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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진중권 칼럼

오징어 게임 단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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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진중권 전 동양대 교수

진중권 전 동양대 교수

어릴 적만 해도 수많은 놀이들이 있어, 그 수가 거의 올림픽 종목에 달했다. 오징어, 다방구, 만세국기, 술래잡기,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닭싸움, 기마전, 자치기, 구슬치기, 비석치기, 사방치기, 딱지치기, 팽이, 공기, 실뜨기 등등. 우리 세대는 어린 시절 그렇게 다양하고 풍부하게 놀았다. 그런데 그 많던 놀이는 다 어디로 갔을까?

호모 루덴스

학자들은 다른 동물과 구별되는 인간의 고유한 특성으로 다양한 것을 거론해 왔다. 대표적인 것이 ‘지성을 가졌다’(호모 사피엔스)는 것과 ‘도구를 제작한다는 것’(호모 파베르)이다. 네덜란드의 사회학자 하위징아는 흥미롭게도 인간의 종적(種的) 특성을 ‘놀이’에서 찾았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놀이하는 동물(호모 루덴스)이라는 것이다.

거대한 게임이 돼버린 우리 삶
‘오징어 게임’이 반향 일으킨 건
판타지 아닌 삶을 목격했기 때문
오징어 게임, 세계 곳곳서 진행중

하위징아에 따르면 인류의 문명 자체가 놀이로서, 놀이 속에서 자라 나왔다고 한다. 노동에는 꼭 춤과 노래가 따랐고, 공동체의 삶에는 축제가 필수적이었다. 학문조차도 현자들의 수수께끼 놀이에서 비롯됐고, 전쟁마저도 스포츠처럼 신사적 규칙에 따라 수행됐다. 검사와 변호사로 나뉘어 진행되는 재판에선 아직 놀이의 흔적이 엿보인다.

하지만 근대 이후 상황이 달라진다. 데카르트의 합리주의는 과거의 ‘호모 루덴스’를 ‘생각하는 인간’으로 바꾸어 놓는다. 캘빈은 직업을 신의 소명으로 설명했다. 그 결과 놀이는 신의 명령을 거스르는 태만의 죄악으로 여겨지게 된다. 놀 줄 모르고 오로지 일만 하는 ‘회사인’은 이 직업소명설의 세속적 실현이다.

근대 이후 삶은 진지해졌다. 어른들은 더 이상 놀지 않고, 놀이는 아이들의 전유물이 된다. 그런데 우리 사회에서는 아이들마저 제대로 놀리지 않는다. 부모들이 어릴 적부터 사회에 나가 일할 준비를 시키기 때문이다. 우리의 아이들은 친구들과 어울려 노는 대신에 다른 아이들과 시험성적을 놓고 생존경쟁을 하고 있다.

어린 시절 ‘오징어 가이상’이라는 놀이가 있었다. 그 놀이가 이루어지는 공간에는 현실과 다른 규칙이 적용된다. 오징어의 머리와 몸통 사이로 난 좁은 길을 통과하기 전까지는 두 발이 아니라 한 발로 다녀야 한다는 것. 이렇게 일시적으로 현실과 다른 규칙이 적용되는 놀이의 특수한 공간을 ‘매직 서클’이라 부른다.

어른의 세계를 떠나 아이들의 놀이 속에서나 겨우 명맥을 유지하던 이 매직 서클이 최근 화려하게 부활하고 있다. 디지털 혁명으로 삶 자체가 거대한 게임으로 변해가고 있기 때문이다. 학교에서는 놀이를 이용해 학습을 하고, 기업에서는 경영과 생산의 효율을 높이는 데에 놀이의 전략을 활용한다. 이른바 ‘게이미피케이션’의 시대다.

모든 것이 무서운 기세로 놀이와 결합하고 있다. 교육은 ‘에듀테인먼트’로, 정치는 ‘폴리테인먼트’로, 정보공학은 ‘인포테인먼트’로 변해가고 있다. 심지어 저널리즘마저 과거의 진지함을 잃고 일종의 콘텐트 사업, 모종의 엔터테인먼트 산업으로 변모했다. 독자나 시청자들은 보도의 가치를 ‘사실’보다는 ‘재미’에 두기 때문이다.

얼마 전 국민의힘 이준석 대표는 대변인 선발을 ‘토론 배틀’이라는 서바이벌 게임으로 치렀다. 여기서 우리는 2030 세대 특유의 ‘유희적’ 정치의식을 엿볼 수 있다. 기성 정치인들도 나름의 방식으로 이 유희화 물결에 올라타고 있다. 감각이 떨어지다 보니 방식은 구리다. 며칠 전 안상수 전 인천시장은 대선후보 토론장에 토르 망치를 들고 나왔다.

유토피아인가 디스토피아인가

정보혁명과 더불어 산업자본주의는 빠르게 유희자본주의(ludo-capitalism)로 진화하고 있다. 이는 역사의 필연이다. 일찍이 카를 마르크스는 미래에 도래할 공산주의 사회에서는 ‘노동이 유희가 될 것’이라고 예언했다. 그의 공산주의적 유토피아가 오늘날 자본주의적 방식으로 실현된 셈이니, 이보다 더 큰 역사의 아이러니가 또 있을까?

하지만 삶의 유희화가 그의 생각대로 마냥 유토피아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 게임’은 오래전에 사라진 놀이들을 다시 불러낸다. 하지만 그렇게 불려 나온 기억은 추억보다는 악몽에 가깝다. 유희자본주의에서 삶은 게임이 될지 모르나, 그 게임은 삶처럼 끔찍한 것일 수 있다.

‘배틀 로얄’ ‘헝거 게임’ 등 데스 게임을 모티브로 한 영화는 전에도 많았다. 그런데 왜 하필 ‘오징어 게임’이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것일까? 그것은 다른 영화나 드라마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리얼리즘 때문이리라. ‘오징어 게임’에서 대중은 판타지가 아니라 삶 자체를 보았다. 우리의 삶이 이미 데스 게임의 매직 서클에 갇혔다는 얘기다.

마르크스가 꿈꾸던 ‘노동의 유희화’는 우리 사회에서 디스토피아로 실현되었다. 여기서 삶은 게임이 되었다. 생명을 건 대박의 놀음이 되었다. ‘오징어 게임’이 한국을 너머 세계적 반향을 일으킨 것은, 설사 여기서만큼 극단적 형태는 아니더라도 그 현상이 이미 세계 곳곳에서 진행되고 있다는 뜻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