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역지사지(歷知思志)

천고마비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1면

유성운 기자 중앙일보 기자
유성운 문화팀 기자

유성운 문화팀 기자

“가을 하늘이 높고 말은 살찌니 (오랑캐가) 반드시 침략할 것입니다. (秋高馬肥 變必起矣)”

중국 사서 『한서(漢書)』에 나오는 말이다. 천고마비(天高馬肥)도 여기서 유래됐다. 원래는 오랑캐에 대한 대비를 촉구하는 의미였다.

말은 고대 사회의 가장 중요한 전략물자였다. 한무제가 서역으로 진출한 이유 중 하나도 하루에 천리를 간다는 한혈마(汗血馬)를 얻기 위해서였다. 좋은 말을 확보하지 않으면 흉노족 등 북방 유목민족을 상대하기 어려웠다. 이후 중국이 남북조로 나뉘자 북쪽엔 선비족 등 유목민족이 세운 정권이 들어섰다. 이에 밀려 남쪽으로 간 한족 정권은 양질의 군마를 확보하는 데 큰 어려움을 겪었다.

역지사지

역지사지

이때 등장하는 것이 고구려다. 『송서(宋書)』에 “(439년) 태조가 북위를 토벌하고자 고연에게 말을 바치라 조서를 내리자, 말 800필을 바쳤다”는 기록이 나온다. 고연은 장수왕이다. 당시 송은 북위를 상대하는 것만으로도 벅찬 처지였다. 고구려에 강제할 힘이 없었다. 고구려는 전략물자인 말을 제공하고 적잖은 이익을 취했을 것이다. 이것을 북위에서 반겼을 리 없다. 이와 관련해 장수왕이 북방의 초원 대신 제주도에서 말을 확보했을 것이라는 추론도 있다. 제주도에는 대흘(大屹), 조흘(鳥屹) 등 ‘흘’이 붙인 지명이 많은데, 고구려에서 마을을 의미하는 ‘홀’이라는 접미사에서 유래됐을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장수왕이 천도한 평양은 대동강을 통해 서해와 연결된다. 상업과 무역에 적합한 도시였다. 초원 대신 바다를 통한 새로운 길을 그렸던 것은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