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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한명기의 한중일 삼국지

“조선혼 어디갔나” 500년 짝사랑 통탄한 권덕규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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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조선 지식인의 사대 의식

“무슨 운인지 임진왜란이 일어나 조금의 이익은 있을 법하되 커다란 해를 끼친 명나라 원병이 다녀가자 찰거머리 같은 모화(慕華)의 신(神)은 이내 떠나지 아니하여 (…) 명이 망하고 그 말왕(末王)이 순국하매 의자왕(義慈王)의 제사는 궐(闕)하면서 북지왕(北地王) 심(諶)은 높여도 신라 왕자 전(佺)은 모르는 그들이 (…) 만동묘(萬東廟)라는 신종(神宗)과 의종(毅宗)을 한 칸 모우(茅宇)에 받들어 제사하니 이날은 조상을 잊고 조선 혼(魂)을 닦아내 버리는 수업 일이라, 그만 조선인은 보기 좋게 곯아 죽었도다.”

조선 지식인, 한족왕조 숭앙의식 각별

조선 후기 충북 괴산에 세운 사당 만동묘 경내와 그 내력을 적은 만동묘정비. 임진왜란 때 조선을 도와 준 명나라 신종에게 제사를 지냈다. 이미 명나라는 멸망한 후 였다. [사진 문화재청]

조선 후기 충북 괴산에 세운 사당 만동묘 경내와 그 내력을 적은 만동묘정비. 임진왜란 때 조선을 도와 준 명나라 신종에게 제사를 지냈다. 이미 명나라는 멸망한 후 였다. [사진 문화재청]

국어학자이자 사학자였던 권덕규(權悳奎·1891~1950)의 글이다. 임진왜란 때 명군이 참전한 이후 조선 사회 전반에 모화 풍조가 퍼진 것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내용이다. 백제가 망한 뒤 당으로 끌려간 의자왕이나 신라가 망하자 자결했던 경순왕의 아들 전은 기억조차 못 하는 조선 지식인들이, 촉한(蜀漢)이 망했을 때 자결한 유비(劉備)의 손자 유심(劉諶)은 추모한다고 질타한다. 1703년 노론 지식인들은 충북 괴산 화양동(華陽洞) 계곡에 만동묘를 세워 명의 신종과 의종을 제사 지내기 시작했거니와 권덕규는 바로 이날부터 조선의 혼이 사라져 버렸다고 탄식한다.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이 출발점
‘중국 덕분에 조선도 안정’ 논리

명나라 망했어도 추모열기 계속
괴산에 세운 ‘만동묘’가 결정판

갑신정변 당시 칭송받은 원세개
“고종 폐위시켜야” 비수로 받아쳐

조선 지식인들이 한족(漢族) 왕조 명에 대해 지닌 숭앙의식은 각별했다. 시발점은 1388년의 위화도회군(威化島回軍)이다. 이성계 일파는 회군을 감행하면서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거역할 수 없다(以小逆大不可)’라는 슬로건을 내걸었다. 1368년 명이 몽골족의 원(元)을 쫓아내고 중원의 주인으로 등장했던 현실을 고려한 명분이었다. 고려의 신하로서 역성혁명을 꾀한 이성계의 입장에서는 명의 책봉(冊封)을 받아 집권의 정당성을 확보하는 것을 염두에 둔 포석이기도 했다.

조선 후기 충북 괴산에 세운 사당 만동묘 경내와 그 내력을 적은 만동묘정비. 임진왜란 때 조선을 도와 준 명나라 신종에게 제사를 지냈다. 이미 명나라는 멸망한 후 였다. [사진 문화재청]

조선 후기 충북 괴산에 세운 사당 만동묘 경내와 그 내력을 적은 만동묘정비. 임진왜란 때 조선을 도와 준 명나라 신종에게 제사를 지냈다. 이미 명나라는 멸망한 후 였다. [사진 문화재청]

15세기 이래 조선과 명의 관계는 순항했다. 비록 14세기 말, 명 태조 주원장(朱元璋)의 고압적이고 무례한 언동 때문에 정도전 등이 요동 정벌론을 내세우기도 했지만 두 사람이 죽은 뒤 양국관계는 정상화했다. 조선 왕들은 명 황제의 책봉을 받고 ‘신하로서 공순하게 섬길 것(事大)’을 다짐했다. 수시로 북경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고, 명의 역(曆)과 연호(年號)를 사용했다.

