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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최민우의 시선

이재명의 '오징어 게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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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최민우 기자 중앙일보 정치부장

※이 기사엔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 게임'에 대한 스포일러가 다수 포함돼 있습니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오징어게임'을 이용한 패러디물 '이재명 게임'이 등장했다. [디시인사이드 캡처]

넷플릭스 오리지널 '오징어게임'을 이용한 패러디물 '이재명 게임'이 등장했다. [디시인사이드 캡처]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는 지난 3일 이재명 경기지사를 향해 "1번 플레이어, 조용히 좀 하라"고 말했다. “자기가 1번이면서 이렇게 티 내면서 떠드는 사람은 처음 봤다”는 말도 했다.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 게임' 속 1번 참가자가 해당 게임의 설계자라는 사실에 착안해, 대장동 개발의 설계자라는 이 지사를 1번 플레이어에 빗댄 것이다. 하지만 이 지사에게 '오징어 게임'은 가상 드라마가 아니다. 현재의 대선 레이스 자체가 '오징어 게임'과 흡사하다. 끝까지 살아남아 1위로 골인하면 청와대로 향하지만, 중도 탈락하면 '감옥행'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드라마 '오징어게임'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게임' [넷플릭스]

 '오징어 게임' 같은 대선은 '고발 사주' 의혹에 휩싸인 야당 유력 주자 윤석열 전 검찰총장에게도 해당할 수 있다. 하지만 현재까지 주인공은 단연 이 지사다. 대선 레이스가 이처럼 무시무시한 '데스(Death) 게임'이었던 적은 없었다. 패해도 기껏해야 정치적 위상이 떨어지거나 정계 은퇴 정도였다. 이 지사도 처음엔 게임의 살벌함을 감지하지 못했다. 그랬기에 지난달 14일 "대장동 설계는 내가 했고, 유동규는 실무자"와 같은 천기누설을 하고 만 거다. 야당은 이를 "배임 자백"이라며 죽일 듯 달려들고 있다. 하지만 형수 욕설, 김부선, 선거법 위반, 조폭 배후설 등 온갖 스캔들과 마타도어에도 굴하지 않고 버텨낸 이가 정치인 이재명 아니던가.

'죽기 아니면 살기'의 대선정국 #넷플릭스 '오징어 게임'과 흡사 #최후의 1인에 박수칠 수 있을까

 정신을 바짝 차린 이 지사는 특유의 공격 본능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다. 사안에 대한 구차한 해명보다 "국힘 토건 게이트"라며 곧바로 역공에 나섰다. 6일에는 "도둑들 몫을 빼앗아 오는 설계를 했으니, (범죄를 적용하려면) 토건 세력에게 돈을 갈취한 혐의를 적용하라"라고도 했다. 상식 있는 이라면 "억지와 궤변, 거짓말"이라고 시비 걸겠지만, 상관없다. 죽느냐 사느냐는 싸움판에 한가하게 무슨 논리 타령이던가. 이 게임의 생리는 진실이 아니라 '강해 보여야 한다'는 것임을 이 지사는 익히 알고 있었다. "다음 게임은 약한 것들을 솎아내는 거야. 가장 센 쪽에 붙어"(진행요원)라는 대사처럼 말이다. 대장동 의혹에도 민주당 내 '이재명 대세론'이 더 강고해지는 이유다.

드라마 '오징어 게임'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 게임' [넷플릭스]

 하지만 구속된 유동규(전 성남도시개발공사 기획본부장)는 여전히 뇌관이다. 관객은 이재명-유동규 관계를 오일남(오영수)-성기훈(이정재)과 같은 '깐부'(구슬치기 등 놀이를 할 때 같은 편)로 의심하고 있다. 유 전 본부장이 이 지사의 '장비'로 불리며 10여년 전부터 끈끈한 형-동생이었다는 증언이 여럿 나오지만, 이 지사는 “산하기관 중간간부를 측근이라고 하면 측근이 미어터진다”며 한사코 거리를 두고 있다. “결재권자라 배임에서 무관하지 않다”는 지적엔 "유동규가 내 측근이면, 윤석열은 문재인 대통령 측근이냐"라고 맞받았다. 그렇다고 유 전 본부장을 "천하의 나쁜 놈"으로 몰아세울 수도 없다. 한미녀(김주령)가 장덕수(허성태)를 끌어안고 징검다리에서 떨어졌듯, 자폭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어서다.

유동규 전 성남도시개발공사 기획본부장과 이재명 경기지사. [중앙포토]

유동규 전 성남도시개발공사 기획본부장과 이재명 경기지사. [중앙포토]

 이 지사의 스탠스는 "살피고 또 살폈으나 투기 세력의 비리를 막지 못해 아쉽다"다. 조상우(박해수)가 속임수를 쓴 게 나쁜 짓이지, 알리(아누팜 트리파티)가 구슬을 뺏긴 건 잘못이 아니라는 항변이다. 하지만 "당했다"라는 걸 내세울 수도 없다. 일반인이라면 동정의 대상이지만, 지도자라면 자칫 '호구'로 비치지 않겠나. 기부채납으로 어차피 돌려받을 수 있는 것을 "토건 비리 세력으로부터 5500억원을 환수했다"며 바득바득 우기는 데엔 이유가 있다.

           '오징어 게임'

'오징어 게임'

 근데 최근 분위기가 어쩐지 싸하다. 여권에서 "이재명 게이트" "구속될 수도 있다" 같은 말이 서슴없이 나오는가 하면, 청와대도 "엄중하게 보고 있다"라고 한다. '오징어 게임'에선 참가자들끼리 살인을 해도 그냥 내버려 둔다. 주최 측은 "게임을 강요하지 않았다"며 자율성을 내세운다. 그렇다면 현실의 검찰 역시 수천억원의 돈이 오간 투기판을 방치해야 하는 걸까. 이 지사가 "검찰 수사, 느낌이 조금 안 좋다"고 말한 건 주최 측은 함부로 끼어들지 말라는 경고다.

 드라마 '오징어 게임'은 고작 9부작이었다. 이 지사의 '오징어 게임'은 앞으로도 장장 5개월간 이어질 전망이다. '오징어 게임'으로 넷플릭스가 큰돈을 벌었듯, 이 지사가 이토록 온몸 불사르며 관객에게 짜릿함을 선사한다면 내년 3월엔 1등이 되는 게 흥행 논리상 '공정'일지 모른다. 다만 황인호(이병헌)가 1등이 된 뒤 '프런트맨'으로 복귀해 오징어 게임을 직접 관리하듯, 이 지사가 대통령이 되면 대한민국을 어떻게 관리할지는 예측불허다. 그때도 우린 계속 구경꾼으로만 남아있을 수 있을까.

최민우 정치에디터

최민우 정치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