

부족 전쟁은 오늘날 전 세계에서 관찰된다. 아프가니스탄의 혼란은 파슈툰족, 타지크족, 우즈벡족, 하자라족 사이의 뿌리 깊은 대립과 갈등의 역사를 빼놓고는 이해할 수 없다. 뿐만 아니다. 오랜 민주주의 역사를 가진 미국의 정치 역시 오늘날 레드족(공화당)과 블루족(민주당)간의 부족 전쟁으로 치닫고 있다. 레드족은 아직도 바이든 대통령의 당선이라는 선거 결과를 승복하지 못하고 있다. 지난 1월 주별 선거결과를 연방의회가 승인하던 날 워싱턴 의사당을 습격한 강성 레드족의 난동은 부족전쟁의 한 에피소드일 뿐이다.

세 번째 이야기. 고대의 원시 전쟁처럼 피가 튀고 살점이 날아가는 살벌한 부족 전쟁을 지켜보며 중간층 시민들이 정치를 외면하는 냉담층으로 변해가는 것은 이해할 만하다. 하지만 외면의 결과는 혹독하다. ‘더불어족’이 승리하든 ‘힘족’이 승리하든, 중간층, 정치 냉담층은 점차 숨쉬기조차 힘들어질 것이다. 과거 최상의 민주 헌법을 갖췄다던 독일 바이마르 공화국이 붕괴되는 과정 그리고 지금 미국의 정치가 구제불능의 부족 전쟁으로 흔들리는 배경에는 모두 냉담층의 정치 거리두기가 작용해왔다.

부족 전쟁의 이분법 세계를 완화하고 순화시킬 수 있는 잠재력은 오직 정치 냉담층에게 있다. ‘더불어족’이든 ‘힘족’이든 스스로의 세력만으로는 내년 봄의 승리를 가질 수 없다. 조만간 당내 경선이 끝나자마자 두 부족은 중간층과 중간지대를 향한 온갖 달콤한 약속을 내놓을 것이다. 이때 중간의 냉담층이 분명하게 물어야 한다. 한국 민주화의 정신이었던 타협과 공존의 희미한 불씨나마 되살려낼 후보는 누구인가? 야당, 중간지대와도 대화하고 함께 하겠다는 약속을 취임 이후에도 쉽게 저버리지 않을 인물은 누구인가? 청년세대의 42%를 차지하는(한국갤럽) 정치 냉담층이 부족 전쟁을 멈춰 세워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