신종

신종

세종은 명에 대해 지성사대(至誠事大)를 표방했다. 열과 성의를 다해 명을 섬기겠다는 것이었다. 조선이 이렇게 머리를 숙이자 명 또한 조선을 ‘가장 충순한 예의지국(禮義之國)’이라고 찬양했다. 요즘도 즐겨 쓰는 ‘동방예의지국’의 원조인 셈이다. 명이 조선을 ‘예의지국’이라 칭했던 의도는 이중적이었다. 하나는 조선을 찬양하는 의미지만, 다른 하나는 “조선은 결코 명에 거역해서는 안 된다”는 압박이 담겨 있었다.

조선 지식인들은 왜 이렇게 명을 존숭했을까. 무엇보다 동아시아 최강국인 명과의 관계를 원만히 유지하는 것이 조선의 안전을 확보하는 보국(保國)의 방도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또 조선 지식인들은 과거 고려를 침략하여 크나큰 고통과 치욕을 안겨준 몽골에 대한 반감이 컸다. 정도전은 몽골을 이류(異類)로, 그들이 중원을 차지했던 것을 ‘우주의 변괴(變怪)’라고 불렀다. 그에 더해 몽골·여진·거란 등 북방민족과 달리 같은 농경문화를 영위하는 한족들에 대한 친근감, 그리고 그들이 이룩한 수준 높은 유교문화와 중화문명에 대한 선망도 조선이 명을 추종하는 배경이었다.

‘재조지은’ 강조한 선조의 노림수

중국 베이징의 자금성.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가 평양에서 승리했다는 소식을 들은 선조는 이곳을 향해 큰절을 다섯 번 올렸다. [중앙포토]

중국 베이징의 자금성.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가 평양에서 승리했다는 소식을 들은 선조는 이곳을 향해 큰절을 다섯 번 올렸다. [중앙포토]

16세기 들어 의리와 명분을 강조하는 성리학 이념이 확산하면서 숭명(崇明) 의식은 더욱 고조된다. 『천자문(千字文)』을 마친 아동들의 필독 교재였던 『동몽선습(童蒙先習)』을 지은 박세무(朴世茂·1487∼1564)는 “천명(天命)을 받은 위대한 명나라는 천년만년 영원할 것”이라고 예언했다. 명을 상국(上國)이자 부모국으로 받드는 조선은 명 못지않은 문명국이자 ‘작은 중화(小中華)’라고 자부했다. 반면 명을 섬기지 않는 일본은 중화문명을 외면하는 ‘야만국’으로 치부했다.

이여송

이여송

1593년 1월, 이여송(李如松)이 이끄는 명군이 평양에서 일본군을 대파하면서 임진왜란의 전세가 역전됐다. 의주에서 초조하게 대기했던 선조는 명군의 승전 소식에 감격했다. 북경 황궁(皇宮)을 향해 다섯 번 큰절을 올렸고 곧이어 만난 명군 장수들에게도 두 번 절을 했다. 이항복(李恒福) 등 신료들은 이여송의 화상(畫像)을 그려 사당에 봉안하고 송덕비를 세우자고 건의했다.

살아 있는 이여송을 위해 사당을 세우자는 주장은 조선의 감격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보여준다. 지식인들은 ‘망해 가던 나라를 구해준 명의 은혜(再造之恩)’를 영원히 잊지 말자고 다짐했다. ‘임진왜란’을 아예 ‘재조(再造)’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었다.

권덕규

권덕규

선조는 “왜란을 극복한 것은 오로지 명군 덕분이고 조선 장수들은 변변히 싸우지도 못한 채 명군의 뒤를 따라다녔다”고 단언했다. 이순신·곽재우·권율 등의 전공을 완전히 무시하는 태도였다. 실제로 명군은 평양 승리 이후에는 일본군과 제대로 싸우려 들지 않았다. 그런데도 선조가 명군의 ‘은혜’를 한껏 띄웠던 데는 노림수가 있었다. 명군의 역할을 강조할수록 이순신 등 조선 장수들의 공로는 상대화하고 왜소해지기 때문이다. 그러면 국난 극복을 위해 별 역할을 하지 못해 땅에 떨어진 선조의 위신도 조금은 회복될 수 있었다. 선조는 심지어 “내가 의주로 피신했기 때문에 명군을 불러서 나라를 구할 수 있었다”는 담론까지 만들어 냈다.

