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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하라면 유리컵 깨서…" 어쩌다 최장수 007의 쿨한 퇴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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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최장수 제임스 본드 배우였던 대니얼 크레이그. 2015년 사진이다. EPA=연합뉴스

최장수 제임스 본드 배우였던 대니얼 크레이그. 2015년 사진이다. EPA=연합뉴스

제임스 본드 6대 시대가 막을 내린다. 전 세계 상영 중인 ‘007’ 시리즈 최신작 ‘노 타임 투 다이’와 함께다. 주인공 대니얼 크레이그(53)의 심정은 시원섭섭 보다는 시원함 100%에 가깝다. 개봉에 맞춰 지난달 30일(현지시간) 뉴욕타임스(NYT)가 게재한 인터뷰에서 크레이그는 “지난 15년 동안 나의 모든 것을 ‘007’에 쏟아부었다”며 “나는 본드였고 본드가 나였고, 이젠 마지막 작품을 관객들이 즐겨주길 바라는 마음뿐”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아마 나는 (무뚝뚝한 스타일 때문에) ‘투덜이 본드(Grumpy Bond)’로 기억되겠지만, 그래도 뭐 괜찮다”며 “나는 원래부터가 그저 하나의 평범한 사람일뿐이었으까”라고 웃으며 덧붙였다.

당초 2020년 개봉을 예정했지만 팬데믹으로 인해 개봉이 미뤄지면서 크레이그는 역대 최장수 제임스 본드가 됐다. 그러나 정작 그는 처음에 ‘007’ 시리즈 제작진에서 캐스팅 제안을 받았을 당시 “작은 악역이나 주고 말겠지”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NYT 역시 “크레이그는 전형적인 제임스 본드를 연기하기엔 조금 과하게 거칠고, (전임 배우들과 달리) 금발이었던 데다 영화 경력도 많지 않았다”고 전했다. 그러나 ‘007’ 제작진은 변화를 시도했고, 크레이그는 완벽한 수트핏과 함께 그만의 날렵한 액션을 장착하며 제임스 본드로 안착했다. 영국이 2012년 런던 여름올림픽을 개최했을 당시엔 개막식 영상에 엘리자베스 2세 여왕과 함께 깜짝 등장하며 가장 영국다운 순간을 연출하기도 했다.

지난달 30일 영국 시사회장에 등장한 크레이그. 붉은 수트를 완벽히 소화하며 찰스 왕세손 부부 등 VIP들을 맞았다.로이터=연합뉴스

지난달 30일 영국 시사회장에 등장한 크레이그. 붉은 수트를 완벽히 소화하며 찰스 왕세손 부부 등 VIP들을 맞았다.로이터=연합뉴스

제임스 본드 역할로 얻은 것도 많았지만 잃은 것도 많다. 시간과 자유는 잃었고 부상은 달고 살았다. 강산이 바뀌고도 수 년이 지나면서 크레이그는 이젠 그만두고 싶다고 공개 발언하기 시작했다. 2015년 ‘007 스펙터’ 시리즈 개봉을 앞두고 타임아웃과의 인터뷰에선 “한 번 더 제임스 본드 영화를 찍어야 한다면 지금 내 앞에 있는 유리컵을 깨서 내 손목을 그을 수도 있을 것 같다”며 넌더리를 냈다. 본드 영화 촬영엔 모든 에너지를 쏟아야 하는데다 부상 위험도 높기 때문이다. 사석에서도 말수가 적은 편인데다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기로 유명한 그로서는 꽤나 과격한 발언이었다. 하지만 결국 한 편을 더 찍은 뒤에야 제임스 본드 자리를 내려놓게 됐다.

크레이그는 연기자가 된 배경에 대해서도 무덤덤했다. 그는 NYT에 “그냥 먹고 살려고 한 게 연기였다”며 “16살때부터 서빙을 했는데 더이상 그렇게는 생계를 유지하고 싶지 않았고, 연기를 접하면서 ‘이거면 집세는 낼 수 있겠다’ 싶어 시작했다”고 말했다. ‘007’ 시리즈 출연으로 그는 1억6000만 달러(약 1899억원)의 자산을 보유한 것으로 영미권 매체들은 추산하고 있다. 그는 지난달 영국 매체와 인터뷰에서 “자녀 상속은 하지 않을 것”이라며 “부자인 채 죽는다는 건 실패라는 말처럼, 다 쓰고 기부하고 죽는 게 내 철학”이라고 밝힌 바 있다.

역대 쟁쟁한 제임스 본드 중 대표주자인 션 코너리. 마지막 007 시리즈 ‘007 네버 세이 네버어게인’(1983) 사진. AFP

제임스 본드역으로 분한 피어스 브로스넌이 본드워치를 차고 총을 겨누고 있는 모습.

제임스 본드가 아닌 크레이그는 어떤 배우의 길을 만들어나갈까. 그의 계획은 이미 꽉 차있다.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 중 하나인 ‘맥베스’의 브로드웨이 연극 무대에 서는 것부터 다양한 영화 촬영도 이미 시작했다.

크레이그의 후임 제임스 본드에 대해선 말만 무성한 상황. 다양성이 키워드인 시대를 반영해 ‘영국 남자’의 인종적 전형성을 탈피해야 한다는 얘기는 이미 새롭지 않다. 여기에 여성이 ‘본드걸’에서 벗어나 본드 그 자체가 되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크레이그 본인의 생각은 어떨까? NYT의 질문에 크레이그는 이렇게 답했다.

“글쎄, 이젠 진짜 나랑은 상관 없는 얘기인걸. 누가 하게 되든 행운을 빈다는 말은 하고 싶고, 내가 누렸던 것만큼이나 굉장한 시간을 영위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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