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내아들은 힘센 치매환자…장애인 탈시설 로드맵은 사형선고”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2면

전국 장애인거주시설 이용자 부모회 회원들이 지난 8월 10일 정부세종청사 보건복지부 앞에서 발달장애인 탈시설 정책 철회를 촉구하는 집회를 갖고 있다. 뉴스1

전국 장애인거주시설 이용자 부모회 회원들이 지난 8월 10일 정부세종청사 보건복지부 앞에서 발달장애인 탈시설 정책 철회를 촉구하는 집회를 갖고 있다. 뉴스1

30살 A씨는 중증 발달장애인이다. 10년전부터 수도권의 한 장애인 거주시설에서 살고 있다. 3세 정도의 지능을 가진 그는 자주 ‘도전적 행동(문제행동)’을 보인다고 한다. 어머니 B씨(57)는 휴대전화에 보관된 동영상을 기자에게 내밀었다. 영상 속 A씨는 옷을 벗어던진 채 시설 복도를 빙글빙글 뛰어다녔다. 그의 키는 180㎝가 넘는다. 시설 직원들을 밀치거나 때리는 등 물리력을 행사하는 일도 간혹 있었다. 이런 행동이 발생하면 시설에 더 있기 어려워졌다. 그럴때면 할 수 없이 정신병원에 2주~한달가량 단기 입원했다. 약물치료로 안정을 찾으면, 다시 시설로 돌아가는 생활이 반복됐다. 집, 시설, 정신병원 외에 대안이 없다. 어머니 B씨가 덩치 큰 아들을 홀로 돌볼 여력이 안된다.

"유아에 멈춰 있는 데 자립?"  

그런 B씨는 요즘 정부의 장애인 탈시설 정책 때문에 가슴을 졸인다고 한다. B씨는 “나에게는 사형선고나 다름 없는 정책”이라며 가슴을 쳤다. 그는 “아들은 ‘물 줄까’ ‘밥 줄까’ 정도의 말밖에 알아듣지 못한다”며 “이대로는 자립이 불가능한데 정부가 장애인 탈시설 정책을 펴면 시설에서 무작정 내몰릴까 걱정이 된다”라고 말했다.

양성일 보건복지부 1차관이 8월 2일 정부서울청사 브리핑실에서 '탈시설 장애인 지역사회 자립지원 로드맵 및 장애인 권리보장법 제정 추진' 등을 브리핑 하고 있다. 연합뉴스

양성일 보건복지부 1차관이 8월 2일 정부서울청사 브리핑실에서 '탈시설 장애인 지역사회 자립지원 로드맵 및 장애인 권리보장법 제정 추진' 등을 브리핑 하고 있다. 연합뉴스

정부, '탈시설 로드맵' 8월 발표 

보건복지부는 지난 8월 장애인 탈시설 로드맵을 발표했다. 장애인의 주거결정권과 지역사회에서 생활할 권리를 보장하자는 취지로 마련됐다. 시설 내 장애인 학대사건이 줄줄이 터지면서 탈시설 목소리가 커졌다. 복지부 계획에 따르면 시범사업을 거쳐 2025년부터 본격적인 탈시설 지원 사업이 시작된다. 2041년이면 지금과 같은 장애인 거주시설은 사라진다. 시설에서 나온 장애인에 편의시설이 설치된 공공임대주택 등 집을 제공하고 취업 지원 등으로 자립을 돕는다. 개인 관리인력도 따라 붙는다.

하지만 중증 발달장애 보호자들은 크게 반발하고 있다. 이들은 시설 밖에서 오히려 장애인 인권을 더 침해받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6일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사회복지위원회는 기자회견을 열고 정부의 탈시설 로드맵에 대해 “중증 발달장애인의 돌봄(보호) 책임을 가족에게 떠넘기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국무조정실에 따르면 전국의 장애인시설은 1539곳, 거주 인원은 2만9086명(지난해 기준)에 달한다. 거주인은 중증장애인이 98.3%로 대부분이다. 80.1%가 발달장애다. 시설에 머무는 상당수가 중증 발달장애인이라는 의미다. 평균 거주기간은 18.9년, 평균연령은 39.4세로 조사됐다. A씨처럼 주로 성인이 됐을 때 시설에 들어간다.

장애인 거주시설 현황.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장애인 거주시설 현황.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익명을 요청한 또다른 중증 장애인 보호자는 “어렸을 땐 서로의 허리를 묶어 데리고 다녔지만, 어느 순간 자신이 나이 든 엄마보다 힘이 세다는 걸 안다”며 “가정에선 통제가 안된다. 힘센 치매환자나 다름 없다”고 말했다.

전체 발달 장애인 중 시설에 생활하는 이들은 10%정도로 추산된다. 정부는 탈시설 사업이 본궤도에 오르면, 매년 700명가량 장애인의 지역사회 정착이 지원될 것으로 보고 있다.