17세기 초반 명이 휘청거리고 여진족의 청이 굴기하면서 조선은 고민에 빠진다. 어린 시절 『동몽선습』을 읽었던 조선의 척화신(斥和臣)들은 “재조지은을 생각하면 나라가 망하더라도 오랑캐 청과는 어떤 타협도 있을 수 없다”고 외쳤다. 1637년 1월, 병자호란을 맞아 청에 항복한 뒤에도 지식인들은 청을 ‘상국’으로 인정할 수 없었다. 1644년 명까지 접수하자 청에 대한 원한과 적개심은 하늘을 찔렀다. 청을 쳐서 호란의 치욕을 씻고 명을 위해 복수해야 한다는 북벌론(北伐論)이 등장했다.

송시열

송시열

청에 대한 적개심과 맞물려 망해 버린 명에 대한 연모(憐慕)의 감정이 고조됐다. 명의 멸망에 절망한 지식인들은 스스로 대명거사(大明居士)·숭정처사(崇禎處士)를 칭하면서 벼슬을 버리고 산골짝으로 숨어들었다. 북경으로 가는 길에 요동을 지나야 했던 조선 사신들은 곳곳에 남아 있는 명의 자취를 접할 때마다 눈물을 훔쳤다. 송시열의 제자들이 만동묘를 세운 것은 명에 대한 추모의 결정판이었다. 그런 그들의 눈에 청의 객관적인 실상이 제대로 보일 리 없었다. 이제 ‘문명국’ 명이 사라진 중원은 그저 ‘비릿한 냄새를 품기는 오랑캐의 소굴’일 뿐이었다.

명을 짝사랑하고 청을 경원했던 조선 지식인들이 청이 ‘오랑캐’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 데는 150년 이상의 시간이 필요했다. 그리고 조선의 운명이 다시 비극으로 치닫고 있던 19세기 말, 청에서 조선 문제를 담당했던 주역은 이홍장(李鴻章)을 비롯한 한족 관료들이었다. 그들은 일본이 조선으로 접근하자 임진왜란을 떠올렸다. 일부 한족들은 일본의 위협으로부터 ‘요동의 울타리’인 조선을 지키려면 조선을 아예 청의 속방(屬邦)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1882년 조선에서 임오군란이 터지자 이홍장은 청군을 들여보내 군란 가담자들을 참살하고 대원군을 천진(天津)으로 납치했다.

반중감정 고조, 해법은 상호존중

원세개

원세개

1884년, 조선을 쥐고 흔드는 청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 했던 김옥균 등 개화당(開化黨)이 갑신정변을 일으키자 청이 다시 개입한다. 원세개(袁世凱)가 이끄는 청군이 수적으로 열세였던 일본군과 개화당을 쓸어버리면서 정변은 사흘 만에 무산된다. 갑신정변 직후 한 조선 지식인은 “이여송은 몇 년을 싸워 일본군을 겨우 물리쳤는데 원 장군은 몇 시간 만에 임진왜란의 남은 도적들을 쓸어버렸다”고 찬양했다. 하지만 원세개의 본모습은 곧바로 드러난다. 갑신정변 이후 조선이 러시아에게 접근하려 하자 원세개는 고종을 폐위하려고 획책했다. 조선 지식인들의 짝사랑이 허망한 꿈이었음을 여지없이 보여주는 순간이었다.

얼마 전 중국 외교부장은 ‘삽십이립(三十而立)’을 내세우며 수교한 지 30년이 된 한·중 양국이 서로를 존중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런데 요즘 한국에서는 반중감정이 치솟고 있다. 진정한 상호 존중은 날로 힘이 세지는 중국이 혹시라도 원세개 시절의 뒤틀렸던 한·중 관계를 그리워 말고 한국을 동등하게 대해 주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