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로컬 프리즘

냉장고 밑 ‘현금 1억’ 신고자의 슬픔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6면

최경호 기자 중앙일보 광주총국장
최경호 내셔널팀장

최경호 내셔널팀장

“노인이 혹시라도 보이스 피싱 같은 범죄에 연루된 게 아닐까 걱정됐습니다.”

최근 제주의 중고 김치냉장고에서 발견된 현금뭉치를 신고한 A씨(50대)가 6일 중앙일보 취재진에게 한 말이다. 그는 “꼬깃꼬깃한 현금이 든 봉투에 적힌 빼뚤거리는 글씨를 보곤 한눈에 노인이 평생 모은 돈임을 직감했다”고 한다. 경찰은 1억1000만원의 현금뭉치를 주저 없이 신고한 A씨에게 감사장을 주기로 했다.

전국을 놀라게 한 A씨의 신고는 지난 8월 6일 이뤄졌다. 그는 이날 112에 전화를 걸어 “현금뭉치를 발견했다”고 신고했다. “중고로 산 김치냉장고 밑바닥에 돈이 붙어있었다”는 말과 함께다. 이후 A씨 신원은 본인 요청에 따라 철저히 비밀에 부쳐졌다.

제주 서부경찰서가 확인한 결과 냉장고에 붙어 있던 돈뭉치는 5만원권 2200장이었다. 비닐에 든 지폐는 100매와 200매씩 따로 포장된 상태였다. 당시 냉장고 바닥은 각각의 봉투에 담긴 돈뭉치 위에 장판이 붙여져 있었다.

현금 1억1000만원의 주인이 남긴 필체. [사진 제주 서부경찰서]

현금 1억1000만원의 주인이 남긴 필체. [사진 제주 서부경찰서]

경찰은 즉각 돈 주인을 찾아 나섰지만 곧장 난관에 부딪혔다. 현금이 붙어 있던 냉장고가 서울에서 1년여 돌아다니다가 제주로 팔려왔기 때문이다. 서울의 판매상조차 이 냉장고가 언제 들어온 것인지도 인식하지 못했을 정도였다. 이 사이 언론 보도를 보고 “자기 돈인 것 같다”고 우기는 신고가 10여 건 접수되기도 했다.

결국 경찰은 현금이 들어있던 대봉투에서 실마리를 찾았다. 봉투에 자필로 적은 ‘보험’ ‘삼천만원’ 등의 글씨가 결정적이었다. 냉장고에서 함께 발견된 약봉투를 추적해 돈 주인이 다니던 병원과 약국을 특정한 후 필적 감정을 맡겼다.

수사 결과 돈 주인은 서울에 거주하던 60대 여성으로 파악됐다. 지병을 앓다 지난해 9월 세상을 떠난 사실도 확인했다. 유족들은 돈 주인이 김치냉장고에 현금 다발을 붙여둔 것을 전혀 몰랐다고 한다. A씨는 “우여곡절 끝에 돈 주인을 찾았다는 소식을 듣곤 내 일처럼 기뻤다”고 했다.

경찰은 유실물 처리 절차에 따라 발견된 현금을 유족 등 권리자에게 반환할 방침이다. 신고자인 A씨에게는 유실물 법에 따라 5~20%(550~2200만원)의 보상금이 주어진다.

신고자 A씨는 제주시내에서 형제들과 함께 PC방을 운영하고 있다. 코로나19 상황에서 영업에 어려움을 겪는 상황에서도 돈 주인을 생각하는 마음이 더 컸다고 한다. 현금을 신고한 이유에 대해선 “우리가 힘든 만큼 돈의 무게감을 충분히 알고 있었다”고 했다.

A씨는 이날 인터뷰에서 감사장과 보상금을 받게 된 소감을 묻는 말에 외려 슬픔을 표현했다고 한다. “돈 주인 분이 이미 고인(故人)이 됐다는 소식을 듣곤 너무도 마음이 아팠다”는 취지였다. 현금이 발견됐다는 소식에 “내 돈”이라고 우겼던 이들이 더욱 을씨년스럽게 느껴지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