탈시설 일부 성공 사례 있다지만 

정부는 시범사업의 성공사례를 내세운다. 올해로 탈시설 8년차인 20대 지적·뇌병변 장애인 사례다. 그는 현재 지역자립생활지원센터에서 운영 중인 주택으로 이주한 뒤 생활하고 있다. 복지부에 따르면 그는 자신만의 독립공간에서 사는 것에 대한 만족도가 높고 한다. 지난 4월 취업에 성공해 한달에 80만원 가량을 벌고 있다.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사회복지위원회가 6일 서울 광진구 중곡동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에서 낸 입장문을 통해 "정부가 발표한 '탈시설 로드맵'은 돌봄과 보호가 필요함에도 충분한 지원체계가 구축되지 않아 어려움에 놓인 중증발달장애인 당사자와 가족의 어려운 현실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은 획일적, 강제적인 정책"이라고 비판했다.   사진은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사회복지위 기자회견. 연합뉴스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사회복지위원회가 6일 서울 광진구 중곡동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에서 낸 입장문을 통해 "정부가 발표한 '탈시설 로드맵'은 돌봄과 보호가 필요함에도 충분한 지원체계가 구축되지 않아 어려움에 놓인 중증발달장애인 당사자와 가족의 어려운 현실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은 획일적, 강제적인 정책"이라고 비판했다. 사진은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사회복지위 기자회견. 연합뉴스

중증 발달장애 보호자들의 호소

하지만 중증 발달장애 보호자들은 실제 자립이 쉽지 않다고 호소한다. 정부 계획에 따르면 기존 장애인 거주시설은 앞으로 ‘주거서비스 제공기관’으로 바뀐다. 24시간 지원이 필요한 장애인만 담당하게 된다. 사실상 혼자선 거동조차 어려운 최중증 장애인만 주거서비스 제공기관에 남겨질 가능성이 크다. 의사소통이 원활하지 않고 혼자 일상생활이 어려운 중증 발달장애인은 대거 시설 밖으로 나가게 될 것으로 보인다. 현행 발달장애인법상 스스로 의사를 결정할 능력이 충분치 않으면 보호자가 의사 결정을 지원할 수 있도록 돼 있다. 하지만 앞으로는 보호자가 “시설에 머물게 해달라”고 요청하더라도 시설 밖으로 나가게 될 수 있다.

이에 중증 발달장애 보호자들은 독립·자립공간이라는 임대 아파트에서 오히려 방치되는 것 아니냐고 우려한다. 더욱이 현재는 지역사회로 돌아온 이들을 감당할 수 있는 인프라 자체가 전무하다. 가족들이 장애인 돌봄에 매달리지 않는다면 돌봄 사각지대가 발생할 수 밖에 없다.

"지금도 갈 곳 없어 정신병원으로" 

김현아 전국장애인거주시설 이용자부모회 공동대표는 “시범사업 과정에서 일부 인권침해가 의심된 경우도 있는 것으로 안다”며 “시설거주 장애인의 80%는 발달 장애인인데 우리의 목소리를 듣지 않고 탈시설 로드맵이 강행되고 있다. 현재도 시설 축소로 갈 곳이 없는 최중증 발달장애인들은 정신병원에 있는 게 현실”이라고 말했다.

이런 현실은 국정감사장에서도 제기됐다. 인재근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6일 복지부 국정감사에서 “발달장애인 부모가 입소할 수 있는 거주시설을 찾지 못해 자녀를 정신병원에 입원 시키는 기막힌 사례가 발생한다”며 “입소시설 정보를 (국가, 지자체에서) 제공할 수 있도록 시스템을 개선해야 한다”고 말했다. 천주교 사회복지위는 “유럽은 장애 특성, 건강 지수에 따라 가장 적합한 생활 형태를 장애인 본인, 부모·가족이 자율적으로 선택할 수 있다”고 밝혔다.

서울장애인차별철폐연대가 6일 서울 중구 명동성당 앞에서 '유엔장애인권리협약에 기반한 탈시설 권리 보장을 기원하는 탈시설 수요미사 선포 기자회견'에서 발언하고 있다.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는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사회복지위원회가 탈시설 권리를 부정하고 최중증·발달장애인의 자립적 삶의 가능성을 부정하고 있다며 매주 수요일 명동성당 앞에서 정기미사를 하겠다고 밝혔다. 뉴스1

서울장애인차별철폐연대가 6일 서울 중구 명동성당 앞에서 '유엔장애인권리협약에 기반한 탈시설 권리 보장을 기원하는 탈시설 수요미사 선포 기자회견'에서 발언하고 있다.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는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사회복지위원회가 탈시설 권리를 부정하고 최중증·발달장애인의 자립적 삶의 가능성을 부정하고 있다며 매주 수요일 명동성당 앞에서 정기미사를 하겠다고 밝혔다. 뉴스1

첫 술 배부를 순 없다 

반면 장애인의 주거선택권을 보장해줘야 한다는 주장도 만만치 않다. ‘첫술에 배부를 순 없으니 일단 탈시설의 첫 발은 떼야 한다’는 입장이다. 이규식 서울장애인차별철폐연대 대표는 “많은 장애인이 지역사회에서 독립적으로 살 수 없을 것이라고 여겨졌다”며 “자원이 지역 인프라 확충보단 거주시설에 투자됐다. 결국 시설에 수용되고 고립된 것”이라고 말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